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세생생에 끄달리지 않고 요 한철공부 잘 한다면 얽매이지 않을 겁니다”
457호에 이어서
여러분! 여러분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그런 걸 아십니까? 아니, 나뿐이 아니죠. 만약에 여러분의 자식이 그렇게 곤궁에 빠졌다고 했을 때, 여러분 자식이 만약에 차 사고를 당했다고 했을 때 순간의 놀란 그 마음을 조금 진정을 하고 보면 눈에서 뼈저린 눈물이 흐르죠. 어떻습니까? 딴 거는 안 그럴까요? 그 마음이나 다 똑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마음공부 하러 다니는 것을 괜히 다니는 걸로 생각하지 마세요. 아까도 얘기했고 예전에도 얘기했습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마는 ‘왜 그렇게 됐을까?’ 하고 궁금하죠. 궁금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데서 생기는 겁니다. 큰 비행기도 공중에서 감쪽같이 없어지고 바다에서도 감쪽같이 없어지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을 작게 표현을 한다면 그건 자력에 끌려서 들어갈 수도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늘 사람까지도 벗어나서 이 세상을 전체 손아귀에 쥐고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안 계신 데가 없고, 손이 안 가는 데가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이 그렇게, 모습 아닌 그 속에 바로 불종(佛種) 그 자체로서, 불종이라는 이름조차 없는 불종으로 어디든지, 어디든지 있죠. 그래서 이 공부는 어마어마한 공부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돌아갈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렇겠지. 그냥 그렇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단전호흡을 한다고 하는데, 만약에 입으로 먹고 똥으로 안 누면 막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단전호흡을 해서 바깥으로 나쁜 기를 모아서 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병이 되고 마는 그 몸뚱이조차도 몸 떨어지면 입도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생각도 떨어지는데 뭘 어떡할까요? 그런 걸 기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우린 영원하기 위해서, 또 영원하게 내가 살 양으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이 공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천차만별로 돼 있는, 어떠한 목신이든지 어떠한 지신이든지, 흙에서 나는 거든 나무에서 나는 거든, 공중에서 나는 거든 또는 태에서 낳는 거든 알에서 낳는 거든, 습한 데서 낳는 거든 화(化)해서 낳는 거든 전체를 다 둘 아니게 한 낚시에 탁 걸어서 건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우는 겁니다.
그런데 낚시도 낚시 없는 낚시여야 합니다. 그냥 낚시라 하면 그거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또 손 아닌 손이라고 했습니다. 생각 없는 그 한생각이 전체를 담아서 건질 수 있는, 자동적으로 건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있기도 하고요. 현실로 연구하는 것도 어떠한 연구를 하든지 그건 자유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연구를 한다고 하니까 딴 데보다 엄청나게 위로 올라가지 않게 하고 탁 쳐버리는 거,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미국이 소련보다 높아서도 안 되고 또 소련이 미국보다 높아서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런 문제들이 생기니깐요.
그 연구들을 하는 마음도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써, 머리로써 연구하는 겁니다. 머리를 쓰는 거를 정신이라고 하죠. 그런데 정신으로 돌아서 가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들어가는 거는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이 계합이 돼서 돌아가지만,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재 보고 듣고 들이고 내고 하는 그 감각으로서 머리를 쓰는 현재의식 자체가 결정짓는 마음은, 그거는 한마디로 말해서 모자라는 50%가 돼서 모자라는 물질세계 50%에서 그냥 사는 여러분이 돼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 생각은 바로 한데 계합된 정신이라야만이 연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것에서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계합된 그런 연구인이 있다면 만약에 글을 연구할 때에 그 모든 자료를 같이 넣어서, 예를 들자면 탐지기는 탐지기대로 어떠한 분별만 하게끔 하고, 또 어떤 거는 어디 있나 그것만 봤는데 지금은 어떠한 걸로 썼는가, 어떠한 걸로 만들었는가, 얼마나 속도가 빠른가 이런 것까지도 다 컴퓨터로 나오게끔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알고 보면 지금만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더 가면 그것보다도 더 나은 최대의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다 재료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것은, 최대의 물건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 이전에 바로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 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기르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뜻을 그저 아무렇게나, 팔만대장경에 모두 말씀해놓은 걸 지금 요 사는 데에만 꼬작꼬작 붙여놓으니 이걸 어쩝니까? 