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만법 들이고 내는 것을 다 내면의 주인공에 일임하세요
오늘도 여러분과 눈을 마주하면서 서로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을 하면 여러분이 먹을 것이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도 내가 먹고 없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가 바로 이 도린가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이러한 도리를 공부하는 데 대해서 갈등이 있거나 방황하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이건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면서, 여기는 체계가 잡혔느니 잡히지 않았느니 하고 생각들을 하고 갈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고도 생각합니다. 아주 없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허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배우는 것은 생활이 참선이요, 생활이 바로 진리요,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데 대해서는 앉았는 것도 섰는 것도, 눕는 것도 모두가 참선이 되고 좌선·와선·입선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가 잡히지 않은 듯하지만 일체 만법의 체계가 잡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여러분이 지금 행하고 나가는 거, 질서를 지키고 도의를 알고 의리를 알고 사랑을 알고, 이러한 전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참선이며, 진리를 그대로 탐구하고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고 잘못됐느니 잘됐느니 체계가 섰느니 안 섰느니 하고 그거 논의하다가, 여러분이 죽으러 가는데 지금 관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이것이 체계가 잡혔느니 안 잡혔느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고 그런 거 생각하겠습니까? 지금 죽은 세상 50%를 탐구해야 사는 세상 50%를 같이 귀합을 시켜서 내가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세세생생에 끄달림이 없이 윤회에 끄달리지 않게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참된 모습을 탐구하는 데에 지침이 될 거를 생각하면서, 지혜를 얻을 것을 약속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사람들이,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어떻게 죽은 세상에 가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죽지 않은 이상에는 죽은 세상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인공’ 하는 것을 예전에 육조(六祖)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죠. “성품이 스스로 청정함을 내 어찌 알았으리까?” 그 마음을 말하는 거죠. “마음이 스스로 갖추어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즉 물러서지 않는다 하는 것은 구족함을 말하는 거죠. “스스로 내 마음이 내고 들이는 것을” 일체 만법을 말입니다. “내고 들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주 천지가 인간의 마음에 직결돼 있어서 돌아가는 뜻을, 대천세계·중천세계·소천세계가 한꺼번에 돌아가는 이치를 다 종합한 뜻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스스로서 직결된 거를 알고, 직결된 거를 알았으면 스스로서 자유롭게 굴릴 수 있다는 얘기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팔 법륜 마크가 그렇게 생겼지 않습니까? 사유사무(四有四無), 사무사유라고 해도 되고 말입니다. 바로 일체가 인간의 마음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깨달으면 스스로서 그렇게 청정함을 알고, 스스로서 갖추어 있는 거를 알고, 스스로서 그렇게 구족함을 알고, 스스로서 참,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그 자유자재함을 자기가 알고, 스스로서 그렇게 하는 거지 누가 그것을 갖다주고 뺏어가고 이러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 공부 하는 데 대해서 그것이 다 포함된 것을 주인공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한마음이라는 부처, 부처가 없는 게 부처다 했죠. 한마음이라는 뜻은, 이것은 어떠한 대(對)가 없는 게 한마음이예요. 어떠한 그 뭐가 붙지 않는 것을 한마음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니 그 한마음의 도리는 돌아요(원을 그려 보이시며).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육체도 모두가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 상대로 인해서. 내가 아니라면 상대가 살 수 없고 상대가 아니라면 내가 살 수 없듯이, 모두가 이렇게 해서 한꺼번에 돌아가니까 그 돌아가는 찰나 생활이 한꺼번에 계합이 된 그 뜻을 주인공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 그 주인공은, 즉 말하자면 전체가 한데 합쳐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으니까 전체가 합쳐진 그것을 용광로라고도 하고 자가발전소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잘되고 못되는 거, 나중에 잘된다 못된다 이거는 개의치 말고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해라 하는 것입니다.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한다면 재생돼서 나오는 쇠는 자동적으로 스스로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놓는다고 해서 잘될까, 못될까 이런 건 걱정하지 말아야 이게 진짜 정통으로 놔지는 거죠. 내가 이렇게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해서 놓고 난 뒤에 재차 ‘아이구, 이렇게 놓는다고 저 일이 저게 될까?’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용광로에 정통으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재생돼서 나오는 거는 생각지 말고 거기 넣는 작업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넣는 작업만 한다면 바로 부설거사가 자기 앞의 일을 용도에 따라서 한 거나 같겠죠. 한 여자가 말을 못 하고 있다가 19세가 된 후 부설거사를 만나보고 입이 떨어졌다죠. “나는 입이 떨어졌으니까 당신을 놓고는 못 살아. 당신이 나하고 결혼을 안 한다면 나는 당신이 돌아서자마자 죽어버리겠다.” 하니까 부설거사는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내 앞의 일을, 사람 죽는 걸 건지지 못하고 처리를 못한다면 부처님께 누(累)가 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는 그 뜻을 어기는 일이니까 그것을 살리고 보자. 앞의 일 치우지 못하고 저 먼 데 치우려고 한다고 해서 치워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자기 소견대로 그대로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음씨, 지혜!
