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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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뛰어넘을 수 있어야
놔라! 놔라! 모든 게 환상이면서 실체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이라 했는데 불법 중에서도 직접 맛을 보고 벗어날 수 있는 이 마음도리를 가르쳐 주신 스님께 새해를 맞이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스님께서는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재 또한 공했기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삼세가 공한 그 가운데 2004년 갑신년 새해를 맞이해서 저희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해야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본래 우리는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금방 무슨 말을 했는데 금방 없어졌으니 벌써 과거가 됐습니다. 그래서 일 초 전도 과거인 것이죠. 어떤 분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팔자 운명이 이럴까.’ 하고 한탄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일 초 전도 과거라는 거를 알고 내가 천차만별로 공했다고 돌린다면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거든요. 움죽거리지 않는 데를 뚫고 깨뜨리려면, 그리고 내일이 있게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마음에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깨트리고, 또 나와서 이 우주의 움죽거리지 않는 데까지 결과적으로 뚫으면 그냥 자유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이름은 많습니다. ‘그 선을 넘어야 한다. 깨트려야 한다. 증득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근데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말이 무슨 소용 있느냐구요. 지금 내가 묵묵히 실천하는 게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맛보려면 그 움죽거리지 않는 것까지 치고 넘어가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덕산 스님이라는 고승이 계셨는데, 대 선사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뛰어넘게 하려고 바리떼를 들고 척 나갔더니 대중들이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왔느냐고, 종도 안 쳤는데 왜 왔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말 다 했죠, 뭐. 말이 뭐 이어지기나 해요, 어디? 시간도 안 되고 종도 안 울렸는데 왜 나왔느냐, 어청거리느냐 이 소리인데, 그러니 바리떼를 들고 나갔다가 ‘이거를 어떻게 무마를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돌아서서…. 그 다음에 한판 웃는 걸로 그걸 무마를 시켰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도 못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말후구를 알겠습니까. 자기네들이 모르는 줄 모르고 저 스님이 말후구를 모른다 이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리를 모르는, 자기 앞도 채 못 가리는 사람이 어떻게 말후구를 아느냐는 얘기죠.
참, 예전에 선사들께서는 그렇게 마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뛰어넘어 가게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갈아서 면경을 만든다고 하기도 하고 별짓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드물기는 하지만 그거를 정말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둥그렇게 그려 놓고 “여기 들어오면 넌 죽는다.” 이러니까 스르르 발로 지우고선 그냥 들어가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묘미가 있고 그렇게 허공 길을 아는 사람이라야 허공 길을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지 어떻게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그건 물어서 될 일도 아니고 또 안 물어서 될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차츰차츰 점수 행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모두 공식한다면 공생으로서 공심이 되고 공체로서 공용을 할 겁니다. 즉 말하자면 공생을 알면 공심을 알고 공심을 알면 공체도 알고 공체를 알면 바로 공용도 알고 공용을 알면 공식을 안다는 거죠. 안이비설신의 자체가 한데 합치면 원식이 됩니다. 이게 공식이죠.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닙니다. 먹는 것만 가지고 공식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내가 한데로 흡수할 수 있어야 집어 먹는 게 되겠지요. 체가 없는 거를 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고 수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두드러집니까? 그래서 마음에다가 수만 개를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다고 했던 거죠. 마음은 그렇게 무궁무진한 겁니다.
여러분이 지구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생명들이 살 수 있는 주머니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병 속에 새를 한 마리 길렀는데 병은 그대로 있고 새는 커졌으니 어떻게 그걸 꺼낼 수 있겠느냐?” 하셨다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수좌들이 그걸 꺼내지 못해서 애를 쓰고 다니다가 끝을 못 보고 그러는 사람들이 많죠. 왜 끝을 못 보겠습니까. 글쎄 자기 몸이 병 속인 줄 모르고 말입니다. 자기 마음이 새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고등 동물인 사람은 그와 같이 마음대로 마음을 쓸 수 있다,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으니 나가려면 나가고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맘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그것을 못하는 겁니다. 아, 병이야 고대로 있죠. 어떻게 병이 커지나요? 새가 커지면 자연적으로 나올 줄도 알아야죠. 이렇게 오글랑노글랑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그 병에서 새 한 마리도 못 꺼내죠.
그리고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선지식들이 방편으로 말씀해 놓으신 거,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죽였다던가, 하는 이유를 ‘이것이 무슨 뜻으로 이렇겠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해요. 또 조주 스님은 짚신짝 하나를 머리에 이고 나갔다는데 그건 어떤 이치로 그랬나 하는 것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좀 자기가 튀어나와서 자유자재할 줄을 알아야 내일도 알고 내일도 있는 거지, 그걸 자유자재 못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냥 사는 겁니다. 그걸 바꿔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아주 특별한 말인 줄 알지만 원래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돼 있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모두 복작거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내일도 없고 어저께도 없고 오늘도 없는 그 가운데 주장자도 박차야 내일이 있는 세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잘 살고 있는 줄로 알지 마세요. ‘우린 주머니 안에서 꼼짝 못하고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저 닥쳐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자유는 영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고 내일이 있는 자유를 한번 맛보시게끔 꼭 공부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내일이 없고 어저께도 없는 오늘, 이 주머니 속에서 허덕이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내일이 없고 어저께가 없는 그런 속에서 내일이 있는 세계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유인인 것입니다.

