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성 스님
절 집에 살다보면 전통적인 수행법을 벗어나 사는 스님들을 더러 만날 때가 있다. 참선이나 염불 그리고 간경과는 거리가 먼, 등산이나 여행이나 노래를 수행삼아 사는 스님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멋이 있고 타인에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수행과 구세대비의 자비심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논리에 귀 기울여 보면 대단히 감성적이고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가슴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라고 부른다.
탄성 스님 역시 가슴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라고 할 만하다. 그는 대단한 산악인이다. 쌍계사 강원에 있던 시절, 그는 틈만 나면 자일을 메고 전국의 바위산을 찾아 떠돌아 다녔다. 조금 큰 키에 마른 편이지만 암벽 등반을 해서 그런지 그에게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팔뚝과 다리의 근육, 그리고 배에 그려지는 근육은, 그의 등반이 단순한 취미 수준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어느 해 겨울이다. 그가 쌍계사 강원에 있던 시절이니까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쌍계사에서 한 시간 쯤 걸어 올라가면 불일폭포가 있다.
그 폭포는 겨울이면 얼어 아주 멋진 빙벽을 이룬다. 그래서 겨울이면 빙벽등반을 하러 사람들이 더러 온다. 그도 겨울이면 이곳에 와 빙벽등반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얼음이 깨어지면서 스님이 낙상을 하고야 말았다. 빙벽에서 떨어져 다시 얼음판에 추락한 그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불·보살님의 가피 덕분으로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는 골절상으로 인해 한동안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그가 다시는 암벽이나 빙벽등반은 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야 말았다. 그는 병원에서 나오고 좀 지나서 다시 암벽 등반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의외로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고 사는 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이렇게 살았으니 아무래도 죽지는 않을 인연인가 봐요.”
나는 그의 무쇠 심장이 부럽기도 했지만 생사에 초연한 그의 넓은 마음자리가 더 부러웠다.
얼마 전 나는 그의 토굴을 방문했다. 흙으로 지은 십여 평 되는 토굴은 아주 깔끔했다. 방에 들어서니 난로에서 향긋한 나무 타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가 사진을 보여주었다. 알프스 등정할 때의 사진과 강원 시절의 사진들이었다. 알프스 등정사진은 그가 혼자 찍은 것들이라고 했다. 네 명이 함께 알프스 등정의 장도에 올랐지만 다른 세 명은 다치거나 중도에서 포기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찍은 사진 몇 장은 암벽을 배경으로 자신의 손을 찍은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의 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가 손만 찍은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서야 비로소 사진 속의 손이 그의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등정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 정상에 선 사내의 심정과 왜 목숨을 건 등정을 하는지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자기실현이라고.
“등산을 하는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산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의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며 삶에 애착을 뛰어 넘는 것이며 나라는 경계를 해체하는 수행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 과정이 듯이 산에 오르는 일 또한 내게는 과정으로 지나갈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요.”
그의 말처럼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선방에 다니며 마음의 산을 오르고자 노력했다. 마음의 산은 눈보라 치는 알프스 정상 보다 오르기 더 힘든 것이라는 그의 말이 큰 공명을 남겼다. 마음의 산을 오르다 그는 잠시 쉬는 것일까. 그는 이번에 선방에 들지 않았다. 대신 해제 철에 배운 목수 일에 열심이다.
강원도 안흥에 있는 통나무 학교에서 집짓기를 배우고 제일 먼저 그 토굴에 잇대어 창고를 하나 지었다. 처음 지어 본 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창고는 훌륭했다. 그 창고 안에 그는 목수 도구와 등산장비를 구비해 놓았다. 요즘은 다시 10평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있다.
산에 가면 산에 어울리고, 목수 일을 하면 목수 일이 천직인 것 같은 스님이지만 그는 새벽이면 일어나 좌선하고 하루 일을 마치면 다시 선정에 드는 철저한 수행자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다 선(禪)일 수 있어서 좋은 사람. 길을 가다 아이를 만나면 아이가 되어 놀고, 노인을 만나면 말벗이 되어 머무는 넉넉한 사람이 탄성 스님이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