그 다음에 두 스님이 찾아와서 그렇게 아래로 내려다보고, 아집을 가지고 그렇게 막말을 해도 태연하고 인의롭게 마음 상치 않게 대접을 해주고 한 그 뜻, 지혜, 자비!
그 다음 셋째, 그 자비로써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에서 병에다가 물을 담아서 주욱 달아놓고서 “하나하나 깨트려 보게!” 했던 거. 깨트려 보니까 두 스님은 물과 병이 전부 다 그냥 떨어져서 깨졌고, 부설거사가 친 거는 병만 깨져서 떨어지고 물은 응고돼서 그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는 얘기죠. 그러니 그것을 보고 잘못됐다고 할 때에 그 두 스님은 참 “오만과 자만,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이론에만 끄달려서, 큰스님한테 돌아다니면서 공부했다는 그 아집만 가졌으니 용서하십시오.” 하고서 다시 일어나서 몸을 조아리고 절을 했으니, 보잘것없는 나무꾼같이 생긴 그 부설거사한테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우리 몸뚱이는 저 병 껍데기와 같고 그 대롱대롱 매달린 응고된 물은 바로 우리의 성품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 성품은 변하지 않고 끄달림이 없고 여여하다고 했죠.
그래서 그 두 분 스님은 부설거사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을 하고 제자가 됐듯이, 그 마음 가짐가짐이 어느 누구든지 깔보지 않고, 하다못해 생각이 없든지 있든지, 목석이든지 목석이 아니든지, 돌이든 꽃나무든 죽어가는 나무든, 병신이든 병신이 아니든, 똑똑하든 똑똑하지 않든 누구를 막론해 놓고 웃으면서 대해줄 수 있는 그 아량과 지혜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내가 못 배웠을 때 내 모습이요, 내가 수억겁 광년을 거쳐올 때 저런 모습을 하고 거쳐왔지 않나, 바로 나인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 바로 그 모든 것에서 몰락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표현을 했습니다. 아주 높은 산꼭대기, 제일 높은 데를 올라가는데 무엇을 자꾸 짊어지고 갈 바가 뭐 있습니까? 자꾸 놓고 가야지 사람 하나 몸뚱이 올라가는 것도 무거운데 어떻게 자꾸 생기는 대로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니 올라갈 때는 다 놓고 올라가라 이겁니다. 조금만 뭐이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게 있고 이러면 그냥 자만하고, 또 나쁜 게 보이고 좋은 게 보이고, 미운 게 보이고 또 이쁜 게 보이고 이걸 일일이 욕심내고, 그 아집을 가지고 나라는 조건에서 영 한 발짝도 떼놓지 못한다면 거기, 자기가 갈 수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 짐도 무거우니까, 이 몸도 공(空)해서 이것도 놓고 지금 터벅터벅 가는 바 없이 가고 있는데 자꾸 짊어질 게 뭐 있느냐는 얘깁니다.
다 놓고 가다 보면은 맨 상봉(上峰)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둘러보니까 모두 그 위에서 내려다 보이더라 이겁니다. 전체를 볼 때하고 조그만 개별적인 거 볼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보이더라 이거예요. 전체가 보이는 걸 보니까 ‘아이구, 저기서 일어나는 것이 여기로 인해서 일어나고 저기로 인해서 여기서 일어나고 이렇게 되니깐,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눌러지고 이쪽이 이렇게 자꾸 일어나니까 어떤 거를 손을 댈 게 없더라.’ 이렇게 되죠.
그래서 잘못하고 잘하고 그것이 없더라는 얘기죠. 그리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무(無)의 세계, 유(有)의 세계를 다 합쳐서 보니까 그렇더라는 얘기죠. 또 동 서가 둘이 아니고 남자 여자가 둘이 아니고, 대승 소승이 둘이 아니요, 어려운 사람 부자 사람 이것이 둘이 아니요, 권세 없는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과 둘이 아니요, 항상 뒤바꿔지더라 이거예요. 돌아가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내려올 때는 다 주워모아서 담아도 담긴 사이가 없더라. 담긴 사이가 없으니 내려와서는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내놔지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여러분이 이 도리를 배우는 데는 천금 만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우니 지금 인연에 따라서 이렇게 배우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 익히고, 자기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과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라는 얘기죠.
