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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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을 통해 끝없는 세상 맛볼 수 있어야
육바라밀 행을 하려면 내 마음부터 정립해야

태초가 무엇인가요?

주위에서 ‘태초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 하는 것에 대해 설왕설래를 많이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시비 분별 하는 우리의 차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논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태초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듯 삶이 어렵고 힘든데 그렇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엉망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의 소견을 넓혀주십시오.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타의의 이름이나 형상을 보고서 기도하고 비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정말로 지나야 되고요. 종교라는 건 이름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진리가 어떻게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걸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형상이 여러분의 형상과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음도 둘이 아니고 생명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하다는 겁니다. 처음 발심해서 공부하겠다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안 되니까 방편으로 모셔 놓고 ‘당신하고 둘이 아니다.’ 하고 이렇게 가르쳐야 될 텐데,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전부 이름과 형상을 믿으라고 하고 기도를 하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렇게밖에 안 된다면 지금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여러분한테는 한 번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자재권을 얻을 수가 없어요. 남한테 만날 빌어야만 하니까, 얻어먹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얻어먹지도 못하면서 그래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바람, 흙, 먼지, 물이 한데 합쳐져서 자꾸자꾸 모여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따뜻한 온기가 나오겠죠? 그게 불입니다. 생명! 태초에 생기는 생명입니다. 그게 가공이 돼 있기 때문에 따뜻해진 거죠. 그러니깐 거기에서 생명체가 생긴 겁니다. 근데 다 생기고 나서 제일 나중에 생긴 게 사람입니다. 왜냐. 미생물로 생겨서 그 미생물이 형성되고 진화되고, 진화되고 형성되다 보니까 제일 나중에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근데 우리가 거기에서 한 가지 배울 게, 미생물도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생물일 때에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자식이 되고,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됐다, 자식이 됐다 부모가 됐다 이렇게 진화돼서 사람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넓게 보면 전부 내 아버지 아님이 없고 내 어머니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계율에서 첫째 살생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두가 전자에 내가 사람이 되기 이전에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으니까 남의 생명을 함부로 한다면 내 생명까지도 온전치 못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전자에 미련했을 때의 못났던 그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모두 자기 아님이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보니까 자기한테 스스로, 보이지 않는 정신계에서 스스로 인정을 받고 스스로 ‘착하구나, 착하구나. 참 너는 정말이지 착하구나.’ 하고 거기에서 스스로 먹게 되고 스스로 살게 되는 거죠.
알고 보면 우리는 지수화풍입니다. 사람만 지수화풍으로 된 게 아니죠. 미생물에서부터 쭉 인간까지 전부가 지수화풍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수화풍으로 돼 가지고 지수화풍을 먹고, 또 지수화풍으로 돌아갑니다. 어때요? 그렇게 에누리가 없어요. 그리고 또 지수화풍이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보세요. 죽을 때는, 지수화풍이 딱 벌어졌을 때는 자기 거는 자기가 찾아갑니다. 바람은 바람대로 자기가 찾아가고, 흙은 흙대로 자기가 찾아가고, 물은 물대로 자기가 찾아가고, 불은 불대로 자기가 찾아가요.
남는 거라고는 바로 자기 영원한 생명의 근본 자체만 남기 때문에 다시 이 세상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은하계 별성이나 마음의 별성이나 똑같이 연결이 돼 있는 거예요. 나의 별성 그 자체가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내 육신과, 그렇게 친다면 물질계의 나와 정신계의 나가 둘이 아니게끔 통신이 되는 거죠. 바로 정신계의 불성이 바로 거기하고 연결이 돼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의 그 모두를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예요. 그래서 이 공부는 안 하면 안 된다 이겁니다. 한 생을 통해서 세세생생 끝없는 세상을 우리가 맛볼 수 있고 자유권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환자들을 위해서

