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통스럽게 사는 건 자기 주인을 무시하기 때문
불을 밝혀야 하는 이유
문
선원에서는 매년 정월에 삼 일 동안 촛불재를 봉행합니다. 사시에는 조상님들을 위한 천도재를 하고 저녁에는 촛불을 밝힙니다. 그런데 자성이 본래 부처라면 왜 해년마다 촛불을 밝히는 의식을 하는 것인지 궁금하였습니다.
답
정초에 삼 일 동안 촛불재를 하는데, 그 촛불을 밝히는 이유는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본래 아는 것이라면 아마 전자에 선조들이 그렇게 방편으로 많은 설법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여러 말씀 안 하고도 될 수 있었다면 부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모든 것이 있는 겁니다. 염불도 있어야 했고 촛불재도 있어야 했고, 그 옛법을 다 갖추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법도 예전 법도 둘이 아니게 우리는 항상 그걸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뜻과 의미를 알고 해야 합니다. 모르고 남이 하니까 그냥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그 촛불을 들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마음이 밝아져 있지 않다면 촛불 자체를 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밝다고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내 마음을 밝힌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이요, 태양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입니다. 전체 근본 자체가 바로 마음의 근본이니까요. 우리가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도 마음의 근본이라! 그 근본 성품에 의해서 우리는 무수히 이렇게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작용을 하면서도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고 그 조그마한 마음의 촛불, 티끌만도 못한, 아니, 티끌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그 마음 자체가 천차만별로 작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묘합니까.
그래서 조그마한 촛불이지만, 언제나 생활을 하든지 만남이 있든지 사랑을 하든지 회사에 나가든지 모든 것을, 먹는 거나 자는 거나 깨는 거나 또 만나는 거나, 모든 것을 자기한테로 돌릴 때 그때에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한 보림을 하는 겁니다. 또 만나고 난 뒤에 보림을 잘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해야 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 촛불 하나가,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이 우주를, 아니 우주 전 세계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다 닿기만 하면 몽탕 몽탕 태워 버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촛불재를 하면서, 저녁에 예불을 모시고 촛불재를 하면 그 촛불 하나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는 거를 아주 실감나게 실천으로 옮기면서 내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나까지도 거기 더불어 같이 태우는 법이죠. 그렇게만 한다면 그 촛불 자체는 볼 수도 없고 쥘 수도 없고 바로 내가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역력하게 이렇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우리가 촛불재를 하더라도 그 촛불 하나가 우주 대천세계를 태울 수도 있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고정되게 착을 두지 않으면서 흘러나오는 모든 생각을 나온 그자리에 내려놓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또 공부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생각을 했어도 놓고 돌아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려고 걸음을 걸었다면 뒷발자취가 없듯이 말입니다. 앞으로는 아직 떼 놓지 않았으니까 발자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밝힌 그 한마음 촛불 하나에 지금 현실, 이 순간 바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깨우침에도 시간이 필요한지
문
내 마음의 근본을 발현해 내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요.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가 몇 년 되지 않아서 근본의 참소식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인지요. 어떻게 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루 빨리 근본을 발현해 낼 수 있을는지요. 갑갑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답
오히려 그것을 잘 생각해 봐요. 생각을 잘 돌리면 공부하는 데 아주 진전을 볼 수 있어요. 여직까지 점차적으로 왔기 때문에 빨리 할 수가 있다 이 소리예요. 일 년이든 이태든 이렇게 왔기 때문에 쉬울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 일 년이 한 달도 될 수 있고 한 달이 일 년이 될 수 있고, 삼 년이 석 달이 될 수 있고 석 달이 한 달이 될 수 있고, 한 달이 사흘이 될 수 있고 사흘이 하루가 될 수 있고 하루가 일 초가 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 동안 공부를 했다는 그런 착(着)을 가질 게 하나도 없는 거죠. 바로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백 년 할 거를, 남들이 삼 년 할 공부를 사흘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흐리벙벙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초서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보세요. 어디 나 이외의 딴 데서 척 뛰어 들어오는 게 아니에요, 성불한다는 게. 그러니까 항상 그 근본 주처에, 즉 불성 자리에서만이 모든 걸 들이고 내고 움죽거리게 하고 말하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고 한다는 거를 믿고 알면 고대로 실천을 해 보세요. 그러니까 그런 작용을 진짜로 믿어야 된다 이거예요. 간절하게 믿어야 된다, 간절하게 믿는 반면에 간절하게 관할 수 있으니 모든 것은 해결이 난다 이겁니다.
