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여여하게 몽땅 그놈이 하는 건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붙을 수 있나요
오래간만에 여러분과 한자리에 같이 앉아 봤습니다. 그러나 이 고깃덩어리가 같이 해야 한자리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우리가 마음이 있다면 가장 가까운 것이고 마음이 없다면 가장 먼 것입니다. 가깝게 있어도 먼 것이죠. 여러분은 이런 도리를 우리가 인간으로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구요.
불법이라 하면 이 법당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가정에서 행하시는 데에, 바로 살아나가는 생활이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생활하면서 좀더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깨닫고 이러는 것이 그대로, 실험을 통해서 인간이 좀더 지혜가 늘어가고 알게 되고, 또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여러분과 같이 이 우주와 더불어 쉴 사이 없이 물 흐르듯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런 것이 이렇고 저런 것이 저렇다고 마음을 묶어놓고 꼼짝 못하고 애를 쓰는 그런 문제들이 있죠.
그래서 어저께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해드리기 전에 여러분이 질문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질문하실 분은 없습니까? 이 뉴욕이라는 데는 더군다나 더 정신계발을 하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죠. 부처님 법을 어찌 계발이라고 하느냐 이러겠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은 계발이라고 하는 게 제일 쉽게 느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질문자1: 어저께 스님 법문을 들었을 때,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사람도 그 사람이고 일어나는 힘도 그 안에 있다고 그러셨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몸에 어떤 병이 일어나면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병이 일어나고, 또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낫지 못하는 거라고 그러셨는데 다시 한 번 좀 구체적으로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
스님: 그것을 대답하기 이전에, 거기에 어저께 말하던 것을 되풀이하면서 다시 구체적으로 들어갑시다, 그럼. 여러분이 바다처럼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면 담아도 손색이 없지만, 작은 그릇이라면 그것은 담기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차원에 따라서 여러분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쓸 때에, 이런 물을 뜰 때는 컵을 쓰고 또 이런 걸 담을 때는 병을 쓰듯이 환경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쓰는 것이죠. 그것이 살림살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와서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이 이것을 근본적으로 잘 아시리라고 믿고 말씀드리겠어요. 우리가 지수화풍 네 가지가 바탕으로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지수화풍이 바탕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 지수화풍 속에, 몸속에 또 지수화풍이 들어 있으면서 별처럼 그 의식이 찰나찰나 나투면서 소임을 맡아가지고 움직이고 있죠. 그것이 모두가 한데 합쳐서 지수화풍이라고 부르죠? 이 지수화풍 자원이 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그 연관 때문에 광력과 전력과 자력과 통신력을 충만하게 쓸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있게끔 근거지를 만든 거죠.
우리는 지금 내부로나 외부로나 다 쓸 수 있고, 천체 물리학이나 과학이나 천문학이나 전부 할 수 있게끔 만든 그 자원이 무엇인가? 바로 그겁니다. 지수화풍으로부터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인간에게도 주어져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들이고 내면서 마음대로 기도 조절할 수가 있고, 기도 넣을 수가 있고 어떠한 약제에 에너지도 반분해서 넣을 수 있고, 즉 말하자면 A형에 A형을 빼다가 그 보조를 해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일체 만물만생 그 모두가 약이 아니 되는 게 없어요. 모두가 약이죠.
