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 밖에서 法 구하는 건 모래로 밥을 짓는 일
대화하면서도 놓치지 않으려면
문
항상 끊어지지 않게 근본을 지켜보면서 놓치지 않고 나오는 모든 것을 굴려 놓으려고 정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일어나는 어떤 잡념이나 생각들은 굴려 놓는다고 하지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대화에 빠져서 놓치기 십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여일하게 근본을 놓치지 않고 관할 수 있는지요.
답
처음 공부할 때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주인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그것이 바로 증거예요. 자기 주인공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송장이라면 말도 못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식을 할 필요 없이 대화는 그대로 해도 그 대화하는 거는 체가 없습니다. 상대가 방구를 한번 뿡 뀌었을 뿐이고 내가 방구를 한번 뿡 뀌었을 뿐입니다. 방구는 양쪽에서 다 뀌었는데 쥘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한 사이가 없지마는 아주 철저하게 대화를 한 겁니다. 하긴 했는데 한 사이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주인공이 있고 저쪽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말을 하긴 했는데 한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바로 증거란 말입니다, 자기가 있다는 증거요, 주인공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살아나가는 것도 자기가 있기 때문이지 자기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 주인이 자기를 형성시켜 놓고 앞장세워 놓고선, 자기는 그 앞장세워 놓은 물질로 인해서 다니는 겁니다. 내가 주인으로 차를 사 놓고 거기 들어앉아서 차를 앞장세우고 다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납득이 갈 겁니다.
하루 24시간 자기 주인공 생각을 안 하고 일에 몰두를 했어도, 시간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건데, 그런데 일을 다 끝마치고 생각이 문득 났다 이겁니다. 문득 생각이 난 고 시간에 바로 24시간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순간 생각난 그 자체가 바로 24시간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그냥 찰나다 이겁니다.
뭐든지 좁게 생각하지 마시고 생각을 넓혀야 합니다. 색으로만 본다면 24시간은 24시간대로 있고, 또 내가 일에 몰두한 고 시간이 그냥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틀 사흘을 일에 몰두를 하느라고 주인공 생각을 안 했다 할지라도 고것은 한 번 생각났을 때 벌써 사흘이고 이틀이고 하루고 몰두했던 그 자체가 한 찰나에 한데 합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붙잡는 생각을 내려놓고 걱정을 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거기서 했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제부터는 편안해질 겁니다. 왜? 누구와 얘길 한다든지 무슨 일을 했다든지 간에 그 모든 게 그 자리로 인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걸 거기서 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다면 급한 일이 생기거나 우환 가환이 생기거나 아프거나 그럴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도 쪼개서 생각을 할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얼마 동안 놓쳤다 안 놓쳤다 할 것 없이 24시간을 일 초로만 생각하시면 돼요. 일 초도 24시간이 되고 24시간이 일 초도 될 수 있으니까 자기 마음으로 그것을 시간적으로 정해 놓고 끄달리지 말라 이겁니다. 왜 그거를 정해 놓습니까? 오히려 자기가 긁어서 부스럼을 내 놓고선 피를 내며 사느냐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편하게 사십시오. 일체를 거기서 한다는 것만 믿으면 언제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으면요.
정성만 들이면 되는지요?
문
저는 병원에 가도 낫지 않고 약을 먹어도 안 낫고 그래서 절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스님께서는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정성을 지극하게 들이라고 하십니다. 스님 말씀처럼 정성만 지극하게 들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나는 것인지 궁금하여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답
이거 보십시오. 정성을 들이라고 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처음에 오신 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합니까. 당장 급해서 오신 분들이 어떻게 할 거를 스스로 알면 거기도 안 가셨겠죠? 그러니까 자신들이 모르니까 그 스님께서도 정성을 지극히 하면서 자주 다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 알게 될 것이고, 첫째 자기 주인공, 참 자기 마음의 근본이 있으니 거기에다 모든 걸, 병이든지 생활하는 거든지 다 거기다가 맡겨 놓고 살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뒤가 무슨 상관 있습니까. 뒤가 생각되는 것도 놓으시라는 얘깁니다. 그 생각이 나오는 거기다 다시 맡겨 놓으란 말입니다.
