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찾으려고 하기 이전에 내 앞의 걸 해결하고 넘어가라
여러분과 더불어 항상 같이 했으나 지난번에 바다 건너갔다 온 이래로 처음 만나는 분들도 계시고 또 그 안에 만나뵌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다 건너 저쪽이든 바다 건너 이쪽이든 멀고 가까움은 없겠지만 모두들 한국보다는 달리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생활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우리는 그래도 좀더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그곳에서는 아내가 아침 새벽에 나가면 남편은 새벽에 집으로 들어오고, 부부가 교대로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이런 가정이 많습디다.
그러니까 지금은 경서(經書)를 가지고 풀이를 해서 강의를 해준다거나, 또는 백팔배를 한다든가 오백배를 한다든가 주문을 외운다든가 하는 이런 것 가지고는 어렵다는 걸 느꼈고 또 봤습니다. 우리 한국도 앞으로 2, 3년만 넘어가면 젊은이들이 더 바쁘게 뛰어야 하는 시대가 돌아오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또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인네들도 그렇고 중년 되신 분들도 그렇고, 애들까지도 아마 지금보다는 더 뛰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남을 쫓아가기보다는 앞서서 갈 줄 아는 그런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또 지금 절에 다닌다고 해서 안이하게 그냥 계시면 안 됩니다. 항상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이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자 바로 행선(行禪)입니다. 그런고로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을 드리지마는 둘이 아닌 마음을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참으로 자기 주인공을 믿는 마음은 올바르게 말하는 마음이며 올바르게 생각하는 마음이며, 항상 나라는 조건을 녹여버리는 마음, 즉 말하자면 아집을 가진 마음을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써 행이 나올 때는 항상 평등 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왜 이렇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여러분과 저와 이렇게 같이 앉았을 때는 전부 도반이고 같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다 알면 좋지만 알지 못해서, 때에 따라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어마어마한 진리로구나, 어마어마한 공부로구나.’ 너무나 엄청나서 말로 할 수가 없으리만큼,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그렇게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냥 절에 다니면서 이만하면 공부 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수화풍이 바탕으로 돼 있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는 광력이나 전력·자력·통신력이 충만한 겁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천체물리학을 연구할 수 있고, 또 물건을 바깥으로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장본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어떠한 물질이 나왔습니까? 우린 자비의 칼을 가지고 선의를 베풀어서 악의 조건, 선의 조건을 다 우리 마음으로써 잘 보고 올릴 건 올리고 내릴 건 내릴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손아귀에 다 쥐어야 한다고 봅니다. 두서없는 말이지마는 잘 챙겨 들으시리라 믿고 말씀드립니다.
지금같이 이렇게 밝고 밝은 시대에 연구를 해낸 물건들이 모두 전쟁하는 데 쓰이고 모두 죽이고 내가 차지하겠다는 마음, 다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들, 그런 연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한생각에 의해서 그런 연구를 제재할 수 있고 타개할 수 있는, 또는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재료가 여러분 앞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고 또 해보지도 못하고 실험도 못해보고 맛도 모른다면 그 하나마저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타개를 못하고 조절 못합니다.
그러니 한 걸음 더 나가서 내 몸을 내가 벗어나서 내가 바른 데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가정을 이끌어나갈 수도 있거니와 사회도 이끌어나갈 수 있고, 내 국가도 지킬 수 있고 내 집을 지킬 수도 있는 겁니다. 또 세계를 조절할 줄 알아야 내 집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내 집만 지키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가져왔습니까? 내 집만 지키고 편안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실험하고 체험해서 스스로 단단히 지키고 해나가고 그렇게 해서 행복을 가져오고 또 역사를 가져오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안이하고 편안하게 그냥 왔다 갔다 하다가 가을에 낙엽 떨어지듯이 떨어지면 그뿐이니 허무하다고 생각하시면 진짜 공(空)이 색(色)이요 색이 공인 그 뜻을 모른다 이겁니다. 그대로 여러분의 마음이 실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세울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요거는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건데 여러분한테 운이라도 띄워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대국에서는 연구들을 아주 열심히 해서 어떡하면 빛처럼 빨리 갈 수 있을까? 어떡하면 빛처럼 빨리 가서 큰 잠수함이나 비행기 같은 것을 파괴시킬 수 있을까? 어떡하면 사람이 타지 않고 조그맣게 새조떡 두어 개 한데 뭉친 것처럼 그렇게 작게 해가지고도 크나큰 거를 다 흡수할 수 있을까, 또 요만한 덩어리를 아주 작게 해서 큰 덩어리를 반 쪼개낼 수 있을까? 