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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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下)
“사회 위한 일은 나를 위한 일”

1975년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과 그의 제자인 찬콩(Chan Khong) 스님을 만난 벨 훅스(Bell Hooks)는 여성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에는 나와 남을 동시에 사랑하는 자비심이 전제돼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와 관련 훅스는 불교 잡지 <샴발라 선>에서 틱낫한 스님과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자비심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미국 정부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잃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은 매우 놀라운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훅스가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흑인 여성과 페미니즘>을 저술한 기본 의도 역시 소외된 여성에 대한 자비였다. 공동체적 사랑을 전제로 한 그녀의 저술 작업과 일관된 문제의식은 바로 흑인여성의 사회적 지위에서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영향을 밝혀내고 그 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경험과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인 정치학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의 성차별주의를 모두 탐구할 필요가 있었다. 노예제 기간의 흑인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요소, 흑인 남성의 성차별주의, 최근의 페미니즘 내부의 인종차별주의까지 그녀의 탐구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훅스에게 미국은 계급에 기반을 둔 백인 우월주의적 가부장제 자본주의이다. 외조부모(그의 필명 벨 훅스는 외할머니 이름이다. 훅스는 자신의 이름을 소문자로 쓰기를 고집한다) 가계의 ‘탈법적인 문화’에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들은 중간계급 사회의 도덕적 관습 밖에 있는 전근대적인 남부의 흑인 농민들로 쉬지 않고 일했으나 항상 가난했다. 가난은 계급의 문제였으나 그것은 ‘돈’, ‘돈이 없다’는 상투적인 말로 은폐되었다. 훅스가 계급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고향을 떠나 장학생으로서 스탠포드로 옮겨온 후였다. ‘낯선 이방인’으로서 그녀는 혜택받은 ‘타자’인 특권층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훅스는 지배계급에게 그들의 규범이 있듯이, 그들이 노동계급의 처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가난한 이들과의 결속을 자신의 삶의 중요한 명제로 받아들인다.
훅스가 계급적 관점에서 성(性)과 인종의 문제를 바라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녀는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초기부터 백인 여성들이 인종과 성을 분리된 문제로 보는 주장에 혼란스러웠다. 흑인과 여성이란 삶의 경험에서 두 문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흑인이자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인식했다.
훅스는 백인 중심의 영문학계에서 토니 모리슨 등 흑인 여성작가를 재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성차별, 성적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임을 알리고, 해방을 위한 열정의 정치학을 실현하기 위해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이름 붙인 사회체제의 보수회귀 움직임과 반페미니즘 역공’에 맞서자고 언제나 열정적으로 호소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급진적 여성운동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훅스이지만 가슴 속에는 언제나 틱낫한 스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고백이다. “자아와 무아(無我)를 둘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은 무엇이든 곧바로 사회를 위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를 위한 모든 일 역시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이런 통찰력은 무아를 실천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샴발라 선’중에서) 김재경 기자
200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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