산천초목은 푸르고 조화를 이루고 물은 유수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닷물은 똥물이 들어가든지 구정물이 들어가든지 아랑곳없이 그냥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만 믿고 살 수 있다면 어찌 가정에 비바람이 치며 썩은 냄새가 나겠습니까.
마음의 정성을 들인다 할지라도 앞뒤를 생각하고 거기 내가 했다는 것이 붙어 돌아간다면 공심의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정성이라도 공덕이 되어야 하니까 자기 마음의 근본을 믿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첫째 마음이 편안해져야 가정도 화목하고 내 몸도 건강해질 수 있으니까요.
쉬운 방편으로 공부해도 되나요
문
스님께서는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 초도 일 년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 초를 일 년만큼의 간절함이나 진실함의 무게를 가지고 놓을 때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가볍게 그저 놓는다고 그것이 일 년이 된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그 일 년 못지않은 무게와 힘과 아주 간절함이 있을 때 그러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스님을 뵈면 스님께서 갖고 계신 그 간절함이나 지극함, 이런 것들이 저희들은 안되거든요. 그래서 중생일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순간에 깨닫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저처럼 근기가 낮은 사람이 처음부터 차원이 높은 공부를 단번에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쉽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방편을 찾아서 해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공부해 나가도 되는지요.
답
그렇게 생각으로 자꾸 신경을 쓰고 그렇게 하면 병이 나요. 나는 여러분이 병나는 거 싫어요. 다 내 몸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우리가 물레방아 돌듯이 얼마나 돌았으며, 물이 흐르듯이 얼마나 울었던가 하는 걸 생각하면 난 아예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그저 순수하게 그냥그냥, 애쓰지 말고 믿고 놓고 감사하고, 이렇게 그냥 하세요. 신경 쓰고 그러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우니까 말입니다.
이게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처음에는 쪼금 더딘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방편으로 좌선을 하고 무엇을 하고 이러는 것이 처음에는 쉬운 것 같지만, 뭐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고 이러니까. 근데 그게 20년이 가도 고만이고 30년이 가도 고만이고,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만날 짓지를 못하고 그것만 들고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에는 아주 소로길인데 나중엔 점점점 들어갈수록 길이 넓어집니다.
방편을 써서 수행하는 것은 처음에는 넓은 길 같은데 갈수록 좁아지다가 나중엔 막다른 골목이 생긴단 말이에요. 화두를 잡는다 또는 좌선을 한다 이러는 것이 길은 처음에는 넓은데 나중엔 점점 좁아지면서 막다른 골목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처음에 넓은 길은 나중에 점점 더 좁혀지고 처음에 좁은 길은 나중에는 점점 넓어진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가 공했으니까요. 자기를 주인공이라고 해라 하는데 그걸 왜 못 믿습니까? 그게 화두인데요. 자기 생긴 게 화두인데 뭘 화두를 또 잡습니까, 글쎄. 그러니 겉껍데기에다 겉껍데길 또 붙잡으니 그림자를 또 붙잡고 헤매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직통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세요. 생긴 대로 자기가 화두인데 아니 왜 걱정을 합니까, 글쎄. 애당초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머니 배 밖에 나올 때에 바로 방편으로 가지고 나왔는걸요. 내가 공했으니깐 공에서 나오는 거, 나한테서 모두 나오는 거 아닙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나한테서 나오는 거 나한테다 되놔라 그러는데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합니까? 나한테서 나오고 들어가고 그러는 거니까, 내가 공했으니까 주인공을 믿어라, 그럼으로써 잠재의식의 근본이 홀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바깥에서는 참이 나올 수가 없다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도 꿈이자 생시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방편으로 나왔으니까 이것도 꿈이자 생시고 꿈도 생시이자 꿈입니다. 