미국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불자입니다. 남편의 전공이 노인 내과여서 개업을 하고 제가 병원에서 도와주다 보니까 돌아가시는 노인 환자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도 저희와 인연이 맞아서 남편의 손을 거쳐서 돌아가시고 그러는데, 그분들을 위해서 천도재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못 고치는 환자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또 어떻게 관해야 할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환경에 따라서요.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옛날의 방식대로 그대로 하는 게 참 좋은 것 같죠. 그런데 그 의미가 아주 깊어요. 이거는 이 마음공부 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한생각에 할 수가 있어요. 또 두번째는 음식을 그렇게 차려 놓지 않고 할 수가 있어요. 세번째는 상대방에서 그거 아무것도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그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되면 언짢거든요. 좋지 않죠, 섭섭하고. 그러니 의사로서 그렇게 하는 거는 한생각으로 하세요. 한생각으로 그냥 ‘주인공, 너만이 좋은 데로 인도할 수 있잖아. 너만이 요다음 세상에는 고생 안 하고 살게끔 할 수 있잖아.’ 한다면 그대로 재깍 그게 법이 됩니다.
그리고 병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분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의식 속에서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러 주기를 “의식 속에서 그렇게 하는 거니깐 그 의식 속에서 그러는 거를 다 주인공에다 맡겨라.” 하고 요렇게만 일러 주시고, 의사도 ‘주인공, 너만이 그 사람을 낫게 할 수 있어.’ 그렇게 한다면 좋아질 겁니다. 그게 결부가 되는 게 뭐냐 하면, 그 자리는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허공을 다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나로 결부가 되면 결부된 그 자체가 바로 거기에서 또 결부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게 낫게 되는 거죠. 모두 둘이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속도를 알고 싶어요

저는 대학에서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 공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사실 물리학을 하게 되면 참나를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느 정도 들었기 때문에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설법하시는 도중에 보면 마음은 빛보다 빨라서 아니 가는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마음이 빛보다 빠르다는 그 얘기보다도 무한하다는 거, 순간적으로 간다고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맞는 생각인지요?

