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인간방생’ 실천
“평생을 이곳에서만 있었어. 특별히 한 일도 없고 그냥 부처님이 좋아서 아직까지 이렇게 절을 지키고 있을 뿐이야.”
탑골승방으로 알려진 서울 보문동 미타사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구니 노스님이 한분 계신다. 출가 이후 평생을 산문밖 출입을 안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지순 스님. 세수가 이미 90이 넘었지만 아직도 잔병하나 없이 정정하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여지없는 이웃집 할머니 같지만 스님의 미소에서는 천진불의 온화함이 느껴진다.
1913년 수원에서 태어난 지순 스님은 고모와 함께 요양차 미타사를 찾아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고모가 숨을 거두자 스님은 생사에 대한 의심을 품고 출가를 결심했다.
지순 스님은 1939는 유명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득도했다.
“고모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됐어. 그래서 발심해 출가를 하게 됐지.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알 나이가 되니깐 그때 가졌던 의심과 초발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도 나태해지면 항상 그때 그 마음을 생각해.”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지순 스님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험난한 현대사를 겪으면서 부모를 잃거나 버림 받은 아이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두명씩 데려다 키운 것이 지금까지 100여명이 넘는다. 그 아이들은 이제 60이 넘은 할머니가 된 사람도 있고 스님과 같이 출가자의 길을 걷는 구도자도 있는 등 각계각층에서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복지 정책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절, 남보다 먼저 인간 방생을 실천한 스님이 지순 스님인 셈이다.
지순 스님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모두 잘 자라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코흘리게 어린아이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와 함께 찾아올때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순 스님이 미타사 산문을 나선 것은 평생 딱 한번 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은사 스님이신 유명 스님의 명령 아닌 명령으로 어쩔수 없이 사찰에서 기르고 있던 3~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지순 스님은 은사 스님 혼자 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 걱정이 돼 한달만에 다시 절로 돌아왔다. 유명 스님은 그동안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절을 굳건히 지켰고 지순 스님은 은사 스님의 이런 모습에 평생 사찰을 지키는 신장이 되겠다고 서원했다.
전쟁이 끝난 1954년 유명 스님은 전쟁으로 인해 겪은 고초로 열반했다. 그 이후 지순 스님은 지금까지도 절문을 나서지 않고 있다.
부처님에게 약속한 서원을 지키다 보니 지순 스님은 다른 스님들처럼 선방이나 강원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기자에게도 “난 큰스님이 아니야. 나보다 훨씬 덕높으신 스님들이 많으니 그런 스님을 찾아가 봐”라고 겸손해 하셨다.
9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도 하루에 천알 염주를 수십 차례 돌리며 조석예불과 포행을 빼놓지 않고 있다. 요즘도 속옷이나 양말을 상좌들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세탁하시는 등 수행자의 여여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계시다.
김두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