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렬/조선대 철학과 교수
내 나이 열 살도 채 안 된무렵, 그 때 나는 <명심보감(明心寶鑑)> 흥얼거리기를 좋아 했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만 “자왈 위선자는 천보지이복하고 위불선자는 천보지이화니라(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공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고 했다)”는 구절을 외고 또 외웠다. 아니 차라리 떠들고 다녔다고 해야겠다. 뜻은 그만두고 그저 공부를 빙자한 욕설이라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런 암기식 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펄쩍 뛰겠지만 그때는 무턱대고 외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도 그런 공부 덕분에 지금도 가끔 원문을 외울 수 있어 좋다. 아마도 반복학습을 통한 훈습(薰習)이 아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한참 나이가 들어서 안 일이지만 <명심보감>은 원래 20편으로 되어 있다. 후에 증보(增補),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등이 더해져 현재는 25편으로 되었다. 그 바람에 같은 이름을 가진 편(篇)이 하나 더 늘었다. 본래부터 분량이 많아 상하로 나누었던 성심편(省心篇)에 추가된 효행편이 그것이다. 추가된 것임을 표시하면서 성심편의 그것과도 구별하기 위해 일부러 <효행편(續)>이라고 한 것도 묘미가 있다. ‘마음을 밝혀주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책 이름 그대로 우리의 일상에서 보배 거울이 될 성현들의 격언(格言)이 주를 이룬다. “천명(天命)에 순응하는 사람은 살아남고, 천명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라고 한 것처럼 처음의 계선편(繼善篇)에서부터 마지막 권학편(勸學篇)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섭리를 본받아 인간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일들이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 얼마전께는 광주에서 한 비정한 아버지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여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여관에 투숙했던 아버지가 아들만 남겨 둔 채 혼자 사라졌다는 것이다. 차가운 한강 물에 어린 남매를 던져 수장시킨 아버지가 우리를 경악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부천에서는 초등학생 두 명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포천에서는 귀가하던 여중생이 실종되기도 하였다.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생활고나 경제 불안 등의 이유로 보육원이나 아동복지시설에 위탁 보호되고 있는 아이들의 수도 2002년에 이미 2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후안무치한 국회의원들은 당연히 죗가를 치러야겠지만 나라의 희망인 우리의 아이들이 왜 무참하게 희생당해야 하는가. 어린 넋을 차마 보낼 수 없어 구슬피 우는 부모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을 했다는 기인지우(杞人之憂)의 고사성어를 말이다. 지금 우리는 그 기우(杞憂)가 아닌 천륜(天倫)이 무너지는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삼국유사>를 읽어 본 사람은, 아니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들어서 알고 있을 법한, 손순(遜順)의 얘기도 말이다. <명심보감> 효행편(續)에 다시 등장하여 우리에게 훈습된 얘기가 아니던가. 아이가 버려지기는 그 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런데도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부모 봉양이 아니라, 단지 경제가 힘들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이다. 그것도 카드 빚이다 뭐다 해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뿐이다. 내 어렸을 때처럼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을 귀가 닳도록 듣고, 눈이 시리도록 보게 하는 몸에 배게 하는 훈습 교육은 언제 이루어질까.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희망으로 자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