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종식·장좌불와 실천
하루는 혜암 스님께서 아침 공양을 하고난 뒤 대중 모두를 염화실로 모이도록 했다. 마침 동안거를 해제한 뒤라서 사형 사제들이 많이 있었다. 대중들이 많으면 많은 만큼 하는 일도 많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 공양할 때에는 대중들이 꽉 차는데 마당 청소나 울력할 때에는 기척도 없으니 스님께서 상좌들의 나태함을 깨우쳐 주고, 매사를 대중공사라는 절집안의 전통적인 절차를 통해서 집행하기 위해 모이라고 한 것이다.
원당암에 혜암 스님께서 주석하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스님이 지리산 도솔암에서 해인사로 오시지 않으니까 당시 해인총림 방장이신 성철 스님께서 혜암 스님에게 선방 소임을 맡기면서 원당암을 배려하셨다. 그때도 스님은 상좌들과 의논끝에 원당암을 맡으셨는데, 상좌들이 원당암을 잘 가꾸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니 스님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대중공사에서 스님은 한마디로 단언하셨다. 공연히 절집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죄만 키우지 말고 아예 원당암을 관리 잘 할 스님에게 맡기자는 말씀이었다.
그때의 원당암은 마당 여기저기에 돌이 솟아 있었으며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암자 운영을 했다. 그러니 스님 눈에는 날이면 날마다 일해야 할 것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 눈에는 무심하게 지나칠 일이지만 스님에게는 하루종일 일거리였다.
스님께서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호미로 도량의 풀은 모조리 뽑으셨다. 어른 스님께서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어떻게 상좌들이 안거 해제했다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게으름을 피우면 원당암은 사중에 넘기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공부만 열심히 하자고 하시니, 어느 상좌도 토를 달 수 없도록 모범을 보이셨다. 원당암에 오면 일을 하든지 아니면 오지 말든지 해야 했다.
하지만 스님을 모시고 살아보니 당신께서도 일정한 기준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시봉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구체적인 지적까지 하면서 꾸중하고 엄격하게 가르치시는데 시봉기간이 끝나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원당암은 지금도 재가 불자들의 선수행처로 유명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혜암 스님께서 직접 죽비를 들고 경책을 해주며 수행을 이끌어주셨기 때문이다. 매달 첫번째와 세번째 토요일은 신도들에게 개방해서 스님께서 직접 참선을 지도하고 법문을 해 주셨다. 첫번째와 세번째 토요일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날은 대부분 쉬기 때문에 그렇게 날짜를 정했다고 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철야정진을 하시면서 죽비로 경책까지 해주니 신도들의 신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아직 스님생활이 몸에 배지않은 나는 밤새도록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무릎도 아프고 골반도 벌어지지 않은 상태라서 말 그대로 죽을 지경이었다. 최소한 졸지는 말아야지 하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어지면서 고개는 나도 모르게 저절로 떨어지는게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혜암 스님은 하루에 한번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하면서도 눕지 않는 장좌불와를 평생동안 하셨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존경스러웠다.
처음 오는 신도들에게는 화두를 주시는데 만원씩을 직접 받고 화두를 내려주신다. 스님들이 내게까지 와서, 큰스님이 화두를 돈받고 파신다고 뒷 이야기들을 했다. 그런데 큰스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화두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공부를 안하니까 방편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선을 어떻게든 생활화 시키려는 큰스님의 뜻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일주일 동안 상좌들과 단식을 하며 용맹정진을 할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젊은 수좌가 몰래 떡을 먹다가 탈이 났다. 스님은 단식으로 탈이 났으면 단식으로 고쳐야 된다며 함께 공부하는 대중에게 다시 일주일간 단식 용맹정진할 것을 권했다. 몰래 떡을 먹었던 수좌가 회복할 때까지 당신도 함께 단식 정진하고 나서는 조용히 타일렀다.
그 수좌는 단식약속을 어긴 것을 스님에게 꾸중들을까 싶어서 장에 출혈이 있는데도 말을 못했는데, 스님이 그것을 아시고 대중들이 함께 해야만 그 수좌도 무사히 회복되고 용맹정진도 마칠 수가 있다고 판단하신 것이었다.
■ 구례 수미정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