그런데 간절하게 믿고 들어가긴 들어가되 그것도 무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점차적으로 어저께 일한 거는 그냥 없어졌고 오늘 일한 것도 또 없어져요. 일을 한 사이가 어디 있어요? 만날 쳇바퀴 돌듯 하는데요. 우리 인생살이가 지금 쳇바퀴 돌듯 하는 거지, 어저께 한 거를 쥐고 있고 그러나요? 어저께 한 거는 그냥 간 곳이 없고 오늘 또 해야 돼요. 오늘 또 채워야 하고 또 오늘 찬 거는 간 곳이 없고 또 내일 또 채워야 돼요. 항상항상 가면서 놔 버리면서 가는 거예요.
어저께 한 말을 지금도 쥐고 있습니까? 쥐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놔 버렸지. 놔 버리는 사이 없이 그냥 놔 버려졌잖아요. 공으로 돌아갔잖아요. 연방 그렇게 하면서도 연방 일 초도 머무르지 않고 자꾸자꾸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지고 또 오고 없어지고 또 오고 또 없어집니다. 이러니까 물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사는 자체가 물 흐름과 같기에 물 리듬과 같다고 하는 거고 파도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들어서 그렇게 비유한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점차적으로 놔 버리고 가는데 뭘 놓으라는 소리를 또 군더더기처럼 붙이느냐 이 소리예요. 지금도 항상 놓고 가잖아요. 애들은 애들이었던 모습과 생각을 놓고 어른이 되고, 어른은 어른대로 그런 것을 놓고 늙어지고 이렇게 순간순간 놔 버리는 거예요. 우린 지금 그대로 놔 버리면서 가는 거예요. 무심(無心)으로 가는 거고 무행(無行)으로 가는 거고 무설(無說)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애타게 걸리지 말아요. 놔 버린다고 하면서 놔 버리지 못해서 걸리고 그러지 말라 이거예요. 그대로 우리가 지금 하는 게 놔 버리는 거니까요. 그 놔 버리는데다가 또 걸려 가지고 야단들이니까 그 놔 버리는 데도 걸리지 말라 이거예요. 안 놔 버리는 것도 없고 놔 버리는 것도 없다 이겁니다. 항상 놔 버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말을 했다 하더라도 무설이요, 아무리 움죽거렸다 하더라도 무행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렇게 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시간이 가야 깨닫지’ 하는 생각도 말라 이거예요. 시간이 어디 고정되어 있습니까?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 말이 거기 어구에 붙을 수도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애타게 그냥 넓혀서, 아주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또 가볍게도 생각하지 말고, 또 멀리도 생각하지 말고 가깝게도 생각하지 말고 즉 자기, 자기 심봉에 의해서 바퀴는 돌아간다는 거를 알아야 돼요. 그 심봉만을 잡아야 돼요. 그 심봉을 잡지 않으면 바퀴는 허탕 돌아가게 돼 있어요. 바퀴는 반드시 심봉을 끼고 돌아가야 돼요. 고것만 알면 됩니다. 이 세상 이치가 돌아가는 것이 바퀴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바퀴는 누가 가지고 있느냐. 심봉이 가지고 있다는 거죠. 심봉이 꿰어져 있지 않으면 절대로 바퀴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그 사실만 알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기 때문에 본래 바퀴에 심봉이 꿰어져 있다는 거를 근본적으로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그것만 알면 스스로서 우리가 놔 버릴 것도 없고 안 놔 버릴 것도 없고 그 말 자체가 거기 붙을 것도 없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면 바로 그게 깨우침입니다.
자기 주인공을 찾으려면…
문
저는 주인공이 자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 자기 주인공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요?
답
그럼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은 누구며, 또 그렇게 지금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구인가가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생활을 누가 합니까? 그런 생활을 천차만별로 하면서 돌아가는 그 사람이 하는 겁니다. 그걸 한데 모아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거죠, 한마음 주인공.
