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비니림신의 법문
람비니림신(嵐毘尼林神)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룸비니 숲을 맡고 있는 신이다. 선재동자는 다시 이 룸비니 숲 동산에 있는 ‘묘한 덕이 원만한 신(妙德神)’을 찾아가는 것이다. 숲에 이르러 보니 그 신은 한량없는 천신들에게 둘러 싸여서 그들에게 ‘보살의 태어나는 광대한 법을 설하는 경(菩薩受生海經)’을 설하고 있었다.
선재동자가 보살행을 닦아 여래의 가문(家門)에 태어나서 세상의 큰 광명이 되는 법을 묻자, 그 신은 보살의 ‘열 가지여래의 경지에 들어가 태어나는 장(藏)’을 설하는 것이다. 그 신은 “보살이 이 법을 성취하면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서 잠깐잠깐에 보살의 선근을 증장하되 고달프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싫지도 않고 물러가지도 않으며, 끊어짐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모든 미혹을 여의어 겁약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온갖 지혜에 나아가 법계의 문에 들어가며, 광대한 마음을 내고 모든 바라밀다를 증장하여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며, 세상길을 버리고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 훌륭한 신통을 얻으며 부처님의 법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온갖 지혜의 진실한 이치를 따르게 된다.”고 하면서 ‘열 가지의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 태어나는 장’을 설한다.
그 열 가지는 ① 모든 부처님께 항상 공양하기를 원하여 태어나는 장, ② 보리심을 내어 태어나는 장, ③ 여러 법문을 관찰하고 부지런히 행을 닦아 태어나는 장, ④ 깊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 세상을 두루 비추어 내어나는 장, ⑤ 평등한 광명으로 태어나는 장, ⑥ 여래의 가문에 나게 되는 태어나는 장, ⑦ 부처님 힘의 광명으로 태어나는 장, ⑧ 넓은 지혜의 문을 관찰하여 태어나는 장, ⑨ 장엄을 널리 나투어 태어나는 장, ⑩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 태어나는 장이다. 이 열 가지는 모든 보살이 이것을 행함으로써 불가(佛家)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문에서는 다시 이 열 가지 장에 대해서 하나 하나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은 모든 부처님을 공경 공양하여 깊은 믿음을 내고 모든 공덕을 끊임없이 닦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온갖 지혜(一切智)를 얻고 선근을 모으는 출발점이 된다. ②는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구호하려 하거나, 바른 법을 널리 구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 등이다. ③은 여러 법문을 관찰하여 끊임없이 온갖 지혜를 구하려 하고, 모든 보살의 공덕을 닦아서 이루려 하며, 보현행을 닦아 모든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등이다. ④는 마음이 밝고 깨끗하고 서원하는 힘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모든 장애의 산을 깨뜨리고 중생들의 의지할 곳이 되려 하는 것이다. ⑤는 깨끗한 지혜로 모든 법을 밝게 비추어,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⑥은 부처님들을 따라서 머물며, 삼세의 부처님들의 청정한 큰 서원을 갖추는 것이다. ⑦은 모든 법계의 진실한 이치를 밝게 터득하여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⑧은 참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경지는 항상 맑고 순수한 천진난만한 동자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두루 널리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이다. ⑨는 보살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를 여러가지로 장엄하며 모든 중생과 부처님들의 몸을 두루 널리 변화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⑩은 모든 경계의 차례를 잘 알아 중생에 수순해서 도를 이루는 공덕과 여러가지 장엄을 나타내고, 방편으로 중생들을 조복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하고 있는 열 가지 법은 보살이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는 법을 설하는 것으로서, 보살로서 부처님의 덕행을 갖추는 법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묘한 덕이 원만한 신’은 이 열 가지 법을 설하고 나서, 이 법을 닦아 익혀서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면, 모든 중생을 영원토록 인도하고 깨우칠 수 있고, 모든 세계에서 성불함을 나타내되 사이가 끊이지 아니하며, 온갖 법으로 도량을 장엄하고 중생의 욕망과 이해하는 차별을 따라 성불함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는 것은 신비스러움 속에 가려져 있는 이상야릇한 경계가 아니다. 그 경계는 진정한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참 생명의 세계이다. 참 생명의 드러남인 참된 인격이 작용하는 곳에는 이미 보살의 경계와 부처의 경계의 구분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출현품>에서도 “보살행이 여래성이요, 여래성이 보살행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華嚴)’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행의 꽃으로써 부처님과 그 세계를 장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화엄의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보살의 경계와 부처의 경계가 ‘하나’가 되는 경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묘한 덕이 원만한 신’의 법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 법문을 통해서 인간의 진정한 생명활동의 목표와 방법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된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