생시에 있었던 모든, 내가 살아나오던 얽히고설킨 상대성 원리가 바로 꿈에도 나타나고 그러는데 꿈에 다른 모습으로 해 가지고 다짜고짜 모르는 인연이 돼서 나와도 바로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자기의 인연줄이니까 모든 거를 자기로 봐라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로만 본다면 ‘아, 그것도 나지.’ 그러면 통과예요. ‘그것도 나지.’ 그러면 통과입니다. 마구니가 들어와서 칼로 찔러 죽이려고 꿈에 그랬어도 ‘너도 난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없어지는 겁니다. 다 그렇게 없어져서 쫓기지를 않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나로만 봐야지, 하다못해 동물들이 보이더라도 그것도 바로 나입니다. 인간은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온 걸로만 따진다 해도 하여튼 그런 모습을 다 거쳐서 나왔으니까 그거는 어느 때 연분에 자기가 그 모습을 해 가지고 있었던 그 모습으로 자기한테 보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잠재해서 차곡차곡 쌓여서 있던 것이 자꾸자꾸 풀어지는 거니까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놓게 되면 바로 필름 지워지듯이 그렇게 지워지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둘로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꾸 상대성으로서 그게 엉켜져서 인과응보로서 또 닥쳐온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그저 그 자리에다가,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는 그 자리에다 놔야지 다른 자리에다 놓으려고 앨 쓰면 그것이 놔지지 않습니다. 누가 가난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마음 쓰는 거를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되는 걸 대신 갖다 없애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해 놓은 거 내가 다 없애는 겁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런 게 있어요. 장님은 지팡이를 짚어야 길을 갈 수가 있듯이 고것이 한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처음에 정히 지팡이가 없어 허전하면 스승을 붙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눈 뜬 사람을 붙들고 가다가 눈이 떠지면 그때는 ‘어,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기에 지팡이도 없는 걸 가지고 그랬구나. 알고 보니 내가 그냥 지팡이구나.’ 이렇게 될 때까지는 붙들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 알아지니까 그냥 ‘아, 스님이 스님이 아니요, 내가 내가 아닙니다.’ 이런 거를 알게 되는 거죠. 어느 사람이든지 다 그럭하라는 건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정히 어디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어느 정도 나가다 보면 그게 바로 자기라는 걸 알고 그것 또한 내려놓게 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에 바로 나의 마음도 거기 같이 돌아가니까, 그렇게 자기가 알아질 때는 우주 전체가 바로 주인공 한 떡으로다가 화하는 겁니다. 떡 하나 얻어먹으려면 그만큼 모든 거를 한데 종합해서 뭉쳐야 된다 이거예요. 하나로 뭉쳐야지 둘로 된다면 안 돼요. 참선이라는 건 둘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로 뭉쳐서 그 하나마저도 쪼개고 쪼개서, 그 하나도 고정되게 있지 않으니깐 ‘무(無)’다 한 거거든요. 그것이 바로 유전자란 얘깁니다. 그래서 하나로 뭉쳐 놨을 때 고것이 유전자고 고 하나도 세울 게 없다 할 때 무전자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 아니 닿는 데가 없다 하는 겁니다.
수많은 계율을 어떻게 지키나요?
문
오늘날 우리 한국 불교의 실정을 보면 대승 불교권임에도 불구하고 비구 스님들의 250계라든가 비구니 스님들의 348개 계율이 있습니다만, 그걸 다 살펴보면 과연 계율을 다 지키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계율을 받고 오신 스님한테 가서 제가 여쭤 봤습니다. “스님, 250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계율을 지키고 안 지키고를 떠나서 외워나 보십시오.” 그랬더니 20계도 못 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우지도 못할 계를 준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250계뿐이 아닙니다. 250계라는 그 뜻은 250계가 아니라 전체 계율이에요. 전체가 계율 아닌 게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롭게 하는 그런 마음이 하루에 한 번이라든가 두 번 든다, 또 무엇을 보는데도, 보는 눈도 잘못 보고서 잘못 생각하면 그것도 계율에 어긋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율은 한군데서 나는 걸 알면 전체 계율을 지키는 거고, 한군데서 나고 드는 걸 모른다면 전체 계율이 어긋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250계라고 그러는 거라고요. 이건 두루 얘깁니다.
