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찰을 찾아 가면 입구마다 일주문이 서 있고, 그곳에는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들어오는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이들 상은 불법을 지키는 옹호신중으로서, 예로부터 불자들의 예배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화엄경이나 능엄경 등과 같은 주요 경전에는 한결같이 사천왕과 금강역사들이 출현하여 경전을 찬탄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라도 경전을 수지하는 중생이 있다면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서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상들에 대해 단순하게 옹호신중이 아닌 대웅전에 모셔진 불·보살님 상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절에 방문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대부분 부처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청정하고 온화하신 모습은 세상의 모든 잘못을 다 덮어 주실 것 같고 온갖 소원을 빠짐없이 이루어 주실 것만 같아 부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그와 같은 거룩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곧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서는 부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상(相)과는 정 반대되는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은 무섭고 성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꺼려합니다. 저 모습들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정한 모습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 지를 일러주는, 또 다른 방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부릅뜬 눈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추호도 감추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들고 있는 칼이나 주먹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어리석음과 악을 용납치 않고 부숴버리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저 상들이 밟고 있는 잡귀들 역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갖가지 욕망과 번뇌들로, 항복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통한 해탈에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는 공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할 때 비로소 일주문을 통과해 부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을 항상 관찰하고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과 번뇌를 깨뜨리는 행위가 수반될 때 성취됩니다.
사천왕이나 금강역사를 외적 존재로만 여기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준엄하게 심판하는 내적 존재로 돌리는 것이 저들을 바르게 신봉하는 길입니다. <유마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