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화두 들며 대중외호
“인생살이 꿈같이 생각하고 부처님 믿고 살라는 거지…무슨 얘길 하라고…?”
대구 팔공산 남쪽기슭, 동화사에서 서북쪽으로 800미터쯤 들어간 곳에 위치한 산내암자 양진암. 73년간 대중외호와 함께 수행 외길을 걸어온 한 비구니 스님을 만날 수 있다. 세수 85세 법랍 73세의 성연 스님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인자한 모습,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불교정화까지 파란만장한 시대를 몸소 겪은 수행외길의 깊이가 숨겨져 있다. 한사코 할 말이 없다는 스님은 색(色)으로 보여줘야 알아듣는 범부를 위해 하나하나 수행의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스님은 12세에 해인사 약수암에서 쾌유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7세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젊은 시절 제방선방 곳곳을 거침없이 다니며 수행했던 스님은 정화 후 3년만인 58년에 동화사 양진암에 들어와 비구니 선방을 열었다. 이때 스님을 따라 공부하겠다고 들어온 스님이 성타 스님, 현묵 스님, 쾌승 스님, 육문 스님 등 7명이다.
살기가 힘든 시절, 스님은 이때부터 20년을 탁발로 선방 수좌들의 공부를 뒷받침했다. 스님의 탁발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힘겨운 수행길이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하는 염불소리는 온 산을 울리며, 호랑이도 산짐승도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 양진암은 관음전과 법보전, 미소실 등을 갖추고 36명의 수좌가 공부하는 유서깊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할 정도니 여기에는 성연 스님 45년 대중외호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고성 상문수암에서 성철 스님, 청담 스님과 함께 지냈던 한달간의 시절을 소중히 회고했다. 총알과 폭탄을 피해 모두가 나락사이를 기어 다니던 시절, 15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법문을 듣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사장삼을 수하고 대로(大路)에 당당히 나섰던 일. 밤새 날아온 폭탄과 총탄 속에 하룻밤을 지냈던 일 등.
“밤새 콩볶는 소리가 들렸는데 도량에는 총알 하나 없었지요. 담 너머 대밭에 총알이 새까맣게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어.” 신장의 옹호아래 거침없고 당당한 수행자의 발걸음에는 총알도 폭탄도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난리를 몰랐어요. 죽는다 산다는 생각 없이 오직 ‘이뭣고’만 찾았지요.”
스님의 말에서 화택에 있으나 근본자리에 들어 항상 고요한 수행자의 면모를 감히 살짝 짐작해 본다.
“스님은 지금도 토끼잠으로 잠깐 눈을 붙일 뿐 포행과 참선, 큰스님 법문청취로 하루를 바쁘게 보냅니다.” 25년간을 스님 옆에서 지켜봤다는 상좌 정묵 스님은 이렇게 스님의 일상을 일러줬다.
“일체 안되는게 없다. 모든 것은 물 흘러가듯 저절로 다 된다”고 늘 말씀하시는 성연 스님은 큰소리 한번 치는 법이 없다. 어느 누가 오든 공양을 주고 거둔다. 오늘도 울산에서 오셨다는 노보살이 나물을 캐며 성연 스님의 넉넉한 품에서 부처님의 대자비를 느끼고 있었다.
대구=배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