어떠한 목적에서 요건 요렇게 하지 말아라, 저렇게 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부처님의 계율은 이럭하지 말라가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많이 하다 보면 나빠지고 나쁜 거라도 자기 용도에 따라서, 자기 분수에 따라서, 상대방에 따라서, 예를 들어 술을 먹는 데도 삼합을 딱 볼 때 ‘아, 내가 이걸 요만큼이라도 먹어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해서 먹어 주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안 먹는 게 계율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먹어야 할 때는 먹어서 계율을 지키고, 안 먹어야 할 때는 안 먹어서 계율을 지키는 거예요. 안 해야 될 일은 안 해서 계율을 지키는 거고, 해야 될 일은 함으로써 계율이 지켜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이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는 그 반면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뜻을 그대로 받을 수 있고, 그대로 행할 수 있고, 그대로 두루 진리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계율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내 의견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길을 걸어도 소가 가든지 개가 가든지 사람이 가든지, 보이지 않는 데 모습을 해 가지고 웅크리고 앉았든지 또 스치고 가든지, 이런 모든 걸 겸해서 그것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데에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체득하고 싶은데…
문
주인공을 관해 보지만 ‘스님께서 이런 걸 말씀하신 거구나.’ 하는 체험을 해 보지 못해 아직도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뭔가 빨리 체득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체적으로 힘든 극한 상황에 놓는다든가 하는 고행을 하면서 주인공을 관하는 것이 그냥 앉아서 관하는 것보다 더 느끼는 바가 크지 않을까요.
답
우리가 수 해를 두고 이렇게 수행해 오고, 이날까지 봐 왔고 이날까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기복으로만 많은 세월을 보내 왔습니다. 그것이 아주 배어서 인제는 바깥에서 빌고 또 바깥에서 구하고 그러는 일들이 아주 습으로 남아 있어서 녹이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가도, 만약에 바깥에서 구하고 마음 바깥에서 부처를 구하고, 만약에 성품이라 하면, 성격이라고 해도 됩니다, 성품에 의해서 역시 팔자 운명이나 인과응보에 끄달리는 이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품 바깥에서 법을 구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마음 바깥에서 부처를 찾아도 안 되거니와 법을 구해도 안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항상 누구나가 이 몸으로써 내가 고행을 해서 법을 구하겠다고, 또 옛 성현들이 마음을 깨달아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좇고 그 분들을 좇아 구하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들을 가져서는 절대, 그것은 바깥에서 구하는 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국은 내 몸으로써 하루 종일 앉아서 눕지도 않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머리를 짜내서 대경(大經)을 쓴다고 해도 아니 되고, 또는 내 몸을 잘라서 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분주히, 발이 부르터서 디딜 수가 없이 만들어서 고행을 하면서 정말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고 이리 잘라지고 저리 잘라지고 이리 찢어지고 저리 찢어지고, 그렇게 겁을 거쳐서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자기의 참맛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어른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렇게 찾는 자는, 바깥에서 그렇게 법을 구하는 자들은, 또 몸을 패대길 치면서 그렇게 고행을 해서 구한다고 생각을 하는 자들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법을 구한다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런 소립니다. 모래로 밥을 지어서 밥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걸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체가 항상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을 갖되, 어느 절이든 가 보면 말과 뜻과 행을, 세 가지를 종합해 봐서 견해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을 진실히 믿고 따르면서, 자기 마음 안에서 부처를 구하고 자기 성품 안에서 법을 구하는 그런 이치가 틀림없는 사실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는 하되 기복으로 믿는 마음을 가지고는 견해가 밝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에 기복으로 믿는 마음을 가지고 진실히 믿는다 해도 그것은 십중팔구 마구니로 빠지기가 쉽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견해가 밝아야 밝게 보고 옳게 행을 하면서 믿음을 진실하게 마음 안으로 굴려서 자기를 자기가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네들은 앉는다 선다 생각 없이 자기 몸을, 공한 자기 몸을, 즉 말하자면 화두를 삼아서 일상생활에 일분일초도 끊어지지 않게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넓으나 점점 가면서 좁아들고 막다른 골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좁되 점점 가면서 넓어지면서 이 천지만물이 다 화창하게 빛을 보는 것입니다. 나와 더불어 말입니다. 그렇게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부가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것은 내 마음 안에, 심원 안에, 온 누리에,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모든 법이 찰나찰나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 법이 한마음 심원에 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갖가지로 이름을 붙여서 따지지 않아도 무슨 경에는 무슨 말씀, 무슨 경에는 무슨 말씀 하지 않아도 말씀 그 자체나, 또 그 뜻 자체나, 그 하나하나의 이름이나 그 심원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각자 눈 따로 코 따로 귀 따로, 눈은 뭘 보고 뭘 보고 뭘 보고 이렇게 봐야 하고 이렇게 따지자고 본다면, 눈으로 보는 것 따지고 또 귀로 듣는 것 따지고 이러다 보면, 내 몸 전체의 모든 것을 일일이 따지게 되면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 전체를 가지고 우리가 내고 들이는 것이,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 법이 다 내 안에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 법이 있고, 법 안에 바로 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적든 많든 이 뜻을 정렬하게 생각해서, 마음 밖에서 내 부처를 찾아서도 아니 됩니다. 그리고 내 생각하는 성품 안에서 법을 구해야 된다는 것도 명심하고 그렇게 실천을 해 보다 보면 빨리 체득하고 싶다는 그 생각마저도 저절로 놓고 오히려 간절한 마음으로 관하게 될 겁니다.
