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은 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
우리는 질서 잡힌 것이 안정된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무질서’가 매우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했다. 유정, 무정의 바탕인 생명(佛性)이 형태를 받아 생명체로 탄생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처럼 서로 간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연의 무질서를 향한 움직임에 위배됨이 없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손으로 성냥개비와 성냥곽을 부딪치게 해 서로 작용하지 않게 했다면 불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생명체의 탄생은 자연계에 존재의 수를 늘려 무질서를 증가시킨다. 그런데 생명체 자체는 매우 질서가 잡힌 모양이라면 이것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우선 열역학 법칙 중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보자. 에너지는 절대 만들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다. 비록 에너지의 형태는 변하지만 그 양은 항상 일정하다.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반야심경>의 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란 표현이 부처님의 연기(緣起)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말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이 생겨날 수 없고, 또 있던 것이 제로(zero)로 완전히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성냥을 들어 불을 만드는 사람의 손, 즉 생명이 물질의 껍질을 지녀 생명체라는 모습이 되는 데는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에 있어 손에 해당하는 것은 태양 에너지다. 태양 에너지에 의해 상호작용을 시작해 만들어진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생명체의 몸은 매우 불안정한 그 질서 잡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먹고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라는 ‘질서’는 자연에 순응해, 안정된 ‘무질서’ 상태로 변할 것이다.
우리 몸이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음식물이란 형태(질서)를 분해해 무질서한 상태로 만들면서, 음식물을 유지하던 에너지를 빌려와 우리 몸의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자연계에게 생물체의 이런 방식은 전혀 낯설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음식이라는 질서는 생체 내에서 분해 되어 무질서도가 증가하고, 이 과정 중에 뜨거운 물이 식듯이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모양을 바꿔 안정된 곳으로 흐른다. 이는 잠시 인과에 의해 우리 몸이라는 작은 연못에 머물다가 다시 때가 되면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
태어난 것은 질서이며, 이것은 반드시 안정된 무질서인 소멸을 향해 간다. 또 소멸된 것은 원인에 의해 상호 작용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증불감의 연기적 세계다. 한편, 부증불감은 닫힌 세계를 말하기에 열역학 법칙으로 설명되는 연기적 세계는 또한 닫힌 세계를 의미한다. 연기적인 것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닫힌 세계의 이야기라면 이 세계 밖은 무엇인가? 이것을 쉽게 말하기 위해서는 선사(禪師)의 등장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