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 스님
겨울은 언제나 햇살을 찾아 걸음을 옮기게 한다. 추위를 뚫고 다가오는 햇살은 따뜻함을 넘어 정겹기까지 하다.
춥고 외로울 때 그리고 문득 수행의 자리가 쓸쓸하게 느껴질 때 누군가 햇살처럼 다가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일까.
사람 사는 것의 큰 보람과 의미는 주변 사람들에 있다고 한다. 주변에 좋은 벗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보람을 만난 것이고, 좋은 벗이 없다면 그것은 삶의 보람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다. 마치 꽃이 향기가 있음에 벌과 나비가 찾는 것과 같은 의미다. 주변에 좋은 벗이 없다면 내 삶에 향기가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일이다.
내게는 많은 도반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겨울 햇살처럼 따뜻하고 정답게 다가오는 도반 하나가 있다. 서봉스님. 서먹서먹 하고 조용하던 모임 자리도 서봉스님이 동참하면 금방 재미있고 흥겨운 자리로 변하고 만다. 그의 지방색 짙은 경상도 사투리와 그리고 그 연장에서의 영어 발음은 웃음을 자아 내기에 충분하다.
그와 가끔 해외여행을 다닌다. 그 곳에서 만나는 그의 영어 발음은 진가를 발휘한다. 경상도 사투리가 영어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는 외국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가 물건을 살 때면 사는 물건 보다 그의 목소리와 억양이 더 귀를 잡는 것은 경상도 사나이의 주체성이 강력하게 밴 그의 영어 발음과 억양 때문이다. 우리는 거의 죽을 듯이 웃어 댄다. 그래도 그는 줄기차게 경상도 영어로 물건 값을 묻고 깎는다. 그 모습이 참 순수하고 명랑해 보인다.
대개의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면 부끄러워하고, 또 잘 하는 사람들은 티를 내는 법인데 그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자기 식으로 말하고 또 자기 식으로 흥정하는 모습은 그의 삶이 얼마나 명랑하고 구김 없고 순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웃으면 고개를 돌려 함께 웃으며 물건 값을 흥정하던 그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는 또 대단한 기억의 소유자다. 그가 있으면 우리 자리에 화제가 넘치는 것은 그가 조계종의 모든 야사를 두루 꿰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문중의 계보며 스님들의 일상사를 그는 정말 잘도 기억하고 있다. 그와 내가 똑같이 들은 이야기를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는 또렷이 기억해 내고는 한다. 부처님 재세 시에 그가 있었다면 그는 능히 아난과 같은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에 담긴 스님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정말 재미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어야만 알 수 있을 듯한 이야기를 한참 후배인 그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언제나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때로 ‘서 박사’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내 도반 중에는 박사라 호칭 되는 스님이 두 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봉 스님이다. 다른 한 스님은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능해 종단 정치와 세속 정치에 탁견을 소유하고 있고, 서봉 스님은 절 집의 야사에 한 소식을 이루고 있다.
두 스님이 만나 서로 입을 열면 용호상박의 쌍벽을 이룬다. 가히 입담 고수들의 대결이라 할 만큼 흥미진진 하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논쟁을 펼치다가 다시 일보 물러서 양보하는 척 하다 기선의 제압을 시도하는 그 모습은 무림의 한 장면처럼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대개 고수들의 싸움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승부는 언제나 후일의 일전을 기약하며 호탕하게 끝나고는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서봉 스님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가 언제나 하심 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자신이 하고자 한다. 함께 자고 일어나면 먼저 이불을 개는 것도 그리고 방을 깨끗이 치우고 청소 하는 것도 서봉 스님이다.
전혀 싫은 기색 없이 방을 닦고 청소하는 그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는 정말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심성의 소유자인가를 다시금 느끼고는 한다.
한번은 내가 체했을 때다. 손수 마을에 내려가 약과 따는 기구를 사와 내 열 손가락을 다 따주었다. 그것도 그냥 따 주는 것이 아니라 등을 두드리고 팔을 주무르고 난 후에 따 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사랑이 가득한 그의 따주기 덕으로 나는 체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나면 겨울 추위 속을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떠오른다. 그것은 그가 사랑과 나눔의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