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공양(燒指供養)을 올리면 육체로 인해 생기는 번뇌를 끊을 수 있고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반 4명과 함께 연비 했습니다.”
대구 부인사 성타스님(74)은 출가한지 11년째 되던 해 오른손 검지와 중지 두마디에 향유를 바르고 소지(燒指)를 했다. 스님은 평생을 수행에만 몰두하겠다는 의지로 손가락을 사르고 지금까지 부처님 법만을 보고 듣고 살아왔다.
타 들어가는 손가락을 보며 스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님은 소신공양을 할 때 마음이 어떠했느냐는 물음에 묵묵히 미소만 지을 뿐이다. 선종 3대조인 승찬 스님이 스승인 혜가 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왼팔을 절단했듯이 성타 스님의 미소에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육체에 끄달리지 않고 꼭 이생에서 성불을 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1948년 16세의 나이로 법주사 수정암에서 출가한 스님은 향곡 스님으로부터, 중국 당나라 임제 스님이 제자 황벽 스님에게 불법이 무어냐며 몽둥이로 가르침을 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받고 문경 김용사, 대승사 윤필암, 태백산 각화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수행에 매진했다.
성타 스님이 수행하던 시절은 6·25, 불교정화운동 등 불교계 안팎으로 변화가 많던 격동의 시대. 당시는 먹을 것이 없는 어려운 시절이라 매일 탁발을 해 끼니를 이었으며 선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안거동안 자신이 먹을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등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깨달음을 향한 마음만은 정말 대단했다고 술회한다. 스님은 태백산 각화사 인근 암자에서의 토굴생활을 들려주었다.
“매일 화두를 들었는데 그때는 정말 허리를 땅에 대지 않아도 피곤하지가 않았어. 가끔 밖에 나가려고 고무신에 발을 넣어보면 따뜻한 거야. 그러면 다시 선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어. 환희심이 절로 났지. 신이 나서 미친 듯이 화두 참구를 한 것 같아.”
토굴 정진을 하던 눈 내린 어느 날 아침, 자연 풍광을 바라보다가 불쑥 오도송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성타 스님은 큰스님에게 점검 받지 않아 오도송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하신다. 오히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하신다. 평생을 수행해도 부족한 것이 부처님 법을 믿고 배우는 일이라고 덧붙이신다. 그러면서 기억을 더듬어 오도송을 조용히 읊으셨다.
지난밤 검은 구름 달빛을 세우더니
안개에 쌓인 나무 가지마다 눈꽃일세
토굴방 혼자 앉아 의구심 바로 보니
고요한 이내 마음 산천을 감싸더라
한때 대부분 소임을 살지 않고 오로지 화두 참구만 전념한 성타 스님. 청장년 시절 비구니 선방이 부족했던 것이 못내 아쉬워 후배 수좌들에게 적절한 수행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최근 부인사 경내에 비구니 선원을 짓고 있다. 어느덧 세수 70이 넘은원로가 되었지만 깨달음을 향한 구도 의지는 그 옛날 손가락을 사를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김두식 기자 doobi@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