부처님의 사리에 대해서
문
스님들이 열반을 하시게 되면 다비식을 하는데요, 그 안에서 사리가 나오는데 고승은 많이 나오고 도가 적은 사람은 사리가 안 나오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리가 서 말 서 되나 나왔다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근데 궁금한 것은 사람이 죽으면 한 줌의 재로 변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사리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답
석존께서 열반하셨을 때 서 말 서 되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는데 몸뚱이도 응신이기 때문입니다. 몸뚱이도 응신이거든요. 하나 버릴 게 없는 응신이고 화신이고 법신이고 부처고 이러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그냥 고대로, 사그러진 그대로 사리다 이겁니다. 털끝 하나 사리 아닌 게 없어요. 아니, 그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부 사리죠. 그 몸뚱이 털끝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사리다 이겁니다. 그 뜻은 이 세상의 모두가 자기 아님이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죽은 것도 없고, 즉 말하자면 사리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서 말 서 되라는 말도 그냥 서 말 서 되라고 한 그 액면 고대로 있는 게 아니고 전체를 말한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 몸뚱이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의 삼천 하면 삼이 들어가죠. 서 말이란 말입니다. 이 서 말을 한 말로 따진다면 ‘천’ 이렇게 ‘모은 한마음’ 하는 거나 똑같은 얘기죠. 천 지 이렇게 해도 ‘천’ 은, 천지가 전부, 이 우주 전체가 하나거든요. 하나로 돌아가거든요. 그게 하나로 돌아가는 게 ‘지’ 해 놓으면 그냥 또 한데 합쳐져 버려요. 아래 위로 합치는 것이 천지요, 또 돌아서 천은 그냥 한데 합쳐서 둥글게 돌아가는 게 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천지가 전부 사리 아닌 게 없으니 부처님 아닌 게 없고, 부처님 아닌 게 없으니 부처님 도량 아닌 게 없고, 부처님 도량 아닌 게 없으니 전부 모두 사람이 전부 부처 아닌 게 없느니라 이겁니다. 그 가운데에 마음을 한 찰나 이렇게 백지장 하나 사이 넘어서면, 저 언덕을 넘어서면 부처고 법신이고 화신이지마는, 그것도 또 말을 하자면 가만히 있으면 부로 하나가 되고, 부처가 되고 생각을 냈다 하면 그냥 법신으로 그냥 이렇게 화해 버려요, 하나로.
그러니 그렇게 되니까 전부 부처님 말씀 아닌 게 없고 버릴 게 없고 천칠백 공안이 아닌 게 없고, 돌 하나도 화두 아닌 게 없고 또 공안 아닌 게 없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도량 아닌 게 없는 반면에 부처님 그 자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보니까 ‘야, 그렇구나! 뱀이나 개구리나 소나 이런 거를 건지려면 부처님의 그 마음이 거기 들지 않고는 그 무명을 벗길 수가 없구나.’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과 합일해서 하나로 뭉쳐서 놓고 돌리고서는, 그러니까 벌써 용탕을 해 먹은 거죠. 부처님은 그렇게 용탕을 수시로 해 잡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 놓고는 무명만 딱 그냥 벗긴 겁니다. 무명이 바뀌어지는 거예요. 금방 사람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몸뚱이는 그냥 무명이 벗겨진 거죠. 뱀의, 즉 말하자면 습이 많이 남았었는데 부처님의 마음이 확 열어 주니까 거기다 넣고는 체인지가 돼 버리니까 그냥, 그게 그냥 좋은 음식과 같이 나쁜 음식이 좋은 음식으로 화해 버렸죠. 체가 없는 거니깐 화해질 수 있다 이거죠. 체가 있는 거라면 그냥 뭐 잘못된 거를 잘되게 어떻게 그 물건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무궁무진하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