저 우주 삼천대천세계 전체를 갖다 넣고 그냥 슬슬 굴리게끔 해놓지를 않고, 슬슬 굴리게 해놓은 그 경서의 내용을 조그마한 데다가 딱 붙여서, 우리 사는 데다가 붙여서 항상 빌게 만들어놨어요. 예? 항상 깡통을 들고 빌면서 그 깡통에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겁니다. “반찬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밥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 “아휴, 우리 아들이 이렇게 됐는데 먹지를 못합니다, 관세음보살!” 또 “취직을 못 했는데, 취직이 되게 해 주십시오. 관세음보살!” 이렇게 만날 얻으러만 다니는 겁니다. 얻으러 다니게 만들어 놨어요. 그래, 내가 농사짓고 부지런히 뛰어서 내 밥 내가 먹는 거지 누가 나를 먹여주고 누가 행복을 갖다주고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냐는 거예요? 그거를 뒤집어 본다면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좋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건 참 기가 막힙니다. “아버지! 저 사람은 몰라서 저렇게 그러는 거니 용서를 해주옵소서.” 하고 했잖습니까? 예?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게 죄지 무슨 죄가 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그 마음이나 뭐이 다릅니까? 또 한 가지는, “얘들아, 모두 나를 믿어라.” 이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각자’라는 말을 안 넣었기 때문에 모두 나를 믿으라고 하니까 이거는 예수님 고기 덩어리를 믿으라는 줄 알고 온통 그 이름을 가지고 상표를 붙여놓고는 전부 비는 겁니다. 아니, 이름들은 모두 상표입니다. 물건의 상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상표에 묶여가지고는 그냥 옴폐부득을 못 하고 꽁꽁 묶여서 있으니 그게 창살 없는 감옥이지 뭐겠습니까. 그래가지고 결국은 빠지지도 못하고 이러는 겁니다. 아니, 물이 깊고 산이 높고 불덩어리가 온통 죄 태운다 하고, 그냥 마귀들이 북적거린다 하더라도 체가 없는 내 마음이 넓으면 그냥 다 주워 모아서 거기다가 넣어서 그 아팠던 의식과 모자랐던 의식이 다 없어지고, 그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선 이 세상에 자기와 같았던 모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그 얼마나 한생각을 내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기복으로만 자꾸 돌아가서, 이 기복이라는 것도 좋은 말로 들리겠지만 그 말보다도요, 행이 모두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법이란 말입니다, 또 얻어먹게도 하고요. 나중에는 얻어먹다 얻어먹다 강도질까지 하게 만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죽어서 몸뚱이가 없어지고 의식만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그러니 끼리끼리 모이게 되는 거죠. 사과는 사과대로 놓고, 배는 배대로 놓고, 금은 금대로 놓습니다. 아니, 사람들도 전부 공업을 하는 사람은 공업하는 사람끼리 모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전부 끼리끼리들 모입니다. 누가 오너라 가거라 할 것도 없이 자기네가 공부한 과목대로 그냥 풀려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던 그 마음이 죽어도 역시 항상 해꼬지를 하는 겁니다. 그저 살아 있는 거기 가서 “왜 내가 너를 이렇게 때리는데도 말도 안 하고, 내가 너희 집에 와서 이렇게 같이 앉았는데도 왜 아는 척도 안 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걸 모르니까! 그 상대방이 모르는 줄을 모르니까요. 보이지 않는 줄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모르는 겁니다. 그리곤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니까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솔직한 얘기지만 내가 여러분한텐 그런 얘기 저런 얘기 안 합니다. 너는 과거에 어땠고 과거의 부모네가 어땠고 자식이 어쨌고 뭐 이렇게…. 그거 다 얘기한다면 복잡해서 공부할 수도 없고 그걸 밀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글쎄 어떡하느냐는 거죠.
어떤 땐 정 이게 이러면은 여러분이 정성을 들이러 다만 얼마를 봉투에 해가지고 올 때 말없이 거기다가 메모를 해놓습니다. 왜냐? 전자에 살던 조상분들이 너무나 몰라서 자식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기가 그 의식으로 살았던 거기에 치우쳐가지고는 그냥 “내가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나를 모르느냐, 나에게 못 해주느냐?” 이러고 전자부터 나오던 게 자꾸자꾸 얽매여서 돌아가는 거죠. 얽히고설킨 게 다 붙어 돌아가니까 그거 사람이 살 수가 있어야죠. 이게 몸뚱이 갈 때 혼자 홀가분하게 가고 마음도 홀가분해야 걸음도 잘 떼고 좋은데 한 짐 잔뜩, 만약에 귀까지 요렇게 어깨에 올려놓고 있으면 팔도 움죽거릴 수가 없는 거예요.
