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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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일 스님
절 문 열어 포교 모범 보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밥 먹고 똥 누는 게 다인 사람한테 뭘 들으려고 해. 일 없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정일 스님(부산 소림사 회주)은 그러나 부산불교계의 크고 작은 신행단체와 부산 교계를 이끌고 있는 일꾼을 키워 낸 ‘어머니’ 같은 존재로 통한다.
35년 전, 소림사 주지를 맡은 스님은 바다가 모든 강물을 수용하듯, 법회 장소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행단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동의 건물뿐이던 당시의 소림사는 초등부, 중고등부, 대학생불교연합회, 대한불교청년회, 거사림회 등 법회를 보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로 넘쳐났고, 거의 매일 법회가 열렸다.
“그 때는 학생들이 풍기는 발 냄새가 가득 했지만 오히려 향기로웠어. 절에 와주는 것만도 기특하고 고마웠지.”
사람을 내치는 일이 없는 스님의 성품은 많은 스님들이 외면했던 신행단체를 품어 안았고 지금도 행사장에 가면 얼굴도 모르는 이가 달려와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엄법사였던 은사 금광 스님이 열었던 화엄산림, 법화산림, 참회산림을 47년에 걸쳐 꾸준히 이어오며 소림사를 도심포교도량으로 키워냈다. 산림법회가 흔치 않았던 당시, 하루 1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는 법석이었다.
좁아지는 도량을 견디다 못해 95년 불사를 시작했지만 옹벽이 무너지면서 인근 주민의 반대가 몰아쳤고 시공사까지 부도를 내면서 크나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소림사 주지 혜전 스님은 “그 당시 6~7년 동안 냉방에서 지낼 정도였는데도 모든 어려움을 당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기도 정진하며 헤쳐나가시는 모습이 눈물겨웠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정일 스님은 “부처님이 계시고 사람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있어 불사가 이뤄졌다”며 공덕을 부처님께로 회향했다.
스님은 1952년 15살의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스님이었던 사촌언니를 따라 소림사로 출가해 56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출가 후 속가에서 소림사로 찾아와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스님의 마음은 이미 부처님께 깊이 귀의한 후였다. 물을 길어 나르고 연탄 한 장으로 견디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금광 스님께 배우는 불법의 깊은 가르침이 좋았다. ‘언제 일어나고 언제 주무시는지 모를 정도’라는 스님의 기도 정진은 모두 금광 스님께 물려받은 것이다. 금광 스님은 운문사 초대 비구니 주지를 역임하며 운문사 중창불사를 이룬 한국 비구니계의 큰 어른이다.
아무리 사중(寺中)살림이 바빠도 제자들이 선방이나 강원에 간다면 절대로 붙잡지 않는 스님, 칠순이 넘은 지금도 손님이 오면 손수 차를 준비해 건네는 스님의 모습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높은 이념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부산=천미희 기자
200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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