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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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철벽을 뚫기 위해서는 오직 그 자리만을 뚫어야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진실이며 참답게 계를 지키는 것

빨리 터득할 수 있으려면

저는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나가고 있는 불자입니다. 몸은 산간 오지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큼은 언제나 함께 해 나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갑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어떻게 하면 빨리 이 마음 도리를 완전히 터득할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하면 내 안의 참나를 속 시원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답답한 이 마음을 통쾌하게 열어 주시기를 발원하옵니다.

거리가 아무리 멀다고 하더라도 한마음으로 뭉쳐서 항상 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간 법계와 지구 자체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항상 인연에 얽혀져서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 공부 하는 데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바빠서 서두르면 사람이 좀 방황이 되죠.
그러니깐 어떤 거든지, 우리가 똥을 누든지 잠을 자든지 밥을 먹든지, 누구하고 만나든지 무엇을 보든지 무슨 말을 듣든지 하여간에 일거수일투족이 다, 생각을 안 하든지 하든지 그것도 다 거기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거기서 안 하고 하고가 없으니까 그저 여러분은 한생각 잘해서 굴려라 이거죠. 한생각을 잘해서 굴리면 잘 생각한 대로 그대로 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마음공부를 빨리 할 수 있을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죠. 진짜로 내 껍데기를 추려서 달아보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나 속 내부를 전체 달아본다면 근수가 많이 나가겠죠. 우리가 보이는 껍데기를 가지고만 말한다면, 소용이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부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죠.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모습이 수레바퀴라고 생각한다면, 수레바퀴 아니라도 모두가 수레바퀴처럼 돼 있다면 항상 그냥 더하고 덜함도 없이 짧게 구르든 길게 구르든 쉬지 않고 굴러가는 것만은 사실이죠.
근데 그렇게 수레바퀴는 굴러가는데 차이가 없이 모습은 자꾸 변하기는 변하되 금새금새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 그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대로 자기가 공한 도리를 알고, 공한 도리를 알면 여러분이 애탄지탄할 게 없이 ‘함이 없이 하루가 굴렀구나. 함이 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죽거렸구나. 함이 없이 식구들하고 싸웠구나. 함이 없이 웃었구나. 함이 없이 성냈구나.’ 이렇게 그냥 함이 없다는 것만 알면 죄가 붙을 일도 없고, 유전성이 생길 일도 없고, 영계성이 생길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업보성이 거기 붙을 일도 없고요.
이거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 짓을 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하다 하면 편안하다는 데 다 거기 흡수돼서 돌아가죠. 가정살이가 다 흡수돼서 돌아가요. 그냥 거저 편안한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오시면 얼굴에 기미가 끼고 벌써 저거하면 아주 애탄지탄하고 사시는 게 완연히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그 기미 좀 벗기고 살라고 그러면, 언젠가 다 벗겨져 가지고 와요. 그것이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나타나는 거죠.
여러분이 이렇게 사시니까 말이지 이거는 우리 생명들이 살고 있는 법만 그런 게 아니에요. 우주간 법계가 다 그렇죠. 우리가 잘못돼 돌아가는 거는 왜냐하면 수없이 우리가 살아오는 그 습 때문에 어찌해 볼 수 없이 툭툭 그냥 그런 말도 나오고 그런 생각도 하게 되고, 또 못한다 한다가 나오고 이런 거죠. 살면서 ‘모든 걸 도대체 할 수가 없어.’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정말 할 수가 없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는 유의 법이 있기 때문에 이건 도저히 될 수가 없다고 인정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인정을 하면 인정하는 대로 그대로밖에는 안 돼요.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무의 법이다, 허공을 걷는다 이럴 땐 가고 옴이 없이 넘어 설 수 있으니 이런 문제를 놓고 본다면 하지 못한다 한다도 거기 붙지 않아요. 그냥 여러분이 결정을 짓는 데에 묘미가 있다는 얘기죠.
그 하나하나 생각하는 데에 따라서 우리가 차원이 주어지죠. 또 행이 주어지고 습이 주어지고, 그 습도 함이 없이 주어지죠. 그래서 습이 없기 때문에 붙을 게 없다 이렇게 나가죠.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이 소리를 알아듣고 그냥 평등하게, 정신계와 물질계가 항상 둘이 아니게 돌아간다. 그러니깐 정신계다 물질계다 할 거 없이 그냥 그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그대로 법이다. 생각을 잘 하면 안 붙고 모든 게 평등하고, 생각을 못하면 줄줄이 붙는다 이런 거죠. 생각하면 아주 간편하고 천 리를 한 발짝 떼 놓는 거나 같아요.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한 번 하면 그 생각이 음파를 통해서 파장이 돼서 우주간 법계가 다 알게 되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이 아니라 여러분 아닌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모습이 배라면 배를 끌고 가는 선장은 바로 모습 아닌 선장이다 이런 소립니다. 여러분이 아닌 여러분이지 여러분이 아니란 얘깁니다. 우리가 그 속에는 공생이면서 공심이면서 공체, 공용, 공식으로서 살아나가는 진리 속에서 본다면 정말 볼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한 두 건이 아니죠. 우리가 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다 건지고도 남아요.
여러분 아닌 여러분, 그게 바로 자기 불성이자 주인공이에요. 이게 하치않은 말 같지만 여기에서 잘 묘미 있게 하신다면 정말 도구를 쥘 수 있는 그런 위치죠. 그러니 겉으로 듣지 마세요. 하치않은 말이라도 한번 굴려서 생각해 보고 또 생각나면 생각해 보시고 그러세요. 달라질 테니까요.