여러분 몸속에도 그렇게 수효가 많습니다. 의식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생명체가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것을 ‘한마음 주인공!’ 할 때 천지가 한데 합쳐지는 그런 이치죠. 그래서 주인공 하면은 하늘을 받칠 수 있는 기둥을 말합니다. 인간으로는 중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를 믿고 맡기면서 거기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을 때 모든 것은 한 구녘에서 나오고 한 구녘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아니, 보고 듣고 이러면서 바로 마음속으로 들이고 생각하고 그러죠? 그러고 생각하고 벌써 마음속에서 내고요. 이 생활을 누가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지금 살고 계시면서도 자기를 자기가 모른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 합니까, 글쎄?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 주처를 믿으셔야 합니다. 자기 주인공을 모르든 알든 이유를 불문에 붙이고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그 주인공만이 자기를 이끌어 줄 수 있으니까요. 남이 대신 죽어 줄 수도 없습니다. 남이 대신 먹어 줄 수도 없습니다. 대신 자 줄 수도 없습니다. 대신 아파 줄 수도 없습니다. 대신 똥 눠 줄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거라도 누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길에 그냥 갈 수는 없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자기를 자기가 리드해 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고 거기에 맡겨 놔 보고 실험을 해 보세요, 그게 체험이 안되나 되나. 해 보지도 않고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자기가 자기 몸뚱이를 무시하는 겁니다. 주인을 잘 섬겨야 그 주인이 바로 자기 몸을, 주인 몸을 잘 이끌어 나가죠. 안 그럴까요?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그렇게 알고 노력한다면 용도에 따라서 꺼내 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럽게 사시는 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차원을 높여서 정말 하나님이 되고 정말 성자가 되고 부처가 되고, 자기가 깨달으면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기가 무시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자기를 끌고 다닌 자기를 무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 주인을 말입니다.
종교간의 갈등에 대해서
문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종교간의 문제로 가정과 사회 국가적으로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심각해진 종교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요?
답
왜 갈등을 갖습니까? 나는 이럽니다. 생명도 둘이 아니죠. 사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다 둘이 아닌데 왜 둘입니까, 그게. 그리고 또 무의 세계 50%를 완전히 터득했을 때 그것은 모두가 내 형제예요.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이 집으로 가기도 하고 저 집으로 가기도 하는데 무슨 기독교가 꼭 박아 놨습니까, 네? 아, 이 나라에서 살다 저 나라에 가서도 태어나는데 무슨 꼭 박아 놨습니까.
모두 마음들이 무의 세계 50%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결혼을 하는데 어떡합니까?” 이럴 때 “야, 여자가 남편 따라서 갈 때는 남편을 따라야 하고 그러는데 몸뚱이로 하는 게 아니라 그 곳에 가도 네가 있으니까 네 주처가, 주님이 거기 있지 않느냐.” 이럽니다. 그 얼마나 좋습니까? 일루 가도 그 자리요 절루 가도 그 자린데 왜 걸립니까? 둘이 좋으면 하는 거지. 그리고 또 어디 기독교가 다르고 가톨릭교가 다릅니까? 생명은 똑같습니다.
아니, 저런 나무하고 인간하고도 주고받고 먹고 살고 있는데, 하다못해 사람들끼리 다르다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회사에, 즉 말하자면 회장하고 사장하고 직원하고 모두 하나가 없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기독교 따로 있고 불교 따로 있고 그럽니까?
예전에 어떤 분이 기독교인하고 가톨릭교인하고 결혼을 시키는데 장인이 목사거든요. 영 결혼을 안 시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럴 수가 없어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아이, 당신네들의 관습 때문에 말 그 자체가, 마음 자체가 창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쪽 창살 너머 저쪽 창살 너머를 만들어 놓은 거지, 사방이 다 터졌다 이거예요. 그래 지구 항아리 속에서 같이 살면서 요거는 마음으로 울타리를 해 놓고 내 울타리 안 네 울타리 바깥, 요럭하고 찾는다면 어떻게 목사님이 되셨습니까?” 내가 그랬죠. 그랬더니 장인하고 인제 사위하고 다 합의돼서 결혼시켰다구요. 그래 참 재미있는 일도 많았어요.
그런데 기독교가 뭐 다르고 가톨릭교가 뭐이 다르고 모두가 뭐이 다릅니까? 죽어가는 것도 똑같고 이 세상에 탄생하는 것도 똑같고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똑같고 인간의 마음을 천차만별로 굴리는 것도 똑같은데 뭐가 다릅니까? 그건 자기네들 마음 탓이죠. 그러니까 마음을 좀 곱게 쓰고 마음을 좀 넓게 쓰고 마음이 보배라는 걸 알라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 마음 좀 잘 넓혀서 진짜 사랑이란 두 글자가 한데 종이짝처럼 떨어지게 하지 마시고 진짜 실행과 실천을 하는 데 목적을 두셔야 합니다. 세 살을 먹어도 다섯 살을 먹어도 이론적으로는 빤히 나보다도 더 위대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칠십 살 먹고 팔십 살 먹어도 실천하는 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잘들 해 보세요.
