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솟은 삼층석탑 통일신라힘 과시
경주로 가는 길은 ‘신라로 가는 길’이다. 함월산, 토함산, 산으로 이르는 길이든, 호미곶, 대왕암, 바다로 닿는 길이든 그 길은 모두 신라로 가는 길이요, 신라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반도 땅, 삼한(三韓)의 경계 안에 신라의 자취 어리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맥박 고동치던 서라벌 언저리에 이르면, 향내음, 꽃내음 물씬한 천년의 향기를 느낀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새로운 길. 신라로 가는 길은 꿈꾸는 길이요, 노래하는 길이다.
꿈 속에 듣던 황매산 영암사지 돌축대의 잔나비 울음소리는 잠을 깨도 귀에 쟁쟁거린다. 이런 날 새벽열차를 타고 넘는 역사의 문지방은 한없이 호흡을 가쁘게 한다. 시린 겨울 안개를 가르고 무혈입성한 경주는 옛 고향에 돌아온 듯 예의 그 안온한 모습이다. 보리사 솔 그늘에 앉아 계신 석가여래의 자리도 애랫목인냥 따습고, 탑골 부처바위의 마애불상 권속들도 정겨운 이웃인냥 그윽한 품을 벌려 마중한다.
여기서 세차게 발길을 잡아끄는 것은 경주박물관 뜨락의 무두불(無頭佛) 군이다. 어찌할 것인가. 목과 팔다리를 역사의 허깨비들에게 겁탈 당하고도, 아직 남아있는 살과 뼈가 더 있어, 저토록 꿈쩍을 않는 저 고집들을 어쩔 것인가.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아직 못 다한 역사가 있고, 못 받은 공양이 있어 저토록 미련을 두고 집단으로 저잣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저 사연들을 누가 거둘 것일까. 갑시다. 무두불들이여! 오늘은 감포 앞바다로, 가서 동해 저 심연에서 울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다시 얻어 목이 터져라 희망을 합창합시다. 용당산 감은사지 쌍탑에 기대 서서 일월성신으로 반짝이는 호국성령들의 눈빛을 오래도록 마주합시다.
보문동에서 황룡계곡을 거쳐 덕동호를 지나는 길은 신라로 가는 길 중에도 혼자 가기 아까운 길이다. 도반이 있으면 더욱 좋고, 도반이 없으면 흰 구름이라도 데불고 함께 할 길이다. 덕동호 저 깊이 모를 수심 아래 수몰된 고선사지는 무슨 연유로 경주박물관 뒤뜰에 삼층석탑 한 기만을 남겨놓았는지. 이젠 수중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천길 심연에서 홀로 목어를 울리는지 암청색 수면은 너울너울 살아서 달려온다.
추령터널을 나와 유속이 완만한 대종천을 따라나서면 저만치 1천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앞서가는 어가 행렬이 있다. 위풍당당한 문무대왕의 행차이시다. 이 땅 최초로 통일국가의 대업을 완성, 홀로서기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른 민족의 숙적 왜구가 수시로 동해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만고의 정법인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를 제압하고자 숨 돌릴 틈도 없이 토함산을 넘은 것이다. 문무대왕이야말로 불심 충만한 우리가 기억해야할 이 땅의 영도자가 아니었던가.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고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뒤에는 불에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조)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영주. 전제군주로서의 막강한 권력과 호사를 뒤로하고 검약과 절제로써 솔선한 진정한 위국안민(爲國安民)의 지도자인 문무왕과 같은 선열이 있어 신라의 추억은 포만하고, 그러한 위정자를 이 시대에는 만나지 못해 우리의 시대는 곤고하고 애석한 것이다.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31호)는 문무왕이 장차 자신의 유골을 뿌릴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터를 골라 착공했으나, 절을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681년),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숭고한 염원을 이어 받아 즉위하던 그 이듬해(682년)에 완공한 절이다. 선왕의 은혜와 원력이 사해에 사무쳤으므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던 것이다. 감은사지. 곧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의 3대 국찰로 알려진 호국 성지, 감포 앞바다의 그 멋스런 절터이다.
용당산을 배산으로 대종천을 임수로 명당 터에 자리 잡은 감은사지는 폐사가 되어서도 지켜야할 그 무엇이 있는지 절 터 입구에 세 그루의 노송을 키우고 있다. 어떤 부정함을 막으려는가. 솔잎은 잡것의 접근을 막는 것이므로 금당 터 느티나무가 그 밑둥에 새끼줄을 두른 것과는 그 처지가 다른 것이다. 감은사지가 절터로서보다는 감은사탑으로 더 유명세를 타는 것처럼 감은사지 답사는 동서 2기의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을 참배하고 탐험하는 것이 그 시작이고 대미를 장식한다.
감은사지 동ㆍ서 2기의 석탑은 그 거대한 풍채와 위엄이 가히 사람과 자연을 압도한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의 국력에 걸맞게 그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감은사탑 2기의 삼층석탑은 그 크기와 품새가 천하제일의 것이야 했던 것이다. 어떠한 장식도 군더더기도 필요하지 않다. 동해의 용이 되고자 했던 문무왕의 위용이 그러했을 것이다. 당군을 물리치고, 왜구마저 범접을 사양했던 신라인의 기백과 불심이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장중하고 튼실하여 안정감과 상승감이 넘치는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일탑일금당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일금당으로 가람배치 양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최초의 것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감은사탑은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축조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석탑 양식은 고선사지 삼층탑, 불국사 석가탑 등을 거치면서 3층 석탑의 기본양식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감은사지 석탑의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지대석과 면석이 12매로 다듬어진 같은 돌이며, 갑석 또한 12매이다.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으나 3.9m의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있다. 석탑의 전체 높이가 13m에 이르는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감은사지는 동·서 두 개의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감은사지 금당은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치고, 그 위에 장대석을 마루 깔 듯 깔고 초석을 놓은 것으로, 동해의 용이되었다는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드나들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호국가람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이견대는 문무왕의 산골처인 대왕암을 바라보는 대본리 바닷가에 있다. 두 개의 대나무가 한 개로 어울려 소리 내며 천지파랑을 잠재우는 만파식적은 아마도 죽비(竹扉)가 아니었을까. 내우외환으로 얼룩진 이 시대의 파랑을 잠재우는 만파식적, 그 죽비소리를 감은사탑, 하늘을 향해 치솟는 찰주 끝에서 듣는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양북면 장항리절터 편>
감은사지 가는 길
감은사지는 경주시내에서 추령터널을 지나 4번 국도를 타고 동해로 향하다가 양북면(어일리) 검문소에서 929번 지방도로 따라 6.5㎞ 정도 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남행 버스를 타고 , 감은사터 입구나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