그렇기 때문에, 재료가 있기 때문에, 그 재료를 쓰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수레바퀴라고도 하지만 불바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이름해서 오신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요걸 차근차근히 알아듣기 쉽게, 내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쉽게 말한다고 쉽게 듣지 마시고 진심으로 들으세요. 그러면 생활에 지침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오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즉 말하자면 숙명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상하는 겁니다. 그건 시쳇말로 컴퓨터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컴퓨터에 시스템이 되어져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그렇게 주어져 있다 이겁니다. 컴퓨터에 다섯 가지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돼 있다 이거죠. 그건 뭐냐? 컴퓨터는, 즉 말하자면 숙명통이라고 한다면 과거에 살던 것이 입력이 된 것입니다. 컴퓨터에 입력이 다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입력이 돼 있는데, 입력이 된 것이 현실에 자꾸자꾸 나옵니다. 지금 저지른 게 아니죠. 그러나 지금 알고 저지르는 건 알고 나오게 돼 있고, 모르고 저지른 건 모르게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그건 그렇게 나온다고 보고, 또 거기 대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인과에 선업 악업을 다 지니고 나온 것은 바로 인과에 의해서 몸뚱이에 다 있는 것입니다, 의식 자체가. 내 한마음은 바로 지배인이 되구요. 그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자꾸 나오는 거니까 그 입력된 데서 나오는 거를, 외부에서 들어오든 내부에서 일어나든 모든 것은 거기에 입력된 대로 나오는 거니깐 팔자 운명이라고 그러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 ‘팔자 운명도 없고, 병 붙을 것도 없고 모든 것은 거기서 나오는 거다.’ 하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다시 입력을 할 때 먼저 입력이 됐던 팔자 운명은, 즉 인과로서 입력이 됐던 것은 다 없어지는 겁니다. 녹아버리는 거죠.
이렇게 쉽게 말씀을 해드려도 모르고 이해가 안 가신다면 할 수 없겠죠. 그래서 그것을 다 놓는 동시에 놓으면 놓는 대로 모든 앞서 과거의 것이, 내가 나오기 이전에 살던 것이 다 무너질 때 현실에 자꾸 넣으면 없어지고 자꾸 넣으면 없어지고 이렇게 그릇이 빈다 이겁니다. 그릇이 비게 되면 나를 밝게 볼 수가 있는 거죠. 나를 밝게 볼 수가 있는 동시에 뭐가 거기서 나타나느냐 하면 바로 천안통, 보는 것. 천이통, 듣는 거. 타심통, 남의 속을 아는 거. 신족통,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 이것을 팩스나 탐지기나, 망원경이나 무전통신기 이런 걸로 용어를 붙여도 됩니다. 그러면 그 다섯 가지가 다 거기 시스템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놔야 과거의 인과를 다 무너뜨릴 수 있고 그 습을 다 놔야만이 밝게 보인다 이겁니다. 밝게 보이면 뭐가 대두가 되느냐 하면 심안으로 볼 수 있는, 즉 말하자면 천체망원경으로 밝게 보인다 이겁니다. 그런데 밝게 보일 때, 저 다른 혹성을 내다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저 십리 밖을 내다볼 수 있다. 내가 이만하면 됐지.” 하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건 도(道)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손가락 하나가 있다고 해서 내 손이 정상적으로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가 있다고 해서 전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건 병신이에요. 보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팩시라고 해도 됩니다.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족통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것도 거기에 붙어서 대두돼 있죠. 요 두 가지를 다 한다고 해서, 손가락 두 개만 있다고 그래서 “아이구! 나는 이만하면 됐어.” 이러지 마세요.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릇을 비워서 밝게 나를 발견한 뒤에 체험하는 실험도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보지 않고는 실험을 할 수 없고 듣지 않고는 실험을 할 수 없고, 남의 속을 알지 못하면 실험할 수 없고 그런 것입니다. 가고 오고 함이 없이 가고 올 수 있어야만이 다니면서 실험을 하죠.
그래서 어떤 거든 하나를 쓰기 위해서 다섯 가지가 다 필요한 겁니다. 기계 하나를 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부속품이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 부속품 하나가 이루어졌다고 그래서 기계가 다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겁니다. 두 가지를 다 한다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천체 무전통신기를, 천이통을 했다고 그래서 다가 아니고, 그러니 가고 옴이 없이, 간다고 하는 것도 그건 어떠한 재료죠. 이걸 재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에 남을 볼 수 있는 거, 들을 수 있는 거, 또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거, 또는 모든 소리를 듣고 행하고 이래야만이 실험하면서 체험하고 체험하면서 당당해지는 그런 자기의 중심이 선다 이거죠.
