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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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용 스님 (下)
법회 형식 파괴한 포교의 달인

자용 스님(국제불광회세계총회 비서장·사진)은 귀국 후 배운 것을 십분 활용하여 양로원인 불광정사와 대자육유원(大慈育幼院)을 관리했으며 자선당(慈善堂) 당주를 역임했다. 말하자면 불광산에서 가장 먼저 복지사업에 손을 대고 그 기초를 닦은 이가 스님이었다. 1983년에는 이러한 업적 때문에 대만 정부에서 수여하는 사회공헌자(全國好人好事) 대표로 뽑혔으며, 3년 연속 타이페이 지방법원의 소년법정명예감호인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이른바 ‘불법은 세간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으로서, 불법을 체(體)로 하고 세간법을 용(用)으로 하는 성운 대사의 ‘인간불교(人間佛敎)’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자용 스님은 20여 년간의 사회복지에 대한 현장 경험에서 남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즉, 어려운 사람에게 단지 물질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손님 앞에서 철없이 떼를 쓸 때 돈 몇 푼 쥐어주고 사탕이나 사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아이를 잘 타일러 그러한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깨우쳐 주는 것처럼, 복지도 물질적인 지원과 함께 불법의 이치를 배워 욕망을 억제하고 건전한 생활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복지사업 이외에도 자용스님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타이페이 보문사(普門寺)에서 보여준 10여년 간의 주지 생활이었다. 대만의 남부 까오슝에서 불광사가 개창된 이래 성운 대사는 수도 타이페이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므로 이곳의 포교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도량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보문사의 건립에는 자장 스님과 자용 스님의 역할이 지대했는데, 자장 스님이 도량건설 등의 하드웨어를 담당했다면 자용 스님은 보문사의 포교 활성화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보문사에서는 한달에 70여 회의 법회를 개최했으며, 여기에 경조사에 따른 법회까지 합치면 하루에도 수 차례의 행사를 가졌다는 얘기가 된다. 다양한 계층의 신도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법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용 스님이 창안한 다양한 법회양식은 불교계의 귀감이 되어 불광산 이외의 많은 사찰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대만 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보문사에서 주위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채식을 무상제공하면서 그들을 결국 보문사의 신도로 만든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불교계의 역량을 결집하여 사회에 더욱 이바지하고자 성운대사에 의하여 주창된 ‘국제불광회’도 오늘의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까지에는 자용 스님과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힘이 컸다. 1991년 2월 중화불광협회가 타이페이 국부기념관에서 발족한 이후 1년 뒤인 1992년에는 전 세계의 불광산 신도대표들이 모여 국제불광회총회를 미국의 서래사에서 거행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용 스님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자용 스님은 사회 활동에 대해서도 매우 창의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면, 불교의 5계를 일상 생활상의 7계로 전환하여 사회에 보급했다. 이 때에도 딱딱한 법문이나 훈계를 통해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 스타들이나 사회에 알려진 인물들을 동원하여 매스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널리 보도되도록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천편일률적인 법회형식을 탈피하고 각종 공연이나 야유회, 바자회 등을 곁들여 자연스럽게 불법이 홍포되도록 함으로써 불광산의 신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다.
김재경 기자
200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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