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스님(1)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청년과 시골 할아버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스님이 해인사 원당암 염화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면서 세속에서는 잘 살았으나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 있고, 출가하여 마음을 잘 닦아서 정신적으로 안정과 평온함을 누리면서 임종을 맞이하는 삶이 있다고 하자. 이 두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보람된 인생이고 잘 살았던 삶이라고 생각하느냐?”
노스님이 청년에게 물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나서 청년은 노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변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출가했다. 그 양복을 입은 청년이 바로 나다. 나에게 수행자의 길을 걷도록 방향을 잡아주신 분이 바로 은사 스님인 혜암 스님(前 조계종 종정)이다. 혜암 스님은 “행자생활하는 목적은 오로지 스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니, 다른 것을 보고 듣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수계하는 복도 무량한 복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현재 남해 조그만 암자에서 묵묵히 수행 잘 하고 있는 지도 스님에게 나를 해인사 행자실에 넣으라고 하셨다. 은사 스님은 이후 자상함과 세심함으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여러 모로 큰 의지처가 돼 주셨다.
해인사 행자실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만큼 행자들 스스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어느 절에서 스님으로 몇 년 살아도 해인사 행자 생활 일년만 같지 못하다는 등 세뇌 교육도 수시로 있었다. 스님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혜암 스님 말씀을 늘 새기면서 살아야 버텨 낼 수 있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았다.
혜암 스님은 행자들의 신심 고취를 위해서 행자들이 특별 법문을 청하면 언제든지 즐겁게 법문을 해 주셨다. 태백산에서 공부하시면서 밤길에 호랑이를 만났을 때 수행자의 기상으로 호랑이를 물리쳤던 일, 오세암에서 겨울에 용맹정진할 때는 먹을 양식이 떨어져서 도토리와 솔잎 등의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가니 일주일 뒤 부터는 해우소에서 일을 보고 나면 검은 콩알 만한 염소똥이 나오더라는 등의 얘기를 하시는데, 특유의 순진한 미소에 덧붙여서 수행 이야기가 탄력을 받으면 서 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야기는 장황해도 스님의 지론은 한결같았다.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타납자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절에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수계하기 한달 전에는 은사 스님의 암자로 가서 시봉을 하면서 허드렛 일도 했다. 원당암은 마침 요사채를 시민선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늘어나는 신도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요즘말로 내부확장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지게질을 난생 처음 그때 해봤다. 다른 행자들은 여기저기 사숙 스님 될 분들 찾아 인사드린다고 버스를 타고 해인사를 벗어나는데, 나는 원당암에 온 날 부터 아침공양 끝나기가 무섭게 일을 시작해서 깜깜한 밤이 되어야만 끝났다.
그야말로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해인사를 벗어나는 행자들만 부러운게 아니라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만 눈에 띄어도 부럽기가 그지 없을 정도로 일이 고되었다.
그래도 스님께서는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면 당신께서 옛날 가야산 중봉에서 토굴을 지어 놓고 공부하시던 곳에 데려 가시기도 하면서, “내가 토굴에 살 때면 시장보러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만 시장을 다녔는데 깜깜한 길을 다니려면 처음에는 걷기도 힘들만큼 여간 불편한게 아니야. 그런데 같은 길을 자주 다니게 되니 깜깜한 밤에도 익숙해져 낮처럼 다니게 돼. 마음 공부라는 것도 이와 똑 같은 이치니라.” 이렇게 비유를 해 주시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하셨다.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깜깜한 어둠속에서 생사의 윤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길을 헤매고 있는것과 똑같다. 그러니 부지런히 마음공부하는 일 외에는 달리 중요한 것이 없다.” 하시면서 돌담만 남은 토굴을 가리키면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집 지을 때의 일화도 곁들이시곤 하시던 스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험한 산길을 가벼운 몸으로 젊은 사람보다 더 잘 걸으시고 앞장서시는 스님을 보면서 잠시도 쉴 줄 모르는 스님을 시봉하고 가르침을 받자니 원력이 턱없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앞일이 걱정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