예전에 어느 회사 사장이 골수염으로 모두 죽는다고 그러고 고생을 할 때, 내가 그랬거든요. “지금 부산을 가시려고 애를 쓰면서 차를 타고 가십니다. 그런데 차 꼭대기까지 이렇게 가득 물건을 실어놨으니까 팔도 움죽거릴 수 없고 귀도 잘 들리지가 않고 그러니 어떻게 부산을 가십니까? 물건 좀 내려놓으시고 가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못 알아듣는 거예요. 백지죠. 양 어깨에 있는 것만 내려놔도 갈 텐데 못 가는 겁니다.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고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러면서 그냥 홱 가버리는 거예요.
아, 못 알아들었더라도 한 번 오고 두 번 오고 그러면은 그 뜻을 알 텐데 그냥 가는구나. 그래서 속으로 빙긋이 웃으면서 ‘아, 부처님께서도 인연 없는 중생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시더니 정말 할 수 없구나. 저 사람은 돈만 보이니까, 자기가 그렇게 무겁게 짊어졌다는 걸 모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선 그냥 ‘할 수 없지 뭐, 어떻게 할 수 있나.’ 그러곤 말았죠. 그랬더니 그 식구들도 다 그렇게 됐고, 그 회사 재산도 그만 그렇게 됐고…. 모두가 그렇게 된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모두가 살아나가는 데 급급해서 그냥 애를 쓰고, 이름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이론으로 배우려고 애를 쓰고, 지식으로 살면서 남의 거를 갖다가 빼서 어떡하든지 내 걸 만들어서 그저 좋게 얘기해주면 될 줄 알고요, 그렇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엊그저께도 법사스님더러 그랬습니다. “선객으로 가시는 큰스님네들이 이런 말씀을 하고 이렇게 행을 하시는데 이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아유, 그거 동감입니다. 스님 생각이 옳습니다.” 이러시더군요. 내 그런 얘기는 안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이 진실하고 그 진실한 도리를 앎으로써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뜻을 지니고, 진실한 뜻을 지녔기 때문에 자기가 익게 되고, 익게 되면 고개가 숙여지고, 고개가 숙여지면 언제나 나 아님이 없고 전부 둘이 아니게 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런 도리를 우리는 모른다는 얘기죠.
그러니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그 뜻을 모두 자기네들 마음대로 결집을 해서 그저 비는 걸로만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법성게(法性偈)도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종성(鐘聲)도 그렇게 좋은 말이고 그런데도 어떻게 보면 어떤 거는 그냥 아주 비는 걸로만 해놓고, 그나마 그냥 원문으로 둔 것은 또 괜찮고요. 하여튼 바깥으로 끄달리지만 않으신다면 빌지 않을 겁니다. 또 안으로도 빌지 않을 겁니다.
둘로 본다면 기도를 해야 하지만 둘로 보지 않는다면 ‘관(觀)하라.’ 이런 소립니다. 내 주인공만이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과 내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 소립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이런다면 그 무엇이 있었던가? 그냥 주먹으로 이걸 하나를 집어서 한 번 친다면은 쩡 울리는 그 뜻! 두 손으로 그냥 두 개를 집어서 팍 친다면 번쩍 불이 일어나는 찰나 이겁니다. 모두가. 그래서 이 공부가 참 재미있고요, 생활 속에서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찰나의 생활을 그냥 여여하게 사시라고 그렇게 가르쳐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빌어먹으려고만 하고 빌고 있으니 이걸 어떡합니까.
