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으로만 공부할 생각 말고 마음으로 관하며 들어가야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이라 함은 봄이 오는 소식을 갖다 주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향기로운 꽃내음이 다가오는 소식이며,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당부하는 것은 일체 모든 걸 주인공에 맡겨 놓고 살라는 겁니다. 어떠한 거든지 ‘해 주세요’가 아니라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용도에 따라서 모든 걸 맡겨 놓고 일을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의학 한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몸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로, 색신이 망가져 주어진 일을 못하게 되니 가정 또한 행복이 깨지고 하는 등등의 경우가 많이 생긴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일체를 다가오는 대로 주인공에 맡겨 놓아야 걸림 없이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산에서 내려올 때 여러분한테 이익을 줄 수 있고 거짓되지 않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고 실험을 해보고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았기 때문에 내려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려오지 않았을 겁니다. 난 다짐을 했었거든요. 그러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돌아다본다면 너무도 처참하리만치 고생스러웠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풀 한 포기조차도 해치지 않고 여러분을 살릴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우리들은 지수화풍으로 뭉쳐져 있고 또 그 지수화풍을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한테 수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 등이 충만하게 나올 수 있는 도리이므로 오신통이라는 재료를 용도에 따라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갖추어 가지고 있다고 하고, 또 청정하다고 하고, 여여하다고 하고, 들이고 냄도 역시 그렇습니다. 육근 육경을 십이처라 하고, 육근 육경 육식을 십팔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한데 합쳐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전기가 가설이 되어 있듯이, 우리 몸에도 정맥·동맥이 돌아가면서 세포가 가설이 되어 있고, 우주 또한 그렇게 가설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법계라고 합니다. 인간들에겐 세밀하게 세포가 그렇게 가설되어 있고 지구에도 그렇게 가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와 인간계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계합이 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모두 가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질서가 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질서가 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는 반면에 우리들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게 없습니다. 일체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우리가 느끼질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설이 돼 있는 건 뭐냐? 여러분이 A형이라면 B형을 넣어서는 안되죠. 그렇게 되면 기가 없어지는데 사람에게 병이 났을 때는 기를 돋우어 주고 병명을 파악해서 그 증세에 맞도록 치료를 해야 하듯이, A형의 환자에게는 A형 피를 수혈해야 하듯이 우리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이런 가설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잘 들으십시오. 가설이 다 되어 있으니 주인공에 다 맡겨 놔라,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한다 할 때는 자동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컴퓨터 사용하듯 누르면 되는 겁니다. 법계 자체가 마음먹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먹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여기를 중(中)세계라고 합니다. 그 반면 영령들은 냄새를 맡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으로 사는 세계도 있습니다. 그건 어떤 세계냐 하면, 이 공부를 한 사람들이 자재력을 가지고 자유롭게 찰나 생활을 하는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사는 세계, 그 세계에 산다면 죽어서도 눈 밝고 귀 밝아서 마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게 그냥, 그냥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산다는 그 이름 자체마저도 벗어나야만이 참마음으로 사는 찰나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전 세포에 대해 말했듯이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일체 만생이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첨단 과학이니 뭐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죽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도 죽이지 않고 양면을 다 살릴 수 있는 도리입니다.