어떡하면 음과 양을 한데 합친 탐지기나 망원경까지도 조절하고 컴퓨터까지도 조절해서, 어떻게 하면 빨리 가서 모든 거를 다 알고 보고 행해서 미리 보고를 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을 타개할 수 있나 하는 이런 연구들을 서로 할 양으로 노력들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소련에서 그런 문제들을 더 재빨리 할 양으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좀더 해서 모든 것을 조절하고 연구를 빨리 해서 우리는 살고 상대는 죽이고 하는 그런 문제라든가, 그런 생각들을 좀 조절해서 안유하게 만들어 주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아주 필요합니다. 현재는 쌍방이 똑같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똑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양쪽이 다 죽으니까요. 양쪽이 다 죽지 않고 한쪽만 죽이기 위해서 지금 눈을 까뒤집고 연구를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해서 그것을 모두 보고 듣고,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줄 알고 이런 재료가 여러분한테 다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보는 거 듣는 거를 우리는 조절을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석이 끌어오는 힘,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세 가지나 네 가지나 첨보해서 끌어당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연구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을 충만히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데서도 보이는 거를 끌어당길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다는 얘기죠. 믿어지지 않죠? 물질로 볼 땐 ‘자석’이라고 하지마는 우리들 마음공부에서는 ‘자력’이라고 합니다. 안 그럴까요? 내가 표현이 틀렸을까요? 난 여러분처럼 용어를 잘 알고 그러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을 잘 못할는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이 어떡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진실하게 하는 겁니다. 진실한 마음은 여러분이 읽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보이지 않는 데서 이끌 수 있는 힘이 여러분한테도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고도 또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은 ‘무한의 모든 것을 다 내도 줄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느니라. 삼천대천세계 우주 모두를,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사생(四生)의 천차만별로 돼 있는 것을 좁쌀 한 알갱이에 다 운집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도 그릇이 작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이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공부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그냥 절에나 다니고 뭐, 음식이나 놓고 빌고 이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났으면 그런 것을 끌고 가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이거 보세요. 만약에 자석이라고 합시다. 자석이 이만한 덩어리라면 요만한 덩어리로는 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요. 큰 바위에 계란 갖다가 붙이는 셈이죠. 그러니까 자석이 크다면, 이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음이 있는 자석이라면 모두 거기 가서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태양에도 달세계에도 모든 것이 그 분야에서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 덩어리 바깥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끌어들이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물방울 같은 그런 아주 좁쌀 같은 거, 또 하다못해 콩 같은 고런 거, 물질이 아닌 물질, 물방울 같은 게 그 덩어리를 돌면서 모든 것을 지원합니다. 만약에 그게 지원을 안 한다면 터져버릴는지도 모르죠. 안에서는 안에 대로 조절을 해서 마음을 내면 내는 대로 복사체제로서 벌어지는 그 문제들이 들이고 내는 것을 완화되게 조절을 하죠. 통신도 하고요.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어땠던가요. 우리네 마음은 수시로 찰나찰나 바뀌면서 자동적으로 돌아가죠. 자동기입니다. 지금 어디 뭉쳐서 매어져 있는 게 아니라 자동기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자재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자동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음을 자동기처럼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여여한 자동기인데도, 자동적으로 마음 내는 대로 살게끔 고등 동물로, 즉 인간이라는 만물의 영장으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과거의 습 때문에 그냥 거기에다 마음이 자기를 옹쳐매 놓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갈 건데도 말입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대장부의 걸음걸이는 한 걸음을 뛰어도 천 리를 뛰는데 졸장부의 걸음걸이는 백 리를 뛰어도 한 걸음 뛴 것만 못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육신으로써 벌어먹으려고 돈을 쫓아서 그냥 막 뛰는데 느긋하게 앉아서 끌어도 다 붙어서 오게끔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그게 한 걸음을 뛰어도 뛰는 거지 몸뚱이로 그걸 쫓아서, 요만한 걸 보고 쫓아서 그냥 뛰면 몸뚱이 고달프죠, 병 생기죠, 집안에서도 가족들을 잘 못 지키죠? 