우리가 아무리 남의 책을 보고 남의 말을 듣고 지식적으로 머리에 넣어서 그거를 때에 따라서 얘길 하고 쓴다 해도 그거는 헛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경을 본다 하더라도 백지를 볼 줄 알아야 글을 볼 수가 있고 글을 볼 수 있어야 만법의 근원이 지혜롭게 그 한 글자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런 말이죠. 그래 여북하면 ‘백’은 전체를 말하고 ‘지’는 지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까. 글은 우리가 지금 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다 좋다 하는 거를 모른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하여튼 망상이라는 것도 놓고, 우정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마음도 놓고 꾸준히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갖추어가지고 있으니까,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사생결단을 하고 ‘이놈의 게 왜 안되나?’ 모질음을 쓰고 ‘이게 이렇게 놓으면 된다는데 왜 안 되나?’ 이러면 이거는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지네가 가다가 “아이고, 다리가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저렇게 가나?” 하니까, 딱 서서 못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못 갑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탈을 합니까? 그렇게 성실하게 일러드려도 놓지 못하고 놨다 하더라도 또 생각을 할 때는 ‘아이고, 이거 또….’ 하고 방방방방 뛰고, 그렇게 뛸 때 또 놓으라고 하니까 ‘아이구,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놨는데도 안된다.’ 이거죠. 안된다는 생각까지도 놔야 될 텐데 그걸 놓지 못한다는 얘기죠.
그래 여러분 중에서 어떤 사람은 “아이, 그거 뭐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하늘이 무너져서 짜부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그냥 아이, 뭐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죽으면 죽는 대로 살죠.” 이러는데 그 사람은 아주 살게 돼서 괜찮고 아, 이건 살려고 바둥바둥하고 ‘왜 놓는데도, 그렇게 맡기는데도 안 되느냐. 주인공 살려주시오.’ 이러면 오히려 안된단 말이죠. 그거는 어리석은 행이 아니냐 이겁니다. 해달라면 벌써 둘이 되는 거예요. 해달라긴 누구더러 해달랍니까? 내 마음이 안되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누구더러 해달라 하는 겁니까? 그래 아까 얘기하듯 내 마음이 스스로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일체 만법을 갖추어가지고 있다는 걸 어찌 알았으리까? 내가 있기 때문에 구족한 걸 어찌 알았으리까? 내가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능히 말입니다. 이것이 스스로서 자기 것이 돼서 스스로 당당하고 여여하게 이렇게 퍼내서 쓸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부처님이 가르치시기를 말입니다. 이렇게 목마른데 어느 누구가 물을 ‘먹지 마라.’ 하는 사람 있습디까? 내가 목마르면 먹을 수 있게끔 하고 마음을 내서 육체를 움죽거리게 하고, 발을 떼어놓게 하고…,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갖추어져 있는데, 깨우쳤다 깨우치지 못했다 하기 이전에, 목말라서 물 마시는데 누구가 마시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구족합니까, 이게. 여여하고 말입니다. 갖추어 가지고 있고.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스스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러분이 왜, 어려워서 나는 못 한다 이런 말을 합니까? 해보지도 않고 느껴보지도 않고. 그러고 욕심이 앞서서, 나라는 조건이 앞서서, 애착이 앞서서 말입니다.
요새는 값싼 사랑들을 하기 때문에 울고 짜고 모두 그러는데 값싼 사랑을 해서 값싼 눈물을 흘리지 말라 이겁니다. 한 눈물을 흘릴 때도 한 방울의 눈물이 온 바다를 이룰 수 있고, 온 바다를 한 눈물 방울로 채울 수 있는 그런 지혜를 얻어서 여러분이 살 수 있게끔 한다면 자유자재권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우주 천지에서 여러분한테 열쇠를 맡길 것입니다. 그건 누가 주는 거냐? 그런 게 있죠. 그거에 대해서 이따 얘기하고, 여러분이 질문을 해보십시오.
▲질문자1: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탐욕심 이런 것들이 제 자신을 위한 게 아니고, 가령 불법이 이렇게 중생 구제를 위해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해보고자 하는 욕심이었다면 그것도 버려야 됩니까?