진정 그 자리뿐인지요?

없는 문을 열려면 함이 없이 해 나가야 된다고 하면서도 마냥 끝없이 걸어가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 막막하고 갑갑한 마음이 듭니다. 오직 나의 근본을 찾아서 밝히는 이 공부만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존재의 이유인지요? 진정 그 자리뿐인지요?

팔상성도라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셔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시면서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온 것을 너희들한테 가르치느니라.’ 하는 의미로 뼈 무더기가 쌓여 있으니까 거기다가 그냥 공손히 절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사생자부이신데 어찌 뼈 무더기에다 절을 하십니까?” 하니까 “그게 아니니라. 내 부모도 될 수 있고 내 할아버지도 될 수 있고, 내 증조부도 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어찌 그냥 가겠느냐.” 이 말 한마디로, 뼈 한 무더기를 비유한 말 한마디로 팔상성도의 과정을 다 얘기한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진화되고 형성되고 진화되고 형성되고, 부모 자식 형제 이렇게 바꿔 가면서 자꾸자꾸 나투어 가는 그 도리를, 그 섭류를 다 얘기해 주신 겁니다. 그 뼈 한 무더기하고 말 한마디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벌써 자기가 자기를 리드하는 걸 차차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편리하게 해 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아! 나는 너의 심부름꾼밖에 될 수가 없구나. 네가 나고 내가 너니까 내가 몸뚱이로 모습을 보일 뿐이지 그저 둘이 아니게 내가 일을 할 때면 나로 하나로 돼 주고 내가 가만히 있을 때면 너로 하나가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면서 “아버지!” 하면 아버지 행으로, 아들과 아버지와 콤비가 돼서 그냥 아버지가 돼 주죠? 근데 부인이 또 “여보!” 하고 부른단 말입니다. 그럼 찰나에 남편으로 화해서 남편의 역할로, 아내와 남편 역할로 콤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 “얘, 아무개야!” 부르면 또 아들이 되고, 그 부모 자식이 한 콤비가 돼서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법신이 되기도 하고 귀신이 되기도 하죠. 생각을 말입니다. 생각을 하면 법신이 돼야지 망신이 돼서는 안 되죠? 법신은 한생각으로서 굳건히, 거기다가 모든 거를 믿고 맡겨 놓으니까 애비와 자식이 동시에 움죽거리기 때문에 법이 돼서 법으로 해결을 하는 거죠. 그러나 이게 망신이 되면 해결도 못하고 몸만 망가지고 식구들은 식구들대로 못 살게 되고 일은 일대로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한생각을 했다 하면, 그냥 생각이 아니라 한생각 말입니다. 한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요 문수다 이거죠.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이니 화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제가끔 가지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다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이 소립니다. ‘근데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행하질 못하느냐? 왜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혔느냐.’ 이런 거죠. 그래서 은산철벽같이 막힌 거를 정으로다가 뚫기 위해서 오직 그 자리만 뚫으라고 했단 말입니다. 방편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오직 들이고 내는 자리도 그 자리고, 정수에 입력돼서 나오는 자리도 그 자리고, 통신이 되는 자리도 그 자리다 이겁니다. 우주하고 직결된 자리도 그 자리고 만물만생하고 가설이 된 자리도 그 자리니 그 자리에서만이 여러분을 리드할 수 있고 보디가드가 돼 줄 수도 있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타결할 수도 있고 또 자기가 이렇게 있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게 다 그 자리입니다. 위로 부모 조상들을 잘 이끌어 주는 것도 그 자리요, 자식들을 잘 이끌어 가게 하는 것도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각자 여러분한테 보배가 제가끔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일체를 그 자리에 내려놓으십시오.