신경질이 나니깐 또 화목하지 못하죠? 그러니 일일이 손해 아닙니까? 일일이 손해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좋습니까? 여러분을 볼 때마다 답답한 게 있어요. 그래 어떤 때는 웃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것도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날 위해서지. 왠 줄 아세요? 여러분이 나하고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습니다. 또 둘이 아닌 까닭이 있기 때문에 나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지금 이 세상에 내 형제 아님이 어디 있고 내 부모 아님이 어디 있으며 내 자식 아님이 어디 있습니까? 몸뚱이가 이 집 가서 한 철, 저 집 가서 한 철, 저기 가서 한 철 살면서 자식이 됐다가 부모가 됐다가 형제가 됐다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어떤 게 내 부모라고 할까요? 어떤 게 또 내 자식이라고 할까요? 어떤 게 내 형제라고 할까요? 부모는 누구나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 똑같은데 언제 적 부모를 내 부모라고 하고 언제 적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부처님 조상과 육을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어찌 갚을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몸을, 응신(應身)할 수 있는 이 몸을 만들어주시고 키워주시고, 뱃속에서부터 자기가 죽을 때까지, 몸을 벗을 때까지 생각할 수 있는 부모의 그 마음의 은혜! 모든 것을 한데 합치면 어떤 부모가 내 부모라고 할 수 없는 그 넓은 마음! 그래서 시어머니도 남의 부모라고 생각할 것도 없고, 친정어머니도 내 부모라고 생각할 것도 없어요. 똑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떤 때는 학생들이 와서 그렇게 곤란해서 눈물을 흘릴 때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내 마음은 내가 더 잘 아니까요. 사람은 거짓된 마음이 없어야 하고 나라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간을 지킬 줄 아는 마음, 의리와 도의를 지키는 마음, 이 마음, 마음, 마음, 마음, 모두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 이 마음을 떠나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공부라는 것은, 새로이 지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서를 뒤집어보면 현재 과학이 발달되고 모든 게 과학적으로 가고 지금 자동기로서 물질이 돼 있듯이 여러분도 자동적으로 돼 있고,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자동적으로 혹성이 돌아가고, 별성도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는 공부인데 여러분이 그걸 잘 모르는 거예요.
지금 우리처럼 먹고 사는 생명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냄새나 맡고 사는 생명들이 있는가 하면 마음으로 사는 생명들이 있다 이겁니다. 마음으로 사는 세계, 냄새 맡고 사는 세계, 먹고 사는 세계, 이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깨달은 사람은 마음으로 살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냄새를 맡고 산다, 죽은 영령들도 냄새를 맡고 살기 때문에 시식을 지내준다는 둥 천도를 해준다는 둥 온통 이 야단이 나는 거지 현실에서 자유자재하고 살면서 그 의식을 다 떠났을 때는 그건 죽어도 마음대로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살아야지 냄새나 맡고 돌아다니면서 지지하게 살지 않는단 말이죠. 이렇게 곧바로 얘기해 주는 것은,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내가 지금 이래요. 그러니까 마음으로 살면 보고 듣고 다 할 줄 알고, 나 아님이 없고 그러니까 어디 가나 통과예요. 통과, 통과, 통과입니다. 그러니깐 표현하자면 주장자 하나 딱 들면, 똥그란 것이 하나 거기 얹혀있는 셈이나 한가지니 그거를 들면 그대로, 그대로 통과죠, 다. 그냥 아무 데고 다 통과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다 또 한 가지 묘한 것은, 옛날에 어느 사람이 참 부유하게 살았는데 어떻게나 욕심이 많은지 남의 것을 그냥 뺏어 먹으려고만 해요.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지만요. 아휴, 내가 지금 보고 있어요. 저기 어떤 사람 있어요. 남의 것도요, 돈을 꿔줄 때에 삼십억짜리면 한 삼천만 원 꿔주고서요, 몇 해를 끌다가 나중엔 결국 제 걸로 만들어요. 그래가지고 그냥 어떡하든지 소송을 걸어서까지도 그걸 자기 걸로 만들려고 애쓰죠. 그렇게 남의 걸 뺏어서 재산을 많이 모으는데 어떻게 보면 아주 악종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악종이냐 선종이냐, 이런 걸 놓고 볼 때 선(禪)에는 악종도 없고 선종도 없다 이러지마는 우리가 먹고 사는 이 세계는 악종도 있고 선종도 있는데, 악종은 선종을 집어먹어요. 그러니까 선종이 도리를 모르면은 무의식중에 그냥 끌려가는 거죠. 끌려가서 악종에게 먹혀요. 입을 딱 벌리고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그냥 끌려서 그 입 속으로 다 들어가요. 그래서 부처님의 뜻은 선종의 입을 벌리면 모든 악의 조건과 악종이 전부 선종의 입 속으로 들어가서 한번 그 불바퀴에 굴려서 나오게 되면은 천도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악 종류였다 해도 그냥 마음이 안이하게 되고 그 불씨로서 자비한 마음을 닮아서 체인지가 되어가지곤 나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건질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악종으로 살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게 죽어서도 아주 악 두목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하면 한생각이 악이니까, 악씨가 그냥 수만 개 헤아릴 수도 없이 나와서 어느 동네 어느 나라를 덮쳤단 말입니다. 덮쳐가지고는 그냥 막, 말하자면 그 영력의 피를 그냥 빠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쓰러져요. 모두 병들어서 쓰러지는 것처럼 타서 쓰러지고, 어디 가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그냥 막 쓰러지거든요.
