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문장력으로 명성
대만 불교계의 문화행사를 주도하는 불광산문화원 원장 의공(依空) 스님은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이 높다. 스님이 발표하는 문장은 불법의 반야지혜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고와 문학적 수식을 갖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스님의 작품으로는 <불광산 영이록(佛光山靈異錄)>, <인간교유(人間巧喩)>, <돈오적 인생(頓悟的人生)> 등이 있다.
불광산 출입기자인 <중국시보(中國時報)>의 소정국(蘇正國) 특파원은 불교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님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오고 스님이 말하는 대로 받아 적기만 해도 훌륭한 문장이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스님이 미국 서래사 주지로 나가 있을 때는 국제전화로 항상 물어보곤 했을 정도다. 스님이 문학에 조예를 갖게 된 것은 스승인 성운 대사의 지도 덕분이라고 한다. 갓 출가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문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뽐냈으나 성운 대사가 의공 스님의 문장을 고쳐준 뒤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고 더욱 분발해 문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풍부한 상식과 문학적 소양을 총동원해 구사하는 의공 스님의 뛰어난 말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님은 아직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서점에 들리고 매일 독서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당신이 법문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즐겨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겸손해 한다.
의공 스님은 이러한 일면 이외에도 누구보다 선사로서의 기풍을 간직하고 마조도일 스님이 말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실천한다. 스님의 담백한 생활태도는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친동생과 6년이나 같이 불광산에 살았지만 그들이 자매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을 정도다. 사중에서도 법담 이외에는 허튼 말을 하지 않지만 공익과 불교를 위한 일에는 조금도 양보가 없다.
의공 스님은 속성이 장(張)씨로 1951년 대만 이란(宜蘭)에서 태어났다. 의공 스님이 두 살 때 고향인 이란에 성운 대사가 방문했는데, 이후 성운 대사는 선지식으로서 일생동안 스님에게 영향을 끼쳤다. 당시 스님은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절에 따라가서 예불도 드리고 절에서 나눠주는 기념품이나 먹을 것 등을 얻어먹고 놀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스님은 두 언니와 뢰음사(雷音寺)에 놀러 갔는데 이 때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염불 소리며 예배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의 싹이 터 20년 뒤에는 본인이 스님이 되어 신도들을 이끌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그 때 스님은 성운 대사가 설법하는 것을 몰래 가서 보곤 했는데 엄숙한 분위기며 대사의 자비로운 모습이 어린 마음에 깊이 각인된 것 같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나 의공 스님은 점차 성장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고 현대 문명과 접하면서 불교란 시골 사람이나 믿는 미신으로서 과학과 합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님은 대만의 명문 국립대학인 중흥(中興)대학에 진학해서도 지식인층에 속하는 급우들이 불교를 배우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스님은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불광산에서 열린 대학생수련회에 참석했을 정도다.
스님은 여기서 생각지도 않게 불광산의 스님들이 묵묵히 봉사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과거에 생각한 것과 같은 불교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을 등지고 부처님을 팔아먹는 그러한 스님들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열의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 감복한데다 성운대사의 반야심경 강의를 듣는 순간, 마음이 완전히 바껴 불교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불광산에 한번씩 갈 때마다 신심은 더욱 깊어져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학교의 은사가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사양하고 불광산에 안주할 것을 결심했다.<계속>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