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풍광이 빚어낸 ‘텅빈 충만’
갑신년 첫 햇살이 소백산 자락 황매산(黃梅山 1,108m) 암봉의 이마를 때리자, 잔잔하던 합천호의 수면은 일순 금빛 비늘로 흔들린다. 수심에 잠긴 영산(靈山)의 그림자는 소문처럼 매화꽃으로 벙글려는 듯 사방에 서기가 느껴진다. 새해의 첫 나들이를 덕담, 법어 요란한 절집으로 향하지 않고 굳이 폐사지로 향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 해는 좀 더 비장한 다짐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였다. 그것도 합천 땅 영암사지(靈岩寺址 사적 131호)를 찾는 것은 영암사지야말로, 신령한 힘과 기상이 분출하는 황매화 같은 전국 최고의 폐사지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와 자연은 유물로, 골동품으로 등급을 매겨야 올바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주초로, 장대석으로 다시 다듬어 써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청솔 우거진 빈 절터에 아직도 으스러질 듯 여의주를 깨물고 있는 돌거묵의 얼굴에서 이 땅의 진정한 미래가 있음을 본다.
영암사지는 ‘잊혀진 가람탐험’을 시작한 이래 수시로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대표적 폐사지이다. 유홍준 선생이 ‘답사 여행의 비장처(秘藏處)로 가장 먼저 손꼽는다’고 극찬한 영암사지를 나는 전국의 폐사지 대부분을 일별한 뒤에야 찾게 되었다. 늘상 가는 시중의 단골집을 찾는다면 모르되, 오랫동안 사모하던 성지를 찾아가는 일을 택일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폐사지 답사도 격식이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폐사지를 찾아 만행하는 폐사지 신도들의 덕목이고, 법도이다. 맑고 부신 겨울햇살이 합천호변에 도열한 벚나무 가로수들의 마른 가지를 쓰다듬는 날, 어디 치성 드리러 가는 촌부(村婦)처럼 잰 걸음으로 폐사지 답사의 원찰과도 같은 영암사지, 거기 주석하는 그 무등상불(無等像佛)을 친견하러 달려갔다.
영암사지는 이름 그대로 참으로 빼어난 폐사지이다. 폐사지 답사 여행의 절정을 나 또한 여기에서 맞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 대단한 사역은 아니지만 군립공원 황매산의 장쾌하게 솟은 세 암봉을 배산으로 한 절터의 입지는 참으로 절묘하고 미려하다. 비록 무너진 옛 가람 터이기는 하나 어느 한곳 빈틈이 없다. 텅 빈 충만, 그것이다. 군데군데 복원의 어설픈 손길을 탓으나,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 있고, 남을 자리에 남을 것이 남아있다.
성급히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앞이나 삼층석탑(보물 제480호)으로 달려가기보다 마음을 다스려 절 터 한 켠에 움크리고 있는 시든 불두화 한포기를 만나 볼 일이다. 여름 내 사발 같던 새하얀 꽃숭어리들이 찬 서리에 좌탈입망한듯 말라붙어 있다. 불두화는 열매를 남기지 않는다. 불도에 정진하는 고승처럼 세상에 인연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것이다.
영암사터는 동서 일직선상으로 쌓은 3단의 석축 위에 탑과 석등, 금당이 차례대로 놓인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선종의 사찰로 추정된다. 1984년 발굴작업에서 하대 신라와 고려시기의 각종기와들이 출토되었으나, 명문을 밝힐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8세경의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것과, 남아있는 석점의 보물급 유물들이 9세기경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것이어서, 이 무렵 이 지역 호족의 발원으로 창건되어 고려 현종 때 적연국사(寂然國師 932~1014)가 주석할 만큼 명성을 날렸으나, 조선 초 폐사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영암사지 탐험은 정교하게 쌓아올린 석축과 석축 위의 석조물들, 그리고 동편 조사당 터 암수 2개의 귀부(보물 제489호)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인근 가야산 자락의 법수사지 석축이 성곽처럼 그 위용이 장대하다면 영암사지 석축은 정교하고 아름답다. 사각으로 다듬은 돌들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팔뚝돌을 끼워 넣은 안목은 역학적인 것과 구조적인 면을 고려한 공법이어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1천여 년 전 신라 석공의 만만치 않은 식견과 공력을 현대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축대 아래 유구는 최근까지 해인사에서 발굴 중이었다는데, 옛 사람의 정성에 비해 그것을 파헤치는 오늘의 손길들이 거칠게만 느껴진다.