그래서 요 다섯 가지, 아까 얘기했듯이 과거에 모든, 제일 시급한 게 컴퓨터에 앞서의 입력된 것이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거를 거기다 다시 놓으면 거기서밖에는 없앨 수 없고, 거기서밖에는 이끌어 갈 수 없고, 거기서밖에는 나를 증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父) 속에 자(子)가 들어 있고 자 속에 부가 들어 있다는 것, 이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주인공밖에 없다 이거죠. 거기에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다 놓고 그렇게 가는 이걸 자동컴퓨터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컴퓨터, 팩스 또는 통신기, 탐지기 또는 망원경, 이 다섯 가지가 바로 어디에 속해 있느냐! 마음, 그 지배인에 속해 있다. 이것이 누진에 속해 있다. 누진은, 즉 말하자면 레이다망 중심에 있는 내고 들이고 소식을 안으로 전하고 바깥으로 전하고 중심을 지키면서 항상 돌아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시로 찰나찰나 들이고 내는 것을 연락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걸 다 소유하고 있는. 그래서 자동적으로 여러분이 그걸 가지고 있다는 얘기죠.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물질적인 자석이 아주 훌륭하죠. 독일이나 이런 데서도 그렇고, 지금 일본에서도 그렇고, 뭐 딴 나라에서도 그렇고, 많이 그 공사를 따내려고 애를 쓰는 나라도 있고 말입니다. 공중에 자석으로다 그냥 쏜살같이 다니게끔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인간의 자력은 광대무변하고 무량수와 같습니다.
자력만 쓸모가 있는 게 아니라 광력도 쓸모가 있는 거죠. 그런 것도 그 재료를 속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광력이나 자력이나 전력, 통신력이 모두 두루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몸뚱이가 오븐과 같고, 그 오븐에다 재료를 넣고 용탕을 만들어서 요리를 해서 모두, 때에 따라서는 이거 먹고 싶으면 이것 해 먹고 저거 먹고 싶으면 저거 해 먹고 하듯이 자유자재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서 참나를 발견하느냐 이겁니다. 참나는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님을 발견하는 데에 있는 겁니다. 내 님을 발견치 못하면 임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나를 자와 부가 둘이 아니게 계합이 돼야만이 바로 부처님의 속도 역대 조사님들의 속도 전부 한자리, 찰나찰나 생각만 해도 찰나에 들었다가 찰나에 나시고 찰나에 들었다가 찰나에 나시고 하는 그 나툼, 그것이 바로 자유자재한다 이겁니다. 유구무구하게 말입니다.
불법이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분들이 여기 많이 있겠죠. 아니, 살기 위해서요. 살기 위해서 먹는지 먹기 위해서 사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이 몸은 백번 만번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죽지 않습니다. 도야지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내 이름을 팔고 내 성을 팔고 내 뼉다귀를 팔아서 그렇게 할 수는 없겠죠. 가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한마음 한뜻으로서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가 내 자리 아님이 없고, 강당에 앉았으나 법당에 앉았으나 내가 변소에 앉았으나, 거기 내가 앉았기 때문에 참나는 거기 있으며 부처님도 거기 계신 겁니다.
그런데 이 자리 저 자리 따지고 이 몸 저 몸 따지고 이 상표 저 상표 따지고, 불교가 어디 국한 돼 있는 줄 알고 야단법석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불교든, 풀 한 포기든 모두가 불교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불(佛)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요 교(敎)는 좋은 말씀이니 어떤 사람이 그거 안 지닌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모두 사람들이 자기 마음으로서 그 자기 소견으로서 매놓고서는, 자기가 옴쭉도 못하는 것이 소견이죠. 중생은 소견을 좋아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좋아하지만, 보살은 거기에 물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요. 이것은 역대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고 보살, 조사들이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살아보니깐 그렇기도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버리지 않는데 중생은 그 죽는다 사는 데에 고만 어지럽게 끄달리죠. 그러니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죽는다 하면 바로 이 시간에 사는 날이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보살은 산다 죽는다를 떠나죠.
