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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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광우 스님
대사회 활동 ‘본격화’ 주역

“알려지진 않았지만 평생을 수행에 몸 바쳐 오신 어른 스님들도 많으신데…. 수행 이야기를 꺼내기엔 내가 많이 부족한거 같구만.”
지난 해 비구니회관의 건립 및 개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고 서울 삼선교 정각사로 돌아가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전 전국비구니회장 광우 스님. “그동안 너무 말이 많았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스님을 조르다시피 수행담을 청하자 자신을 낮추는 대답으로 말문을 열었다.
광우 스님은 14세에 대구사범학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상주 남장사를 찾았다. 당시 남장사 조실은 스님의 아버지인 혜봉 스님이었다. 스님이 처음으로 본 선방 스님들의 참선 모습은 스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스님은 수행하는 스님들을 몰래 훔쳐보다 혜봉 스님께 꾸중을 듣게 됐다.
“꾸중하러 오신 조실 스님께 여쭸지요, 왜 그렇게 스님들이 앉아계신가 하고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광우야’ 부르시길래 ‘예’ 대답했지요. 그러니 스님께서 ‘대답하는 그 놈이 무어냐’고 되물으시데요. 한참을 고민 끝에 모르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바로 그걸 찾고 있는 거다’고 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스님이 첫 번째로 받은 화두이자 스님을 참선으로 이끈 길이었다. 15세에 출가한 이후로 스님은 참선을 놓지 않았고 혜봉 스님, 청담 스님 등으로부터 “참선할 근기”로 인정받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미타경>, <법화경>을 비롯한 경전공부도 시작했다.
해방 후 스님은 선산 문수사의 작은 토굴에서 <선문촬요>를 사경하고 참선하는 동안 마을 청년들에게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때마침 최근 신문(현대불교 1월1일자)에 나온 문수사 기사를 발견한 스님이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문수사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스님은 포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에게 전법을 하려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을 알아야겠구나’라는 생각에 1952년 동국대 입학을 결심했다. 스님은 대학에 입학한 최초의 비구니가 됐다.
졸업 후에는 대전 복전암, 서울 보문사 서별당, 대전 세등선원 등에서 수행을 계속해오다 1958년 정각사를 설립했다.
스님은 또 1971년 뜻 맞는 비구니 스님들의 원력을 모아 전국비구니회의 전신인 ‘우담바라회’도 발족했다. 이후 지금까지 스님은 포교 뿐 아니라 비구니 위상과 총림을 발전시키는데 매진해왔다. 스님은 스트레스와 화를 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건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관세음보살의 힘, 즉 자비의 힘을 생각하면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세요. 마음속에 성냄을 담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를 ‘상(相)’ 없이 대해야 합니다.” 한상희 기자
200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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