모진 세파를 견뎌내려면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그러나 올 한 해에는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적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작게 우리나라의 문제만 해도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와 총선, 이라크 파병, 수도 이전 등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이 밝은 새해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저희들이 이러한 모진 세파에 주장심을 잃지 않고 내면을 일깨우는 마음공부를 흔들림 없이 해 나가려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는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가 공한 줄 알고 네가 공한 섭류를 안다면 모든 게 여여하니라. 그리고 공했느니라. 공한 거를 안다면 고통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세세생생에 자유를 얻게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하늘이 무너진다면 하늘이 무너져서 죽는 것만 알지 내 주처가 그 무너지는 하늘도 받칠 수 있다는 도리는 모르거든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무서워서 벌벌 기고 피하지 내가 받칠 수 있다는 거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가 받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 한 사람이 받쳐서 여러 사람이 다 살게 되고 깔려 죽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까지 피하니까 하늘은 무너지게 돼 있죠.
가정에서 살아나가는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밝아지고 이루어지고 그러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내 마음이 부정스럽고 내 마음이 두렵고 내 마음이 물러서니까 안되는 거죠. ‘나는 그렇게 못해.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하고 벌써 마음으로 물러서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무의 법이란, 무의 공법이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는 까닭에 생각으로 된다 안 된다 할 것이 아닙니다. 온갖 것을 따져서 ‘이거는 될 수 있겠다’ 하는 것이나 ‘이거는 될 수 없겠다’ 하는 것이나 둘 다 아닙니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밀고 넘어가는 믿음과 그 패기! 그것이 바로 자기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수없이 체험을 통해서 실천을 해 봤습니다. 내가 해 보지 않고는 여러분한테 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거짓을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사실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극난에 처해 있을 때 주인공만은 꼭 할 수 있다고 정말 믿음이 가서 내맡길 수가 있다면, 자꾸 생각이 나고 그래도 또 맡기면서 의젓하고 그냥 태연하다면 그건 가차없이 해결이 나는 겁니다. 가차없이 해결이 나는 이유는 여러분 몸속에 있는 생명들의 의식들이 자기 마음에 따라서 다 움죽거리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의식들이 보살 역할을 하는 거죠. 용도에 따라서 그 모습으로 들어가 조절을 해서 한마음으로 귀합을 시키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한테 항상 그런 말을 합니다. 가정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일이 성사되지 않고 딴 일이 벌어졌을 때 주인공에다 맡겨라.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돼 준다. 관세음보살 이름을 찾는다고 관세음보살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거든요. 또 몸이 아팠을 때 거기다 맡기면 약사보살이 되구요.
그러니 한 뿌리 안에서 온 가지가 다 나고 잎사귀가 다 생기고, 하나하나의 가지마다 꽃이 피어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이 한 뿌리인 한마음에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 만물만생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통신이 되니까, 가설이 다 돼 있으니까 한생각을 하면 나온다 이겁니다. 털구멍과 같아요. 털구멍 티끌과 같아요. 거기에서 이 우주를 덮고도 남는다고 그랬어요.
그러니 거기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 한생각 끝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한생각 중심에서, 하나에서 나오는데 나오는 대로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물에서 사건이 있다면 주해신이 돼 줄 것이고 관세음보살이 돼 줄 것이고, 명이 짧으면 칠성부처도 돼 줄 것이고 좋은 데로 못 가면 지장보살도 돼 줄 것이고, 산에 올라갈 건이 있다면 주산신이 돼 줄 것이고…. 이 모두가 한 군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름만 각각 부르면 어떡합니까? 한 군데만 찾아서 다 그냥 차근차근히 차례차례 나오는 대로 자기의 용도에 맞추면 될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99% 부처인데 1%가 막이 막혔어요. 왜냐? 정신계 물질계가 콤비가 돼서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정신계는 생각도 안 하고 자기 물질인 자동차가 자기라고 하거든요. 자동차하고 자동차 운전수하고 콤비가 돼야 될 텐데 몸뚱이가 자기라는 거예요. 그리고 꽃나무가 뿌리와 자기 싹이 콤비가 돼서 자기라고 그래야 될 텐데 뿌리는 빼놓고 싹이 자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나가는 데 얼마나 걸림이 많겠습니까? 싹과 뿌리가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야 걸림이 없을 텐데 항상 뿌리는 빼놓고 싹이 자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죠?
그래서 전자에 부처님께선 “너희들 깊고 깊은 마음속에 바로 참나가 있으며, 참나가 너의 몸을 형성시켜서 시자로 끌고 다니느니라.” 하셨습니다. 시자로 끌고 다닌다면 몸뚱이는 항상 심부름을 해야 되죠. 몸뚱이가 없으면 상대에게 보이지 않아서 무효가 되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형성시키는 거죠. 속에서는 자기가 하고 있고 겉에서는 그걸 따라서 심부름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왜 몸뚱이를 자기라고 합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몸뚱이가 자동차라면 그 자동차를 이끌고 다니는 운전수가 참자기일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배부르게 해 줄 수도 없고 깨닫게 해 줄 수도 없고, 똥 눠 줄 수도 없고 밥 먹어 줄 수도 없고, 아파 줄 수도 없고 죽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뿐 아니라 부모자식지간에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 가정에서 한 식구만 다니면서 배우면 되지, 뭐.”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게 아니죠. 각자 자기가 일어설 줄 알아야 하고 자기가 볼 줄 알아야 하고, 자기가 뜻을 행할 줄 알아야 하고 둘 아닌 줄 알아야 하고 벗어날 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부처님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들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를 가르쳐 줄래도 대신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가 없느니라. 나를 따르기는 하되 믿지는 말라. 믿는 것은 네 불성, 네 뿌리를 믿고, 따르는 것은 이끄는 사람의 말과 뜻과 행이 어떤가를 보고 따르라.” 심성 해탈이 있는가 하면 학문 해탈이 있습니다. 학문으로 경전을 외로도 읽고 바로도 읽고 거꾸로도 읽고, 아무리 그렇게 해탈에 이르기까지 밝게 말로 알아도 그건 말로써 떨어지는 거지 법이 되진 않습니다. 그래서 실천이 되질 않죠. 심성 해탈이라야만이 말은 못해도 실천은 할 수 있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아무리 이것이 틀리다 저것이 틀리다, 이것이 맞고 저것이 안 맞다 이러면서 마음으로 이해타산을 하고 산란하게 해 봤던들 한 공기주머니 안에서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고 구더기 모양으로 살고 있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그렇게 살면서도 그래도 싸울 생각이 납니까, 모두? 어쩌다가 형성돼서 어쩌다 한 철 나는데, 한 철 동안에 세세생생을 벗어나려고는 아니 하고 오히려 더 누적을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정수의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잔뜩 돼 가지고는 현실에 아주 살지 못하리만큼 아픈 타격을 받게 모두 만들어 놓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 한번 잘 쓰는 데, 마음 한번 잘 먹는 데 얼마나 넓어지고 둥글어지고 지혜가 생기고 물리가 터지며, 위로는 조상들이 건져지고 아래로는 자식들이 영원토록 건져지고 세상이 달라지는데 이것이 작은 일이겠습니까? 돈을 하늘만큼 다 주고 팔라고 그래도 못 파는 공부입니다. 다 준다 해도 그거는 팔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물질 가지고는 얻지 못하는 도리입니다.