알고 보면 산과 들에 있는 무정물·식물·동물이 전부 약 아닌 게 없습니다. 일체가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 겁니다. 용도에 따라서 사람의 몸에 피를 수혈하는 것처럼 동물·식물의 액을 섭취하면 좋은 약이 되는 겁니다. 이렇듯 일체 모두가 가설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풀포기 하나도 같이 살지 않는 게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주인공에 맡겨 놓으면, 병의 원인을 알고 치료법 또한 알고 있어 안 보이는 데 전력이 오고 가듯이 스스로 와서 약이 되는 겁니다. 내가 급할 때는 어떠한 식물·동물들을 약으로 쓸 수 있는 자동적인 보배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보배는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보배는 능력이 무한하며 체가 없는 반면에 찰나찰나 돌아가니 그것을 일러 주인공이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겁니다. 다만 여러분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부처요 모르면 중생입니다. 부처·중생이 둘이 아니게 항상 함께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중생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와서 공부하는 것은 공부라고 할 것도 없고 공부 아니라고 할 것도 없는 묘한 도리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간다면, 영원토록 윤회에 끄달리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과도 벗어나지 못한 채 독 안에 들어도 면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으로 끝 간 데 없이 가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행을 하는 대로 유전을 통해서 자손 대대로 연결이 되는 겁니다. 또 조상들에게는 그 은혜를 갚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위로는 육신을 주신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인과로 만난 선업 악업들을 다 제도하여 보살로 화하게 하고, 또 자기 자식들한테도 뿌리를 돋우어 줄기와 잎사귀가 싱싱하게 해서 대대손손 번창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한한 일입니까? 하나로 인해서 엄청난 문제가 벌어지고, 하나로 인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한생각으로 벌어지고 한생각으로 없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러나 벌어지고 없어지는 것에도 걸리지 말고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내가 그대로 행하고 가는 그 자체의 뜻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유자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자기를 한 번쯤 관찰하면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주인공이 여기까지 자기를 형성시켜 왔으니까, 자기가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도 원만하게 해결되게끔 거기다 모든 걸 맡겨 놓고 관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죽고 사는 데에 걸림이 없어야 하지만, 가정으로나 사회로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것 또한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을 그냥 놔두고 가는 것, 그것도 바로 우리가 건져주지 못하는 것이 되니까, 나 하나로 인해서 모두 희생된다면 이 또한 안 되는 일이죠. 그러니 언제나 자기 책임을 다하여 이젠 가도 괜찮다 할 때 갈 수 있게끔, 그런 것을 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겨보지 않는다면 그건 무효입니다. 부처님의 법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내가 하는 이 말을 관해보고 실험해 보십시오. 실험해보지 않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이 공부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로만 듣고 이론이나 지식으로만 배워서는 안 됩니다. 한생각 내어 맡겨 놓고 지켜보면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이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이 세상에는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 또한 여러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도리를 실험해보고 배웠겠습니까?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나무 한 그루도 내가 보지 않았다면, 어찌 이 도리를 알았으리까. 그러니 바로 내 스승이자 벗이요 도반인 것입니다. 나는 부처가 되려고 이날까지 있어왔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 뜻을 바로 알아서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아무리 속상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 다가와도 너그럽고 자애롭게 생각하면서 안으로 한번 굴려서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며, 한 걸음을 떼어 놓아도 백 걸음 뛴 것보다 무게 있게 그 가치가 월등할 겁니다.
여러분이 부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경전을 아무리 달달달 외우고 백팔배 삼천배를 하고 정근을 오래 한다 해도 일심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관하여서 직접 체험하고 또 실험해 보아야 때에 따라서는 관세음보살이 되기도 하고 지장보살이 되기도 하고 약사보살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보살들이 곧 여러분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세음이니 지장이니 약사니 하는 명호도 다만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 많은 이름의 보살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낱 이름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아니 그 마음에서도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자재력을 가지고 찰나 생활을 할 수 있어야만 되는 거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항상 고통을 받고 끝 간 데 없이 유전 등 그 모든 것에 괴로워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리라고 봅니다.
인연에 따라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서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는 데 응용하신다면 그대로 자기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고 약사보살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신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늘 말하지만 여러분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고, 여러분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한 곳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무심코 여러분의 마음이 뜻으로 와 닿아서 감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때에 따라서 싱긋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뼈저린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와 여러분이 마음으로 가설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으로 가설이 되어 있는 그 자체를 아시려면 주저함이나 물러섬이 없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보면 가정의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정작 본인의 의견은 중요시 않고 부모들이 이 학교를 택할까 저 학교를 택할까 하고 망설임을 가지고 높고 낮은 데를 가리는데, 아이의 수준에 맞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선택해야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들 마음대로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고 좌지우지해서 그릇되게 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본인에게 달려있다 이겁니다. 남의 말만 듣고 일을 처리했다가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각자가 주인공에 맡겨 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알아서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예전에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무식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약을 쓰기만 하면 환자들의 병이 낫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약초로 병을 치료해도 병이 낫질 않습니다.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같은 혈액형의 사람끼리 수혈해 줄 수 있다고 했듯이 사람과 약초가 하나가 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대과학이나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이렇듯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어야 양면이 다 살 수 있고, 또 그런 연구들을 해야만 인과에도 걸리지 않는 겁니다.