왜 빛보다 빠르냐 하면 빛은 가다가도 착오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안 그럴까요? 빛은 가다가도 착오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데 마음이라는 건 무한해서 어디고 착오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알며, 남의 말을 듣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며, 또 마음의 눈으로다가 모든 거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도가 아니라 그랬어요.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신통을 벗어나야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겁니다. 오신통을 벗어나게 되는 거는, 즉 말하자면 ‘대뇌를 통해서 누진을 넘어서야 된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지금 공부하는 게 천체물리학도 되고 심성의학도 되고 또는 심성과학도 되고, 아니 되는 게 없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몸으로 비유할 때 몸 하나에 수백 아니, 헤아릴 수 없는 모습과 헤아릴 수 없는 생명과 헤아릴 수 없는 의식이 있는데, 그러면 이 몸뚱이는 집합소밖엔 안 되는 거죠. 생명들의 집합소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한 개체지요.
그래서 지구로 비유한다면, 생명체가 바깥으로 나오면 죽는다, 지구 바깥으로 벗어나면 우리는 죽는다 이런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내 몸 하나를 가지고 지금 모두 연구해 나가면서 알아보면 내 몸이 지구와도 같고 우주와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관한 건에 있는 게 생명의 근본, 즉 별성을 알 수가 있고요. 그리고 그 외에 북두칠성이나 이런 것이 어떠한 관계로 생겼는지도 알 수 있구요. 그러니깐 모든 혹성에 대한 문제들도 우리가 탐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여러 가지로,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냥 보통, 심안으로 보는 사람들은 차원이 쪼금, 또는 혜안으로 보는 사람 차원이 더 좀 높고, 법안으로 보는 사람 좀 차원이 더 높고, 아주 높은 사람은 불안으로 본다, 이런 문제 등등이 있는데요. 우리는 차원이 낮으면 낮은 대로 낮은 소리만 하게 돼 있구요, 높으면 높은 대로 소리를 하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음식도 맛을 못 보고 보지도 못하고 그런 거는 생각이 안 나듯이, 우리가 이 소리 듣고 저 소리도 듣고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마음공부를 해 가다 보면 ‘아, 이건 이거로구나.’ 하고 자꾸자꾸 알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배우는 거만 가지고가 아니라, 배우면 배우는 대로 넓어지는 거는 마음입니다. 덮어놓고 마음을 넓힌다고 해서도 아니 되니까 하나하나 체험해 가면서 학생의 것으로 만드세요.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봉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스님, 항상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직을 갖게 되고 이러는 것이 저만의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교수가 되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러는 것도 좋겠지만 이미 저보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그 공부를 하는 시간에 차라리 병원이나 노약자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고 갈등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그것을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거는 작게 생각하는 겁니다. 진정한 보시는 물질로서 보시를 하는 거보다도 마음의 보시를 하는 겁니다. ‘일체제불의 노래’ 있죠? 한마음을 음파를 통해서 전 우주에 전해지도록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 음파를 통해서 마음들이 전부 개선이 되고 지혜로워지고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도 일종의, 이런 말을 했죠. 물질 하나를 보시하는 거보다도, 고건 당장 쓰고 나면 고만이고 먹고 나면 고만이니까 물질보시보다도 무주상 보시를 공심으로서 한다면 그거는 끊어지지 않는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얻게 해 줄 수 있다 이런 게 있죠. 그러니까 무주상 보시라는 것이 너무도 크고 광대해서 오히려 무주상 보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요. 그저 남들이 보게 내가 ‘이거 얼마를 시주했다. 얼마를 했다.’ 이런 것만 모두 생각들을 하시는데 함이 없이 해야 그게 무주상 보시가 되는 거지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이미 무주상 보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때에, 예를 들어서 얘기하는 겁니다. 물건을 사러 가면 그 물건의 값어치대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온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게 주인에게 돈을 준 게 없고 그 사람도 돈을 받은 게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물건을 주고 돈을 주고, 받고 주고 했으니까 피장파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누구를 줬으면 준 대로 줬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이만큼 줬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나.’ 이렇게도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깐 얼른 쉽게 말해서, 더 이상의 값어치를 받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 말도 그렇게 나오거든요. 그렇게 한다면 그 이상 거를 받지 못해요. 한 게 없기 때문에요. 입으로 구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이 노래를 한마디 하는데 그냥 하거나, 그림을 한 장 그렸는데 그냥 그렸다거나 이런다면 그건 산 음성이 되지 못하고 산 그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해서 음성을 낸다면 그 음성이 가사에 의해서, 그 가사의 용도에 따라서 음파가 되는 거죠. 그래서 남을 건질 수 있느냐, 남을 이롭게 하는 가사냐, 평화롭게 할 수 있는 가사냐 하는 겁니다. 가사에 따라서 음파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공부는 말로 헤아릴 수가 없는 공부입니다.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말입니다. 우주가 끝이 없듯이 우리가 사는 것도, 진리도 그렇게 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깐 그거를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분이 “우리 아버님께서 교도소에서 나오셔야 될 텐데 나오시질 않으니까 서명을 받아서 진정서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내가 “당신 한생각이라면 저절로 나올 텐데 떳떳하다면 왜 비굴하게 그것을 받아서까지 진정서를 내느냐.” 그랬습니다. 그건 뭐 이름을 대면 안 되겠으니깐 그냥 말하겠습니다만, 전직에 무모하게 계셨던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그래요. 우리나라를 생각하고 우리 국민을 생각하고 그런다면 모든 게 우리나라의 수치거든요. ‘쪼금 아쉽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 전 세계로 볼 때도 참 수치지요. 그래서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구나.’ 이렇게 말을 하게 되지요.
그런 거와 같이 한생각이다, 이게 말로는 한생각이라고 아주 쉽게 하지만 한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광대무변하고 묘법인지 몰라요. 음파가 그대로, 얼른 쉽게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전부 나가서 조절을 하거든요. 마음을 조절을 해서 둘 아니게 응신이 되면 그 마음들이 다 풀리게 되는 그런 문제를 말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말을 함부로 하고, 또 스님네들을 우습게 보고, 그냥 마구 해 대는 수가 많거든요. 아무리 말 못하는 돌멩이라도 내가 공부한 대로 말을 할 수 있거든요. 내가 마음공부를 했다면 꽃나무도 전부 같이 통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물에는 용신이 있고 산에는 주산신이 있고 하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모두 통해야 남이 아니고 서로가 조직적인, 우주전체가 조직적인 진리로서 에누리 하나 없이 틀림없이 진행해 나간다 이런 거죠. 질서정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질서정연치 못하니까 질서정연치 못하게 세상이 돌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이득이 없고, 자기를 자기가 망치고 돌아가거든요.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남을 위해서 하는 봉사라 해도 무주상보시가 되어야 합니다.

