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 나온 불광산 비구니 1호
1976년 의공(依空) 스님은 여름에 누에가 허물을 벗듯 삭발하고 정식으로 성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검게 빛나던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땅에 떨어지던 순간을 스님은 이렇게 회상한다.
“사실 출가는 진정한 나를 찾은 것이며 하나의 해탈이었다. 승복으로 갈아입었을 때의 그 가뿐한 느낌은 내가 몇 생을 추구해 오던 것이었으며, 나는 원래 불문에 들어올 사람인 것으로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새장에 갇혀 있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의공 스님은 스스로 불광산의 스님들 중에는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다른 스님들이 불광산 초창기의 그 어려웠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새로운 도약을 할 생기왕성한 시절에 스님이 입산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운 대사를 비롯한 선배 스님들이 아직 밖으로 포교에 나서지 않고 불광산을 가꾸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가르침도 받을 수 있었다. 의공 스님은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성운 대사와 사형들에게서 친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림 고수들로부터 한꺼번에 무공을 전수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이 때 불교가 장차 다원화되고 교육 수준도 더욱 향상될 것에 대비해 우수한 인재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성운 대사가 첫 번째로 선택한 인물이 의공 스님이었다. 성운 대사는 의공 스님을 일본 동경대에 유학시키기로 하고 일어에 능숙한 자장 스님을 딸려 보냈는데, 이로써 의공 스님은 불광산에서 일본 국립대에 유학한 최초의 비구니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의공 스님은 일본어도 몰랐는데 겨우 일주일 동안 일본어 기초를 한번 훑어보고는 혼자서 사전을 찾아가면서 일어를 공부했다. 누군가 일어를 공부하는 데는 만화나 신문, 잡지를 보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지하철이나 쓰레기통에서 이런 것들을 뒤져 꼼꼼히 읽으면서 일상용어를 익혔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의공 스님은 먼저 유학한 선배인 자혜, 자용, 의계 스님이 쓰던 일용품을 물려받아 쓸 정도로 검소했다. 이불은 다 헤지고 전기 밥솥은 두드려야 작동이 되고 흑백 텔레비전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쓰면서도 언제나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의공 스님은 이러한 노력으로 3년 뒤 동경대 인도철학과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불광산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문화와 교육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의공 스님은 귀국하자마자 <보문> 잡지의 사장과 보문중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동시에 <성운대사 강연집>을 편찬하고 불광산문교기금회의 집행비서직을 맡았다. 교육방면에서는 불광산불학원 뿐만 아니라 문화대학, 성공대학, 동해대학, 까오슝사범대학 등에 출강하여 인생철학과 화엄철학 등을 강의했다.
그러나 의공 스님은 50을 넘긴 나이에 까오슝사범대학대학원 중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앉아서 책만 읽는 서생은 아니었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면서 절에서 필요로 하면 어떠한 임무든지 훌륭하게 수행했다.
쌍림사(雙林寺) 주지, 타이쫑 동해도량 주지, 미국 서래사 주지, 전등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불광산문화원 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20년 동안 의공 스님은 문화, 교육, 사찰운영, 행정, 인사, 국제관계 등 모든 업무를 막힘없이 수행해 왔던 것이다.
의공 스님의 남은 발원은 스승인 성운 대사의 사상과 저작, 설법 등을 정리하고 다듬어 ‘인간불교(人間佛敎)’의 종풍을 시방삼세에 드리우는 것이다.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