이런 예도 있었습니다. 아마 몇 달이 지났으니 작년에 있었던 일인가 봅니다. 본인들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선원 어린이 법회에 나오던 아이가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이 부모들이 가방과 책을 여기에 갖다 놓고 아이를 돌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하는 겁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한편으로 당황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위로해준다는 말을 뭐라고 했느냐면, “그래, 그 아이가 당신들한테 다시 태어나면 되잖아.” 하고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딸아이가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뭐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한마디 한 것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말만이 아니라 그 말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겁니다. 말할 때는 쉬워도 그 뒤에 감당해야 하는 일은 참으로 회향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 뒤에 따르는 문제를 감당해야 하는 게 더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 일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어렵게 생각하겠지만, 물론 억만금을 들여서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계속 꾸준히 공부하시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화두를 참구하는 분들도 계시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이렇게 말을 하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이 화두이자 참선이기 때문에 누구에게서 화두를 받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체가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를 받아가지고 끊어질까 봐 애쓰다가, 일하느라고 미처 챙기지 못했으면 ‘아이구! 또 놓쳤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죠. 그렇게 하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참나’를 생각해 볼 여지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헛바퀴 돌듯 그냥 빈 맷돌만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러분, 길을 걷다가 문득 한 그루의 나무에 단풍이 들었다가 단풍잎이 무수히 땅에 떨어져 구를 때 밟으면 부스럭 하고 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 보는 마음, 혹은 큰 바위나 돌을 보며 묘하게도 생겼구나 하고 생각해 보는 마음, 누가 베어간다 해도 누가 깨뜨려간다 해도 아무런 말이 없고 그냥 잠자코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생각해 보는 의증, 그런 의증을 낸다면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도 의증을 내고 돌아가는데, 남에게서 받은 화두를 끊어질까 봐 붙들고 있으니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서 예전에 생각했던 것하고는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모든 면에서 변화했기 때문에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아는 것이 많아졌으므로 남에게서 받은 화두 가지고는 빠르게 변해 돌아가는 지금 세상에 대처해 나갈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발전되지 않아서 침체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도 단순하고 순수하여 ‘이 뭣고?’ 하고 의증을 내도 그냥 돌아갔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지금 세상은 첨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지구와 우주 전체의 진리에 순응하고 돌아가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이 끝없는 진리에 순응하셨습니다. 불바퀴가 돌아가는 소용돌이 속에도 거기 들어가고 나옴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엔 언어가 붙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차라리 내가 학문을 배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그렇지 않고 체험해보지 않았다면 단지 말만으로 여러분에게 얼마나 가치 없는 말을 했겠습니까. 내 양심은 내가 더 잘 알고 내 잘못 또한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넓고 지혜롭게 남을 위해서 행을 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함이기도 합니다.
지난번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 나더러 이런 말을 하더군요. “스님은 왜 누가 못산다고만 하면 돈을 주십니까? 지금 절에도 돈이 없습니다.” 그러길래 재무스님을 통해서 알아보니 정말 돈이 없긴 없더군요. 그러나 그럴 때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괴롭지 않으려고 그런다구요.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서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순간순간 생각이 났을 때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으리만치 남김 없이 다 주곤 합니다. 그래서 나더러 돈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편하려고 조금이라도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국수를 사 먹습니까, 떡을 사 먹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인연을 맺더라도 좋은 인연 맺어야 합니다. 인연에 따라서 모든 것이 벌어지는 것인데, 길을 지나가다가 말 한마디 나누어도 그것 또한 인연인 것입니다. 잘 아는 사람의 집에 가서 무엇을 부탁하게 되지 생면부지의 모르는 사람 집에 가서 부탁하지 않는 것처럼, 알기 때문에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인연이 되는데,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인연이냐 아니면 해롭게 하는 인연이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부잣집이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부잣집에서는 스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또 음식을 바리때에 가득 담아드렸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그 집 아들이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부잣집 아들이었던 수좌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두 팔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 수행하는 데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스승이 “얘야, 수행하는데 무척 괴롭겠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좌가 “예, 스님. 팔로 해야 할 일을 발로 하려니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스승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너의 본체를 바로 안다면 너의 과거 또한 현실에서 볼 수 있을 텐데, 사실 넌 과거생 어느 나라의 정승이었단다. 하루는 사냥을 하러 산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중, 어느 팔이 없는 수행자를 만났는데 길을 물어보니 팔이 없는 수행자는 다리를 들어서 길을 가리켜 주었단다. 그런데 그 정승은 감히 내게 발로 길을 가리킨다고 화가 나서 그나마 쓸 수도 없는 팔을 가져서 무엇하겠느냐고 하면서 남아있는 부분마저 칼로 잘라 버렸단다. 바로 네가 그 정승이니라. 너도 그만큼 어렵지? 네 두 팔이 그냥 잘라진 게 아니라, 그것이 인과응보니라. 네가 한 대로 받는 것이지.” 이와 같이 우연은 없습니다.
