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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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혜 스님 (上)
불광산 교육체계 세워

1992년 11월 8일, 대만의 주요 일간지와 영자지에 눈길을 끄는 사진 하나가 실렸다. 장삼을 걸친 단아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사법원장으로부터 상을 받고 이등휘(李登輝) 총통과 악수하는 장면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비구니 스님이 총통과 악수를 하고 매스컴의 찬탄을 받는지 의아해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제 2회 중화민국사회운동상 시상식장에서 사회개선에 앞장선 걸출한 인물로 선정되어 상을 받은 불광산 문교기금회집행장(文敎基金會執行長)인 자혜(慈惠) 스님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비구니 스님이 어떻게 이런 자리에 올랐으며 이러한 현상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앞다투어 보도했다.
중국은 송·명시대 이후 통치계급의 지지를 받은 성리학에 밀려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불교는 속세와 등지고 은둔해 염세적인 종교로 오해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대만 불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타락의 일면조차 보여 지식인들에게 미신으로 폄하되기도 했으며 스님의 자질 또한 높지 않아서 생활 유지의 차원에서 승려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자혜 스님의 수상 소식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과거 40여 년 동안 자혜 스님이 보여준 홍법이생(弘法利生)과 문화, 교육 방면에서의 활동을 돌아보면 이러한 수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혜 스님은 1934년 대만 이란(宜蘭)에서 태어나 65년 먀오리(妙栗) 법운사(法雲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속성은 장(張)씨로 상당히 개화된 집안에 태어나, 그 당시로서는 여자로서 입학이 쉽지 않았던 난양(蘭陽)여고를 졸업했다. 1953년 성운 대사가 이란에 주석할 당시 자혜 스님은 여고를 졸업하고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른바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엘리트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자혜 스님이 어떻게 불광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당시 성운 대사는 이란에서 염불회와 각종 청년회 활동을 이끌고 있었는데 자혜 스님도 거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 가끔씩 핑계를 대고 빠지기도 했지만, 점차 성운 대사의 인품과 박식함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운 대사를 따라 강연회에 참석하면서 그의 중국어를 대만 본토어로 통역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1965년, 정식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불교에 대해 회의를 갖고 접근했던 한 신여성이 비구니가 되기까지에는 10여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출가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불교의 큰 바다에 빠져들면서 스스로의 확신에 의해 귀의했음을 말해준다.
1967년 자혜 스님이 성운 대사를 따라 불광산의 터전이 된 까오슝 대수향(大樹鄕)에서 개척을 시작했을 때, 스님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모레를 나르고 돌을 옮기며 불광산 창건에 신심을 바쳤다. 그러한 혹독한 고행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불광산과 자혜 스님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성운 대사는 ‘인간불교’를 구상하면서 교육, 문화, 자선, 법회라는 네 개의 큰 기둥을 세웠다. 그 가운데서 자혜 스님은 교육과 문화의 두 가지 중책을 맡았다. 자혜 스님의 그릇을 알아본 성운 대사는 이러한 대임을 맡기기 위해 불광산 개산 초기의 어려운 시기에 이미 스님을 일본 오다니대학(大谷大學)에 보내 유학하게 했다. 그 결과 대만에서는 비구니로서 최초의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불학원의 강의를 맡으면서 불광산 자체의 교육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본격적인 승가교육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계속)
김재경 기자
200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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