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사랑’ 1백년 한길로
“항상 즐거워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팔당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하남시 검단산 통일정사 회주 보각(寶覺) 스님이 지난해 1월 백수(白壽)를 맞아 신도들에게 내린 법어다. 세월의 무게로 육체의 기력은 많이 쇠했지만 스님의 법문에는 아직도 수행자의 기품이 성성하다.
1904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958년, 늦은 나이에 출가한 보각스님. 반평생을 수행자로 살았지만 스님은 아직도 독립운동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04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유관순 열사와 기숙사에서 동고동락하며 3·1 만세운동을 함께 펼쳤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가 한살 많지만 한 학년 아래였던 관순이와 함께 밤늦게까지 태극기를 만들었지요. 그때는 태극모양을 정확히 몰라 밥공기로 동그라미를 그렸고 태극괘는 대충 흉내만 낼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피곤하지도 않았고 신이 났던 것 같아요.”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친 것과 달리 자신은 어리다는 이유로 동네 순경에서 따귀 한대 맞는 것으로 화를 면한 보각 스님. 이후 스님은 1924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일제하에서는 살수 없다며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기독교 근대 교육을 받았던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결혼을 하면서 부터다. 독실한 불자인 남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그 심오함에 놀라 신심을 키우게 됐다. 그러나 스님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이 통일되었지만 둘로 갈라진 현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세 아들 등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었다. 그때마다 스님을 지켜준 것은 불심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1955년부터 59년까지 전국적인 규모의 신도회를 조직해 불교정화운동에도 참가해 많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불교정화운동이 거의 끝날 무렵 방보문 스님의 권유로 법주사 수정암 문중의 하계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하동산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좀처럼 수행이력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나, 1970년 통일정사를 창건하고 30여년을 토굴생활을 했다는 스님의 말 속에서 오랜 수행의 이력이 느껴진다.
스님이 평소 강조하는 것은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으니 욕심내지 말고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하게 수행하세요. 또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절대로 남을 미워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이 불자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100살이 넘은 스님에게 아직까지 변함없는 것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찰 이름을 통일정사라고 지은 것과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단군 성전 건립에 공을 들이고 있는 점, 조석 예불 때마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열사와 김구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친 유공자, 6·25 등 한국근현대사에서 숨진 영가를 축원하는 일 모두에서 스님이 얼마나 조국통일을 염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스님은 오늘도 죽기 전에 조국이 통일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채 통일정사를 지키고 있다.
김두식 기자 doobi@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