깨달음과 신통력의 관계
문
마음을 깨치는 것과 신통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답
신통력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바로 여러분이 회사에 앉아서 집에 갔다 와 보세요. 갔다 오실 수 있죠? 어디에 뭐가 놓여져 있는지 볼 수 있죠? 그게 신통력입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해서 만약에 정말 물리가 탁 터진다면 우주도 전체 이렇게 보게 되는 겁니다. 한 면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보고 탐험할 수가 있고, 전체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고 전체 들을 수가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하는 거를 듣는 것만 듣는 게 아니라 듣지 않는 데서 다 할 수 있고, 뭐 그것뿐이 아니죠.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다 알 수도 있고 가고 올 수도 있고요. 요. 대문 바깥이나 저 몇 광년이 되는 다른 혹성에 가는 그 거리나 문지방 넘어서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 도리를 안다면 여러분이 신통력이라는 언어도 붙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대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대로 하는데 거기 신통력이라고 이유가 뭐 붙을 게 있습니까. 이유도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그런 차이를 궁금해하기 전에 바로 목마르면 그냥 물 마시는 도리이니까요.
공하다면 현세에 고생하는 이유는
문
스님께서는 업과 고가 붙을 자리가 없다고 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전생 업이라든지 이런 것 때문에 현세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러더군요. 아주 주근깨가 그냥 바짝 끼어 가지고 척추에 병이 나고 심장에도 병이 나고 병 안 난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하구요. 그런데 또 거기다가 어린애를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사람이 못 쓰게 됐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오다시피 했습니다. 그랬을 때 나는 너무 내 마음에서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모습도 내가 모를 때, 내가 고통 받을 때 바로 내 모습이지. 바로 나지.’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가 괴롭고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바로 그 사람이 나니까,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죠. “야, 너 무조건 네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기고 거기서밖에는 해결 못해 준다고 그렇게 믿고 물러서지 말아라.” 이렇게만 가르쳐 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돈도 없고 그러니까 무조건 거기다, 진짜 간절히 맡겼던 모양입니다, 아플 때마다 그렇게 하면서 간절하게 관했던 겁니다. 그러더니 아, 병이 차차 나아가면서 얼굴에 주근깨가 다 없어지면서 점점 그야말로 세련돼 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쩐 일로 그렇게 구두도 좋은 걸 신고 그랬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이 일이 영 안되더니, 취직을 못해서 뭐 6년인가 7년을 놀았대요. 그런데 우연히 길에서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회사를 한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거기 들어가서 그 회사 직원으로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두도 세련된 걸 신고, 얼굴도 좋아지고 병도 낫고 그러니까 아,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를 업고 오니까 시집에서 내쫓기지도 않구요.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을 살리는 법이고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를 무시하고 삽니다. 자기 주처를 무시한다고요. 그러곤 만날 저길 쳐다보고 고상을 걸어놓고 형상 부처님을 갖다가 놓고 그냥 만날 잘되게 해 달라는 거죠. 뭘 잘되게 해 줍니까? 네? 자기 마음에 달린 건데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있으니 나부터 알고 상대를 알아야죠. 안 그럴까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약사발을 받았죠? 너부터 알라고 그래 가지고 말입니다. 달마 대사도 양 무제가 “공덕이 얼마가 됩니까?” 하니까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 그랬죠. 그러니까 결국은 화가 나서 말입니다, 달마 대사한테 약사발을 안기게 되죠. 그런데 달마 대사에게 약사발을 안겨서 죽어 묻었다고 했지만, 사신을 보냈었는데 사신이 다녀오다가 보니까 달마 대사가 떠억 주장자에다가 짚세기 하나를 걸어 메고는 덜렁덜렁 오거든요. “아. 어디를 갔다 오나?” “나는 지금 심부름을 하고 옵니다.” 하고 달마 대사하고 얘기를 하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니까 “나, 서천국으로 가네.” 그러거든요.
그랬는데 그 사신이 양 무제한테 와서 “달마 대사 봤습니다.” 하니까 아, 달마 대사는 죽여서 벌써 묻었는데 달마 대사를 봤다니 그 희한한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깐 양 무제가 깜짝 놀라서 가서 산소를 파 보니까 짚세기 한 짝만 거기 들어 있고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그러니 그렇게 약사발을 안겨서 죽였는데도 달마 대사는 양 무제를 위해서 그 도리를 일러줬던 겁니다. 그 뒤에 바로 양 무제는 달마 대사한테 저지른 자기의 행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후회를 하면서 간절히 회개를 했답니다.
그러니 모두가 마음에 달렸습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써야 합니다. 나보다도 먼저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 속에 들어가서 상대의 상황에 맞게 생각을 해 보는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