불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이번에 처음으로 수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계첩을 보니 불명이 나와 있더군요. 불명은 어떻게 이름 지어지는 건지 궁금합니다. 불명에 담긴 뜻이 현재 나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있어 부족한 점을 앞으로 더 공부해서 채우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계를 받았으면 실천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보시를 할 때도 무주상 보시로 해야지 내가 준다는 생각으로 한다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보시를 하는 것도 공심으로써 모든 생명을 나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을 괴롭히지 말라. 남을 섭섭하게 하지 말라. 남을 아프게 하지 말라. 더도 덜도 하지 말고 나와 같이만 생각하라.’ 이런 것을 실천하는 데 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뭘로 받았든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진실이며 참답게 계를 지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글자 풀이로만 지은 건 아닙니다. 각자 마음의 뿌리와 더불어 결부가 돼서 지었기 때문에 일체제불의 마음과 한마음으로써 결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또 그 이름을 안 받았더라도, 오계를 안 받았더라도 우리가 본래부터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대로 하고 나가시는 분들은 그걸 안 받았어도 받은 거 이상 가게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받는 게 더 낫죠. 여러 눈 아닌 눈, 손 아닌 손, 귀 아닌 귀, 몸 아닌 몸이 한데 어우러져서 향을 피워 드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수계를 받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몸뚱이가 나오기 이전에 업보 있던 거와 어머니 아버지의 그 습의 인과에 의해서, 업보에 따라서 모든 업보의 삼분지일은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삼분지일은 없어지되 수계를 받는 분들의 마음이 수계를 받을 때의 마음처럼 지극하게 마음을 잘 쓰고 오로지 내 자아부처, 주인공을 진정으로 믿고 거기다 맡기면서 모든 것은 거기서 한다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믿을 때 다 없앨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생 한 철 살다가 또 한 철 모습을 없앱니다. 그리고 또 그 모습이 다시 진화하고 변화해서 다시 형성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잘하면 상세계로 차원이 주어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을, 생명의 모습을 타고나지 않아도 될 수 있게끔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그렇게 되려고 이 마음공부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우주간 법계와 직결이 되어 있고 이 세상과도 가설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지를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 거기에만 신경을 쓰지 마시고 계를 받을 때 들었던 마음 그대로 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200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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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