조금 전 얘기했듯이 내외가 자식을 돌려달라고 울었을 때 그들은 뒤 사정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만이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울며 애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꼭 어린애가 사탕 사달라고 우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의 언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일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난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는데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만 가졌지, 실은 심부름꾼 아니겠습니까? 그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감내하면서 훌륭하게 키워서 저희들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 애쓰는 심부름꾼 말입니다. 아마 저하고 같을 겁니다.
조금 전, 우리 인간은 일체 만물과 더불어 전부 가설이 되어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만 어떠한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용도에 따라 꺼내 쓰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그것을 모르고 다른 짓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몸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고 온통 야단인데 그로 인해 발생되는 다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여러분이 좀더 침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50%만 말을 하지, 50%는 말 못하는 이유를 잘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생활에서 그냥 그대로 체험하고 돌아갈 때 그대로가 보살이고 부처인 것입니다.
보살과 부처 또한 이름일 뿐입니다. 진정한 부처는 자유자재하는 그것이 부처입니다. 예전에도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만, 만약 여러분한테 이렇게 질문을 했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달마대사는 왜 수염이 없을꼬?” 달마대사는 수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반면에, 머리를 틀어 상투 끝에 동곳을 꽂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달마대사의 수염은 변해서 붉은 연꽃으로 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여러분의 박이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 보는 낚싯밥이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무의 세계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어떠한 말에도 걸리지 않겠지만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승이 하루는 제자에게 이르시길 “즉심즉불이니라.” 하셨는데, 그 소리를 들은 제자가 공부를 하러 떠나서 삼사년이 지나도록 영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의 소식이 궁금한 스승이 하루는 다른 제자를 시켜서 이번에는 “비심비불이라고 전해주고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해들은 제자가 “즉심즉불이나 비심비불이나 둘이 아니니 돌아가서 스승님께 그렇게 말씀드려라.”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스승께서는 무릎을 탁 치시면서 “익었구나, 익었어!” 하시며 기뻐했습니다. “중국에 수염이 붉다더니 이렇게 붉을 줄이야” 하고선 무릎을 탁 쳤다 하듯이 다 같은 얘기입니다.
수염은 붉은 연꽃으로 화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바른 길을 인도하고 향기로운 꽃내음을 주시고 만법을 증득하는 바른 길을 인도하시니, 머리를 틀어 동곳을 꽂았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천차만별로 된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를 한데 틀어서 꽂은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론으로만 공부하실 생각 말고 마음으로 관하며 들어간다면 앞으로 스스로 느끼고 알게 될 겁니다. 여기 부처님이 계신다 해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대신 먹어줄 수도 없고, 대신 잠자줄 수도 없고,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대신 화장실에 가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인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내지 않는 중생들은 제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든 모르든, 똑똑하든 모자라든 간에 일체를 맡겨 놓고 그대로 사십시오. 그대로 사세요가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못났으면 못난 대로 사는 겁니다. 돈을 벌려고 엉겁결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지 말고 거짓되지 않게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지고 나가면 올바른 뜻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는 반면 바른 행을 하게 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 점을 깊이 생각하셔서 앞으로 살아가는 길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위로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아래로는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옷을 벗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갈 때가 되면 그냥 갈 수 있게끔 말입니다. 내가 가도 될 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큰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자세하게 말한 ‘가설되어 있다’는 것과 ‘자동적으로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이 내 가슴이 덜 아프고 내 눈물이 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9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