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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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의 마지막-제주도
100여곳 넘는 폐사지 대부분 흔적조차 없어

2년여에 걸친 ‘잊혀진 가람탐험’이 국토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발길을 멈춘다. 여기서부터는 푸른 바다.
‘피안의 감성’을 잊어버린 범부의 몸으로는
더 이상 삐걱거리는 구도(求道)의 노(櫓)를
저을 수가 없다. 그동안 북방한계선 넘어 석왕사지,
금강산 신계사지에서부터 무안 땅 총지사지,
경주의 감은사지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의
1백여 폐사지를 답사했고, 그 가운데 40여 곳을
현대불교신문에 연재하였다.
이 기획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사라져 폐허가 된 전국의 수많은 사찰 터를
찾아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한 서린 그 울림들….
이제 더는 갈 곳이 없어 그 긴 울림을 독자들 몫의
여운으로 남겨둔다.

제주도 폐사지 답사는 ‘잊혀진 가람탐험’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기에 하늘 길을 이용했다. 2월의 이른 아침. 눈구름 아래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는 반도의 산하는 한 폭 수묵화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저 산과 강들이 등을 떠밀고 어깨동무를 하여 해와 달을 골라 이 땅에 오천년 역사의 행간을 일궜던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린 이는 제주불교의 ‘지킴이’ ‘정토신문’의 강석훈 차장이었다. 나와 함께 2년여의 세월을 들판으로 쏘다니며 쓸쓸한 폐사지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은 고영배 기자가 미리 연락해 놓은 덕분이었다. 수시로 점심을 거르며 수백리 비포장도로를 마다 않고 달린 고 기자의 기자정신 덕분에 독자들은 생생한 폐사지의 근황을 접할 수 있었다.
제주 지역은 한때 ‘절(寺)오백, 당(堂)오백’이라 불릴 만큼 불교 교세가 크게 은성했던 곳이다. 특히 수정사지(水精寺址), 법화사지(法華寺址), 원당사지(元堂寺址)는 제주의 3대 사찰로 불릴 만큼 사세를 크게 떨친 거찰들이었다. 그 외 1백여 곳이 넘는 폐사지들이 도내 곳곳에 널려 있으나, 불교와 당국의 무관심 속에, 혹은 세월의 물결에 휩쓸리고, 혹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총면적 1,847㎢, 국토의 1.8%에 불과한 제주도. 그러나 ‘아시아의 하와이’, 세계적인 휴양 도시로 각광받는 제주도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섬 전체가 퇴적암층과 현무암으로 되어 있지만, 흑갈색의 화산회토 사이에 실팍한 점사질이 붙어있는 것처럼, 대몽항쟁의 격전지, 유배지, 4.3사태의 발생지답게 탐라의 세월이 피와 눈물로 얼룩졌지만, 불법만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용설란 같은 정법의 향기를 꽃피워 왔던 것이다.
첫 번째로 찾아 간 제주시 외도동에 위치한 수정사지는 사지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곳이어서 초입부터 제주불교의 쓰라린 추억을 실감케 하였다. 5천여 평 사지 대부분이 훼손되어 일부는 공원으로, 일부는 교회부지로 뒤바뀌어 조선초 노비 130여명이 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는 명색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나마 제주시가 1998년 외도동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시행하면서 수정사 유적지의 역사성을 감안하여 시굴과 발굴조사를 한 후, 표석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여 더 이상 사지 훼손을 막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토신문 강 차장을 따라 길 건너 ‘성지교회’ 구내로 들어 선 순간, 세월에 매몰된 폐사지를 찾아 햇빛을 쪼이고, 불자들의 눈길을 붙잡으려 전국을 달려온 당찬 신심은 참으로 기막힌 광경 앞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교회 마당 어귀에 화단석으로 드러누운 ‘석주’와 ‘석등’ 부재의 막막한 표정은 후손들의 게으름에 대한 질책이다 못해 섬뜩한 전율로 휘감겨 왔던 것이다. 공원 주변의 나이 먹은 몇 그루 소나무를 베지 않았고, ‘원당사’ 사명이 걸린 옹색한 새 가람이 옛 터를 파고들지 않았다면 수정사지의 참배는 망망대해에 뛰어든 것 만큼이나 황당했을 것이다.
삼양동 원당오름 동남쪽 중턱에 위치하는 원당사지는 고려의 몽고 식민지에 대한 사연을 짙게 떠올리게 하는 절터이다. 원당사는 고려말 원나라 왕실에 공녀로 끌려갔던 기씨가 아들을 낳기 위한 기도처로 창건했다고 한다. 기씨는 황제의 총애를 입고 제2 황후가 되자 왕자를 낳기 위해 고심하던 중, 북두칠성이 비치는 동쪽 바다의 삼첩칠봉(三疊七峰)을 찾아가 기도하면 소원을 이룬다는 풍수사의 말을 믿고 이 곳을 기도처로 정했다고 한다. 원당사지에는 제주도 유형문화재 1호이자 유일한 고려시대 불교문화재인 원당사지5층석탑(보물 1187호)이 남아있다. 원당사지5층석탑은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3.85m의 높이에 측면 너비가 84㎝로 1층 기단과 탑신이 심하게 좁아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제주시는 현재 원당사지 석탑 일대 1만여 평의 대상 면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까지 3억7천여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5층 석탑을 중심으로 한 원당사지 정비작업을 실시하였다. 원당사지는 조선 효종 때까지 존재하다가 훼철된 것을 1914년, 제주불교의 중흥조라 불리는 안봉려관 스님이 중창하여 불탑사로 개칭하였으며, 최근 사명을 다시 이은 새로운 원당사가 길 건너 쪽에 들어서 삼양봉 기슭을 불법의 성지로 단장하고 있다.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우회도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부터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전국최대의 구품연지와 극락전, 선원, 문루 등 13개 동의 당우가 복원되었다. 명실상부한 제주도내 최고의 가람으로 역사교육의 산실이자, 도민의 정신적 귀의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법화사지는 한때 사노(寺奴)가 280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으나,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1530년경에는 완전히 폐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1920년대 후반 겨우 포교소로 사명을 되살렸으나, 이 역시 1948년 4·3사건 당시 소개령으로 다시 불타고 말았다.
제주도민과 영욕의 부침을 거듭한 법화사지는 ‘고려왕실’의 원찰이라는 설과, 원(元)에 의한 중창설 등 학계의 이견이 분분하나, 근래에는 청해진(莞島)을 개설했던 해상왕 장보고대사가 해상경영의 본찰로 삼았다는 이른바 ‘법화삼사’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제주도가 장보고의 해상왕국 중심지인 완도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인근의 대포(大浦)라는 지명이 ‘당포(唐浦)’라는 옛 명칭에서 비롯되었다는 구전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높다. 그렇다면 법화사지 바로 이 곳은 1천5백여 전 ‘바다의 신’ 장보고가 해상왕의 웅지를 품었던 것처럼 현정권이 꿈꾸는 ‘동북아중심국가’의 출발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역사는 윤회한다. 한 때 도랑물로 페허 속에 잠겼던 법화사지 구품연지의 물길도 새로운 세기를 맞아 파도가 되어 먼 바다로 굽이친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그동안 ‘잊혀진 가람탐험’을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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