▲스님: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는 거는 물을 먹으면서도 함이 없이 먹었습니다. 먹은 사이가 없이 먹었고 말을 했어도 하는 사이가 없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남에게 이런 물건을 (손수건을 들어 보이시며) 하나 줬더라도 내가 줬다는 생각 없이 그냥, 그냥 주고 갈 뿐이고 걸어갈 뿐입니다. 살 뿐입니다. 그렇게요. 그냥 주면 줬지 자기가 줬다는 생각은 없어야 하겠죠? 왜냐? 자기도 공(空)했으니까.
내가 어저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내를 만나서 뽀뽀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탁 들어오더니 “아빠!” 그러거든. 그러니깐 아내를 비켜놓곤 어린애를 번쩍 안아서 “그래, 아빠다.” 하고선 “어디가서 놀다 왔니?” 하고선 말을 하는데 저 안에서 말입니다. “아범아!” 그러고 또 부르거든요. 어린애를 탁 내려놓고 또 어머니한테로 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을 만났었는데 그때마다 똑같진 않았죠? 하나는 남편이 됐었고, 하나는 아버지가 됐었고, 하나는 아들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공(空)했다는 얘깁니다. 모두 일체 사는 게 공했어요. 찰나 생활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공한 그릇이에요, 공한 그릇. 그러니 여러분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다 당신 내면의 주인공에 일임하라. 그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기를 내세우는 게 아닌 한마음의 도리로서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했다 네가 했다 하지 마시고 그대로 여여하게 하시면서 놓아라 안 놓아라 하는 이런 것도 놓으십시오. 그 생각을 전체 놓으시고 그대로 하세요. 자주자주 나오시면서 여기 여러분이 하는 이야기도 거름삼아 들으시고요.
▲질문자2: 저는 『한마음』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큰스님의 그 높으신 법문을 듣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지난 5월 14일날 아들을 낳았습니다. 낳았을 때는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한 달이 지난 뒤 애가 굉장히 놀라고 많이 심기가 불편해 가지고 사경을 헤매는 정도였습니다.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다녀봤습니다. 병명이 뇌성마비입니다. 그런데 뇌성마비도 좋습니다. 제 인(因)으로 인해서 자식이 받은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의 마음이 항상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스님: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죠. 금은 금대로 놓고, 또 쇠는 쇠대로 놓고, 은은 은대로 놓는다고요. 사과는 사과대로 놓고 이렇게 끼리끼리들 모두 모아놓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인(因)으로 인해서 현재의 과(果)로 엮어진 겁니다. 보는 사람도 그런 죄, 또는 그렇게 당하는 사람도 죄인 것입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하고 그 당하는 사람하고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부딪치는 거는 깡통이기 때문에 부딪칩니다, 둘이 아니게. 끼리끼리 그렇게 은연중에 인과로 인해서 모이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그런 인과응보를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겠느냐?
일체의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놔라, 이 우주 천하에 직결돼 있는 근본이 모두 사람의 마음에 직결돼 있는 것을 알고 그 직결돼 있는 주인공을 믿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맡겨놔라. 이 병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인과응보로 나온 거니까, 인과응보로 나온 데다가 다시 놓아라. 바로 네게서 그렇게 나온 거니까,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네가 고쳐라 하는 것을 믿고 거기에 놔라 이겁니다. 너만이 고칠 수가 있다. 주인공에서 나온 거니까 주인공에서 고쳐라 이거죠.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가 오다가 엎어졌으면 자기가 일어나서 오겠지.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누가 주고 뺏어가는 게 아닙니다. 당신네들이 지어놓은 거니까 당신네들이 풀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 되놓는다면 바로 화(化)합니다. 물도 가스가 되듯이 화해버려요. 그러면 그 마음, 인과응보를 졌던 그 업이 그냥 송두리째 무너져버립니다.
그래 다시 보살로서 재생이 되니까 그때야, 억울하고 누명 쓰고 또 업보가 많고 자기가 저지른 많은 일들의 인과응보가 다 스러지게 되고, 그러면 이 몸뚱이 속에, 대뇌 속에, 이런 모든 생명들이 그때서야 활개를 펴고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잘 공급을 해주고 잘 회전을 하기 때문에 병 증세가 낫는다 이런 겁니다. 이건 이론이 아닙니다. 실천입니다. 실천궁행하는 데 우리가 참, 노력을 해서 체험하고, 체험하면서 우리는 믿게 되고 진실하게 되고 ‘아, 이런 거로구나.’ 그럼 일체 만법, 적으나 크든지 용도에 따라서 내가 다 이렇게 여기서 나오는 거로구나. 내가 있기 때문에 태초요, 내가 나왔기 때문에 태초야. 내가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화두예요. 여러분이 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화두지 여러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공부 하는 데 어떠한 아쉬움이 있고 어떠한 못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 못났을 때, 나 못 배웠을 때, 나 가난했을 때, 나 병신이었을 때, 내가 미생물이었을 때 바로 내 모습으로 보시라 이겁니다. 그런다면 그 병 증세가 다 없어지고도 남음이 있어요. 모든 거를 주인공이, 모두 결집된 주인공만이 바로 내 자식을 고칠 수 있다 이겁니다.
