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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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묘엄 스님
한국 최초의 비구니 강사

“부처님 말씀보다 더 좋은 법문이 어디 있다고 법문을 청해.”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妙嚴·사진)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한마디 툭 내뱉은 말씀이다. 하지만 잠시 후 스님은 육바라밀부터 일승법(一乘法)과 삼승법(三乘法)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초등학생 가르치듯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신다.
스님은 1931년 진주에서 출생했다. 절에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14세에 출가해 문경 대승사에서 월혜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듬해인 45년 성철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은 후 동학사에 주석하고 있던 운허 스님에게서 경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화 하나.
절살림이 곤궁해 울력이 많았던 시절. 스님은 울력 때문에 책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은 사람들이 버린 깡통을 엎어놓고 기다란 솜으로 심지를 만든 뒤 찌꺼기 촛농 모은 걸 연료삼아 주경야독했다. 다음날, 얼굴과 콧구멍이 새까맣게 변해 이를 본 도반 스님들이 산천이 떠나가도록 웃었다고 한다.
스님에겐 ‘최초’ ‘유일’이라는 단어가 붙어다닌다. 성철 스님에게 ‘유일’하게 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이자, 56년 경봉 스님에게 전강(傳講)을 받아 강사를 역임함으로써 ‘최초’의 비구니 강사가 됐다. 또한 99년 6월 국내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개원했다. 이와 관련 스님은 “비구니 강원에서 공식적으로 강사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나 이전에도 비구니 강사들이 있었다”며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스님에겐 이제 청담 스님의 딸이나 성철 스님의 제자보다는 비구니계의 대강백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일흔이 넘은 세수에도 불구하고 후학에 대한 열정은 여전해 대학교로 치면 1학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 치문반 학생들을 직접 지도한다.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스님의 평소 생각 때문이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원력’을 가지고 일생동안 하나에 전념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참선이나 경전공부, 사중살림을 하더라도 외곬으로 파고드는 것이 바로 ‘선지식’이라고 강조한다.
스님에겐 ‘밀리미터’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당신뿐 아니라 후학들에게도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애들하고 콩나물은 눌러서 키워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평소 지론”이라고 귀띔하는 봉녕사 교무 설오 스님은 “그래도 밖에서는 봉녕사 학인들이 제일 반듯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스님은 현재 봉녕사 한쪽에 준비하고 있는 ‘육화당(六和堂)’ 이라는 비구니 전문학사 건립불사가 원만하게 마무리 되길 서원하고 있다. 황량하기 그지없던 산비탈에 천 년 세월을 견디지 못한 채 쓰러져 가던 봉녕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묘엄 스님의 이 같은 ‘원력’과 ‘엄격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수원= 남동우 기자
200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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