부처님이 49년을 설했지만,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생겼지만 부처님의 뜻은 백지와 글과, 그 모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 자체가 그것을 잘 순응하고 따르면서 자기가 자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용도는 달라진다 할지라도, 또는 용어가 달라진다 할지라도 그 뜻은 항상 그때나 이때나 똑같은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시대가 변천하면 계율도 바꿔도 좋으니라.” 하구서 말씀하셨겠죠. 그 말씀을 안 해 놓으셨다면 쳇바퀴 돌아가듯 걸려서 돌아가는 중세계(中世界)가 바로 우리 진리라고 볼 수가 없겠죠. 그러나 그 말씀은 해놓으셨기 때문에 항상 자기는 한 말이 하나도 없고, 또 하나도 없는 반면에 절대적으로 해 놓으셨다고 봅니다. 그것은 빈틈없다고 보죠. 진리가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런 거를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삼국지 여러분 잘 보셨죠. 그 왜 바람을 순응케 해서 동남풍을 불게 한 누구죠? 제갈 공명이요.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외부의 광력이나, 저런 말 하다가 말고 이 말을 합니다. 레이저 광선을 쬐어서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뇌도 그렇고 자궁도 그렇고 위도 그렇고 간도 그렇고 모든 게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이 도리를 안다면 자작 이 친구들이 광력을 끌어서 광선으로써 그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그런 재료를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죠.
절에 가서 꼬박꼬박 절이나 하고 꼬박꼬박 앉았을 때에, 즉 말하자면 내가 앉을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고 좀 조용하게 앉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야만이 앉아서 좌선을 하고, 좌선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냥 앉아서 할 때도 편안하게 앉아서 할 수 있고, 일어나도 일어난다는 생각 없이 편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좌선을 한다고 하고 앉았으면 일어난다는 그런 생각이 앞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앉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눕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변소에 가서 앉아 있더라도 조용해서 생각이 나든지, 생각이 많이 나더라도 망상이라고 끊어버리려고 생각 마시고, 그저 ‘주인공이 생각나게 했으니까 알아서 해!’ 하고 맡기세요. 다른 생각 없이 할 수도 있고 망상이 나오게 할 수도 있고, 망상이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거기예요. 넘어지는 놈도 거기니까 말입니다.
그 마음을 참 지혜로써 써야죠. 소견으로 좁게 쓰면은 항시 종종 걸음을 걷게 되고 빨리 서둘러서 내가 깨우치고 싶고 이러거든요. 빨리 서둘러서 깨우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안 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생활 속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하는 게 그대로 몽땅 그 놈이 하는 거니까. 그런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붙을 이치가 있어야죠, 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사시면서 나쁘다 좋다 하기 이전에, 나쁘다는 생각이 들면 나쁘지 않게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주인공, 너 아니냐는 거죠. 또 좋게 했으면 감사하다고 뜻으로 생각하는 이 두 가지가 필요하겠죠. 어떠한 일이 과거로부터 인과로부터 닥친다 하더라도 ‘음, 과거에 입력이 된 거고 입력이 된 것도 네가 한 거니까, 입력을 없애는 것도 네가 하는 거다.’ 하고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 주인공!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을 해주는 것도 너밖엔 없다.’ 하고 거기다, 생활 속에서 용도에 따라서 괴로움이 있다 할지라도 ‘괴로움을 준 놈도 너니까 안 주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놓았을 때, 상대에서 모두 나를 나쁘게 모략을 하고 들어올 때도 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나를 한번 돌아다보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 사람의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 둘이 아니니 당신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할 때에 그 상대방의 마음이 스스로서 녹아져버리고 내 마음과 같이 착해지고 의리가 있게 되고 서로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싹트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언제나 평등한 마음으로서 웃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대하고 아무리 마구니라 할지라도 마구니라는 생각을 말고 모자란다는 생각을 마세요. 모든 것은 내 모자랄 때 내 모습이요, 내가 나쁜 일을 할때 내 모습이요, 지금만 내가 사는 게 아닌 까닭이죠. 그러므로 모든 잘못, 가정에서도 자식이나 형제나 잘못됨이 있으면 모든 건 내 탓으로 돌리고 부드럽게 말을 해주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 주인공에서밖에는 해결 못한다는 그런 믿음을 진실하게 가질 수 있어야 형제하고도 자식하고도 똑바로 나갈 수 있고 공부도 머리가 트여서 잘 될 수 있고, 또는 뿌리를 썩지 않게 돋우어 주니 가장구가 썩지 않을 것이고, 열매가 크게 열려서 만가지 맛을 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르익어서 말입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33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