저 뉴욕의 어딘가 그 이름도 잊어버렸습니다마는 산호세 갔을 때도 그렇고, 댁에처럼 뇌성마비로다가 그런 건이 생겨가지고 수술을 한다고 야단이 났었어요. 그런데 애가 뭐 정신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예요. 그런 문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엄마 아빠가 너무나 정성이 지극하고, 외삼촌도 또 거기서 사는데 그렇게 정성이 지극했어요. 지난번에 데리고 왔는데 보니까 지금은 아주 출중한 어린애가 됐어요. 그건 누가 그렇게 했느냐? 그런 마음을 내주는 것도 스님이지마는 그 마음이 서로 계합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방통 안에서도 내 한마음이 밝으면 여러 사람들이 다 밝게 앉았어요. 밝게 살 수 있어요. 한 가정에 한 사람만 이런 도리를 깨우치고 나간다면은 그 가정을 다 이끌어가지고 갈 수 있어요, 지혜가 있다면. 다 밝게 살 수 있는 거예요. 불 하나만 켜면 항상 밝으니까 남도 밝게 살 수 있지 않아요? 그래서 화목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잘 이끌어진다는 얘기죠. 우리는 이론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실천궁행해라 이겁니다.
질문할 분 없습니까? 그러면 아까 얘기하던 거 마저 얘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50%가 결집돼서 현상세계에서 사는데 모든 게 악화되고 병고액난이나 가난이나 그것이 성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느냐? 우리가 우주의 법계와 더불어 같이 이렇게 상응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 마음들이, 우리 여기에 다니는 분들이 소승이니 대승이니, 체계가 없느니 있느니 이러한 혼란에 빠져서 자꾸 놓지 못하고 그렇게 망상에 끄달리지 마시고 전부 이 마음 주인공에 모든 것을, 그러니까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하신다면, 또 작업을 하시되 안 되는 것도 한 찰나고 되는 것도 한 찰나입니다. 그러니까 되는 것은 감사하게 맡겨놓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도 찰나인데 되게끔 하는 것도 거기밖에 더 있나?’ 하고, 병을 앓더라도 ‘거기서밖에는 병을 낫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놓을 수 있고, 가난이 와도 ‘거기서밖에는 부유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해나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 우리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자유권을 가지고 여러분은 자유자재할 수 있으며, 우리는 부처 중생이 따로 없이 자기 몸 안에 있는 중생들부터 다 진화시킬 수 있는 그런 문제가 다 생기죠.
그러니 우리 한마음 도리, 물러터지고 아무 특별한 것도 없다 하지만은 남이 이러든 저러든 내버려둡시다. 그저, 알고도 놓고 모르고도 놓고, 이렇게 사십시오. 한 찰나의 뜬구름처럼, 우리는 한 조각의 구름과 같은 겁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병이 깨지면 그 응고된 물은 항상 흐르고 녹았다 흘렀다 하고 그렇게 여여한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면 여러분이 또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항상 지수화풍에 고맙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우리는 고맙지 않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질문할 분이 안 계신다면 요다음에 하도록 하고요. 알든 모르든 그걸 제껴놓고, 모든 것을 놓으라고 그러시는데 내가 질문할 게 뭐 있나 이런 것이 아니라 알면 아는 것도 떡그릇인 줄 번연히 알면서 떡그릇에 엎드러진다, 돌다리도 한 번 두드려봐가면서 간다, 남들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해본다, 이런 것도 있죠. 그러니 함이 없이 우리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전력이 오고 감이 없이 와서 불을 켜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설된 줄이나 저런 거는 다 볼 수 있을지언정 전력이 오고 가는 거는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이 오고 가는 건 못 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서 지혜롭게 참 마음의 자비를 그대로 중용하셔서 실천으로 궁행하시도록 하십시오. 오늘은 이걸로써 끝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4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