육바라밀을 완성하려면

대승불교에서는 욕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사바세계에서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피안의 언덕으로 넘어설 수 있는 수행법인 육바라밀을 불자라면 꼭 실천하도록 가르치시는데, 어떻게 해야 육바라밀을 생활 속에서 온전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는지요.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벌써 ‘내가 이러한 일을 해야겠다’ 하고 자동적으로 마음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해야겠다고 하기보다도 인간이 되었으면 벌써 스스로서 자기가 하는 행이 육바라밀이 돼야 하는 겁니다. 한데 합쳐서 육바라밀 하면 그냥 간단하지마는 우리 마음을 빼놓고는, 육바라밀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면 보시를 해도 무주상 보시와 유주상 보시가 둘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무주상 보시라고 말하기 이전에,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한 그릇 떠 줬어도 보시요, 마음을 잘 내 줬어도 보시요, 말 한마디를 잘 해 줬어도 보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이 벌써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부처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또 부처의 모습으로 태어났으면 보살행을 해야 하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그대로 자기가 행할 줄 알아야만이 이게 육바라밀의 근본적인, 마음 자체는 하나지마는 마음 내는 거는 수천수만 가지로 낼 수 있는 그 마음을정립해서 내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육바라밀을 실천하라고 하셨겠지마는 우리가 동물로서 사는 이런 본위로, 물질 본위로만 산다면 육바라밀의 행을 못합니다. 우리는 남을 이익하게 하지 않고, 남의 걸 뺏으려고 하고 부수려고 하고 싸우려고 하고, 내 것만 알고 나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육바라밀의 정립이 될 수 없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下)의 동물입니다. 고등 동물이 아니라 하의 동물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스스로 육바라밀을 행할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물질 본위로 나간다면 육바라밀을 행할 수가 없고, 물질 본위가 아니라 우리가 말 한마디와 한생각의 무주상 보시나, 하여튼 마음을 한데 합쳐서 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행하는 모든 것이 전부 보시죠. 하나도 보시 아닌 게 없거든요. 자기도 중생이니까 자기 몸을 이익하게 하는 것도 보시입니다. 자기 몸도 중생입니다. 중생이라는 이 몸이 없고 어떻게, 그럼 뭘 알겠어요? 내 가치관을 알고 또 우주를 알고 불교를 알고 부처님들을 알고, 전부 알고들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이 바로 각자 알고 있는 그 자체로써 행하면 그대로 그게 육바라밀의 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무슨 가타부타가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안 한다 한다가 어디 들어갈 수가 있겠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육바라밀 행을 하려면 내 마음부터 정립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정립을 하게 되면 내 마음속의 철학이라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도 물질과학이라는 것을 철학으로 혼합을 시키면 바로 지금 현재 육바라밀의 보살행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력으로 나가는 것이 철학이라면, 만약에 물질 본위로 물질을 만드는 과학이라면 혼합이 되지 않고는 안 된다 이겁니다. 이것이 겸하면 더욱 좋지만 그래도 정신력과 지금 현재의 물질력에 한데 합해서 우리가 행을 할 수 있다면 그거는 정말이지 보람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정신력으로 산다 하면 마음을 정립해서 만약에 두뇌로 통해서 나가는 그 행이라면 그대로 보살행인 겁니다. 자기가 어떠한 돈에도 팔리지 않고 태산 같은 물질에도 팔리지 않는가 하면, 어떠한 이름에도 팔리지 않는 그러한 철학을 가졌다면, 그러한 원심력을 가졌다면 그대로 보살행이에요. 하나하나가 전부 보시 아닌 게 어딨습니까. 지금 우리가 노래를 한다 무슨 국악을 한다, 설법을 한다, 무슨 과학이다 무슨 철학이다, 무슨 정치다 무슨 공업이다 경제다 국방이다 이런 것도 전부 거기에 합쳐서 있기 때문에 지식으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지식이라는 거는 한계가 있고 지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량으로 나누는 거지, 정신력으로서 마음을 정립해서 나간다면 그건 그냥 육바라밀 보살행을 그대로 실천하는 겁니다. 육바라밀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그대로 보살행이죠.
그래서 육바라밀도 한마음 속에서 여섯 가지가 다 나가는 겁니다. 보시든 지계든 인욕이든 다 거기에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 가운데 어떠한 것에도 팔리지 않는 그러한 마음의 정립이, 부동한 마음의 정립이 됐다면 거기에서 아니, 육바라밀만 나가겠습니까? 천차만별로 다 나가는 것이죠.
인간이라면 벌써 눈 간 데 코가 가고, 코 간 데 귀가 가고, 귀 가는 데 맛을 알게 되고, 다 알기 때문에 그것이 한마음 속에서 나가는 겁니다. 물러서지 않는 마음도 물러나는 마음도, 보는 마음도 듣는 마음도 또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도 다 거기서 나가기 때문에 그것을 잘 정립을 하면 스스로 보살행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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