영암사지 건축에 깃든 옛사람들의 정성은 금당의 석단 4면에 돋을새김한 여덟 마리 사자, 불대좌 기초석의 팔부중상, 금당 계단 소맷돌의 가르빙가 조각상 등 절 터 구석구석 어느 한곳 빼 놓을 곳이 없다. 어쩌면 옛사람들은 이렇게도 섬세하고 감미로운 삶을 살았는가. 세월이 흘렀어도 좀처럼 무르지 않는 그 손 맵시는 차라리 그립다 못해 서글프게 느껴진다. 쌍사자 석등 옆으로 난 돌 계단은 또 어떤가. 통돌을 무지개 모양의 호(弧)로 깎아 발뒤꿈치가 들리도록 오르게 한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세들에게 건네는 선조들의 여유요, 짓궂은 농 같기도 하다.
통일신라 3층석탑의 정형인 제1석축의 삼층석탑과의 대면은 뒤로 미루고, 쌍자사 석등과의 법 거량을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역시 화강암 통돌을 깎아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쳐켜 올린 꼬리와 힘을 준 뒷다리는 그 입체감과 사실성이 뛰어나 생동감이 흘러 넘친다. 두 몸이 하나로 부둥켜 안고 화사석(火舍石)을 머리에 인 쌍사자의 긴장감은 가히 백옥빛 영암을 떠받치는 힘이요, 법계를 걸머진 팔부중상의 기상 그것이다. 속리산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국보 5호)과 함께 우리나라 석등 중 최고의 조형미를 갖춘 보물중의 보물이 이것이다.
금당 옆 솔 숲으로 가린 조사당 터에는 암수 한 쌍의 귀부가 있는데, 이 또한 영암사지를 영암사지답게 하는 명물인 동시에 하대 신라와 고려 전기의 성보를 대표하는 명물이다. 하나는 적연국사 비석받침이고, 하나는 창건주 스님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동쪽 거북은 긴 목을 직각으로 곧추 세우고 여의주를 으스러지게 물고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용연’을 향해 섬광을 뿜을 듯 하다. 등 뒤의 겹줄 귀갑문과 사실적인 인동덩굴 문양, 그리고 급한 경사는 강인함과 함께 율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영암사지는 그냥 폐사지가 아니라 신령한 폐사지기에 더 불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절 터 양 옆의 낡은 요사채는 지금처럼 늙고 가난한 모습이 옛 절터에 더 잘 어울린다. 욕심을 내 오른쪽 산비탈의 대적광전처럼 절터를 위압한다면 영암사지의 신비는 그 날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바위는 이끼를 거적 삼아 덮고 선정에 들어야 너럭바위의 품계에 오르는 법! 황매산 중턱 모산재의 철축들은 때되면 다시 진홍빛 갑사댕기를 머리에 두를 것이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감포 감은사지편>
영암사지 가는 길
서울에서 영암사지로 가는 길은 중부고속도로 가다가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함양분기점에서 다시 88고속도로를 이용, 합천 나들목에서 내리면 된다. 합천에서 황매산으로 가는 길은 야로2 지방도를 달려 삼가를 지나 가회면 덕촌리를 찾으면 된다. 합천에서 1026도로를 타고 황계폭포 옆을 지나 1089번 도로로 가는 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