영원토록 우리는 그냥 쉴 사이 없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죽고 사는 게 없습니다. 그냥 금방 그렇게 났다가 금방 이렇게 늙든지 젊든지 죽는다, 그런다면 의식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그 의식을 자기가 알면은 그냥 곧바로 갈 것이고, 죽기 전에 벌써 대치를 다 해놓고 있습니다. 사흘 전에는요. 그러고는 집을 다 마련해놓고 가고, 또 그 도리를 모른다면 집도 안 해놓고 그냥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집을 또 만들고, 또 그것도 모른다면 집을 만들려고 거기 갈 줄도 몰라요. 그래서 아무 데나 들어가는 거죠, 아무 데나. 돼지 소굴이든 뭔 소굴이든, 그저 돼지우리든 소가 있는 데든 새가 있는 데든 뱀이 있는 데든 그걸 모르니까, 까치 둥우리인 줄도 모르고 가다가 그냥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그게 한 번 잘못에 그 소굴로 들어가 그 모습을 가지면 그 모습이 살고 있는 거기의 의식이 배어가지고는 사람으로 돌아오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마어마한 진리요, 어마어마한 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또 세계적으로도 우리 손 안에 넣고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여러 가지 있는데, 이렇게 그냥 왔다 그냥 슬며시 스러져서 되겠느냐 이겁니다.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요 한 철을 잘 공부한다면 세세생생에 우리는 끄달리지 않을 거고 얽매이지 않을 거고, 일체가 나와 둘이 아닐 거고 둘이 아닌 까닭에 나툴 거고, 나투는 까닭에 건질 거고 건지는 까닭에 부처와 부처가 둘이 아닐 겁니다.
아무리 부처가 수만 명이 됐다 할지라도 부처의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돼버려요. 부처님의 제자가 깨달았으면, 그 깨달은 마음과 그 깨달은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이것도 부처 저것도 부처, 모습은 다르지만 다 부처인 것이죠. 하나입니다. 부처는 둘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도 없느니라 이거예요. 하나도 없느니라. 왜? 제자가 만 명인데 아, 글쎄 제자가 자기와 같이 다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했든 깨달았든, 하여튼 그 만 명이 다 자기 마음하고 똑같이 그냥 합쳐져서 계합이 돼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가 하나다 할 수도 없고 부처가 많다 할 수도 없고, 부처가 없다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엉거주춤 말하기를 ‘무(無)!’ 했단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마저도 없으니 하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 개가 하나로 돌아가고 또 만 개가 됐다가, 만 개가 하나로 돌아가고 또 만 개가 제가끔 됐다가, 그 만 개가 또 수만 개가 될 수도 있고 수십억만 개도 될 수 있으니 어쩌느냐 이거죠. 그러니 부처라는 이름도 없느니라. 그게 바로 부처니라.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좌석에서 깨닫는다 하더라도 다 부처님 마음 안에서 그냥 하나의 부처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마디 더 붙이는 것은 지금 시급한 것이, 그전에 내가 광명선원(光明禪院)에서 설법할 때 그랬죠. 그때 뭐, 요것만 생각나요. ‘구이팔이….’ 라고 그랬던가? 그러면서 무슨 시를 읊은 게 있어요. 십년 전인지, 아마 십년 전일 거예요. 그때 또 ‘팔팔공치기는….’ 이런 시 읊은 게 있어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그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니까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이러지 마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니까 그 생각을 그대로 해서 던져놓는 거죠. 그대로 생각해서 놓으면 그대로 실행이 나와요. 이것이 과학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게 자동과학입니다.
자동심 과학.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야.’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에서 올림픽 잘 치뤘죠? ‘십중팔구 좋을씨고.’ 했으니 말이에요. 어때요, 멋지죠? 우리가 삿갓 쓰고 주장자 짚고 신발을 거꾸로 머리에다 쓰고, 거꾸로 다닐 줄 안다면 그렇게 좋은 거예요. ‘좋을씨고’ 예요.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무엇을 더 바라겠나 이런 셈이죠.
그러니까 여자 남자가 따로 이렇게 모습은 있지만 따로 없듯이, 부처 중생이 따로 없듯이 그 뜻을 앞으로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또 배우는 것만 아니라 증득하고 열심히 하기 위해서 자기 주인공만이 자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 자기 주인공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 자기 주인공만이 자기 가정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살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를 다 자기 주인공 한군데다 묶어놓고, 맡기고 사는 그런 사람이 돼야만이 세 가지를 타개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 가지는, 인과에 의한 모든 걸 녹이는 법이요. 둘째는 습을 떼는 법이요. 셋째는 나를 발견하는 법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전부 가정도 편안하고 내 맘도 편안하고, 전부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아요. 그건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아마.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8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