그래서 그 이웃 나라, 그럼 중국이라고 합시다. 그래 이웃 나라 중국에서 가만히 보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 그냥 막 그렇게 악종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종류를 보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 반짝반짝하면서 돌아다니는 벌레 있죠? 그게 뭐라고 그러죠? 반딧불, 반딧불처럼 보이면서 사람 속에만 들어갔다 하면 그게 그렇게 되더라 이거죠. 이것이 과학적으로도 있는 거지 없는 거 아닙니다. 아니, 과학이 지금 이 현상세계고 바로 우리 사는 이치니까요.
그래서 그분이 정말이지 이건 안 되겠다 해서 큰 돌 속에다가 자그마한 돌을 넣어서 벌려가지고 자력으로써 다 끌어들인 거죠. 안 그럴까요? 그건 물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돌 속에다가 다 가둬놨단 말입니다. 가둬서는 깊은 물 속에다 탁 처넣어 버렸어요. 그러니깐 왜, 꽃이 시들었다 물을 주면은 피어나듯이 그렇게 선종이 피어난 겁니다.
내가 예전에 그랬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괴질로 인해서 다 타서 죽고 병들어 죽고 이러는 동네에 들어갔는데도 수십만 명을 다 건졌다고요. 그래서 그거를 탁 닫아서는 천길 만길 물속에다가 가둬넣어 놓으니까, 그거는 그러면 어떤 물질이 아닌 반딧불 같은 거라고 표현을 하죠. 그것이 악의 씨죠. 그것을 전부 가두어놓으니까는 화초에 물을 줘서 살아나듯이 그 사람네들이 모두 생기를 되찾고 살아나거든요. 그러고는 타서 흠집이 났던 것도 자동적으로 꾸덕꾸덕해지고 낫고 말입니다. 그분이 또 겉으로는 전부 약을 발라주고 다니면서 다 건졌단 말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건 도가 아닙니다.” 이런 말들을 가끔 하십니다. 나도 그건 압니다. 그러나 도가 있기 이전에, 도를 찾으려고 하기 이전에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앞에 있는 걸 해결을 하고 넘어가라 이거야. 앞에 닥치는 거를 마다하고 큰 거를 잡으려고 뛰다가는 구덩이에 빠지고 말죠, 도를 얻기 보다도. 그래서 도를 찾는다, 도를 이룬다 이러기 이전에 사람 노릇을 한다면,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하고 내 부모같이 생각하고 내 형제같이 생각하고, 길에 지나가다가 죽으러 가는 소 한 마리를 본다 하더라도, 그 소 하나도 ‘너의 육신이 소니까, 사람한테 그 고기를 먹히고 너는 인간으로 환토를 해야지.’ 하고서 그 소 마음을 내 마음 속에 탁 넣으면 소가 내 마음을, 인간의 마음을 전부 알아버려요. 그러니깐 소가 금방 사람이 돼요. 금방 사람이 된 겁니다. 한 찰나에 사람이 됐어요. 육신만 없다 뿐이지. 육신은 가요, 지금. 의식을 빼놓으면 소는 아프지도 않습니다. 큰 돌 같은 망치로 때려도 아프지도 않아요. 그건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이예요. 의식을 빼니까, 마취한 거와 같아서.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게 하면서 내 몸같이 생각한다면 모습만 각각이지 그 마음이야, 슬픈 마음이야 어찌 둘이겠느냐 이거지요. 여러분이 만약에 사형선고를 받고 끌려갈 때의 그 마음이나 소가 죽으러 가는 그 마음이나 뭐가 다릅니까? 아마 똑같을 겁니다. 그 소의 마음을 내 마음에 한데 넣었을 때 두드러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의식이 내가 알고 있는 의식을 다 알아버리니까 그냥 내가 된 거죠. 내가 돼서 내가 또 좋은 데로 천도해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깨나 하게끔 딱 천도를 해서 내놓으면 어디 가서 금방 태어나게 되죠. 임신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큰 눈으로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렇게 감사하게 둘이 아니게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458호에 이어집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8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