사무친 마음이어야 할 것 같은데

스님의 말씀을 믿고 늘 함께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님들의 말씀에도 행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데 스님께서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행하는 법을 정성껏 말씀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제가 무거운 짐을 주인공에 놓고 가면서 공부할 때 맘은 가볍고 편안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니까 공부하는 사람의 사무친 마음, 절절한 그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해 나가는 데 사무친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스님의 뭉둥이를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이 나오는 거를 다시 주인공 자리에다 믿고 놓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충실해야 하고, 또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충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나를 움죽거리게 하고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보게 하고, 일체 행을 하게 하는 놈이 바로 너 아냐. 너가 있다는 그 자체의 증명은 너밖엔 증명을 할 수가 없어!’ 하고 간절하게 관해야 합니다.
틀고 앉아서 좌선을 한다 하더라도, 뭐를 찾고 뭐를 찾고 뭐를 찾는다 해도 우선 자기부터 알아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누구나 자가발전소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증명이고 특징이니까 모든 것을 주인공에 돌려놓고 그 생각나기 이전을 관하세요. 통로는 거기밖에 없어요. 미래 정신세계의 통로는 바로 거기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그대로 자기 자불을 알아서 편안히 여여하게 살라고 하는 거지 아무 생각없이 어영부영 그냥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우치지 못했는데…

만일 주인공에 관하는 공부를 하면 주인공을 알기 전까지의 수행은 어떤 공덕이 있는지요. 그리고 수행의 점차와 과정이 마치 사다리처럼 누적이 돼야 어느 날 주인공을 볼 수 있는지요. 그냥 딱 뛰어넘을 수는 없는지요?

깨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고정됨이 없는 거를 안다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뜻을 알게 됩니다. 일체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면, 일체가 고정됨이 없는 것은 죽고 사는 생사의 언어가 붙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간단할 텐데도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깨닫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모든 게 나고 드는 것은 한군데서 나고 든다는 건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날까지 거기서 나갔고, 모든 사람 성품에서 일들을 하니 바깥의 일들을 바로 보는 것이 자기예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움죽거리고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누가 하라고 시켰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날 시키게 된 겁니다. 나로 인해서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거고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사람 말을 듣는 거지 그 사람만 위해서 말을 듣는게 아닙니다.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한테서 나고 들고 하는 것이 고정됨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도 했습니다. 물감 삼십 가지를 놓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물감을 이거 쓰고 저거 쓰고 그러니깐 어떤 게 진짜 물감이냐고 할 수도 없고 또 자기가 어떤 거를 쓸 때 내가 쓴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양면이 다 똑같지 않을까요? 그랬으니 공했지요. 공했으면서도 소소영영하지 않은가요? 갖다 쓸 거 다 갖다 쓰고 말입니다. 또 쓰자는 대로 그냥 주어져서 자연적으로 그냥 써지고요. 공했으면서도 소소영영하게 분홍 쓰려면 분홍 쓰고 흰 거 쓸려면 흰 거 쓰고, 자기 마음대로, 그것도 한번 휘 돌아보고 ‘어! 저런 건 푸르르게 해야겠구나.’ 이런다면 또 푸르른 걸 쓰는 거죠. 그래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면서도 그게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고, 공했기 때문에 외려 찰나찰나 자유스럽다는 얘깁니다.
본래 깨친다는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가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사용을 못하고 제대로 용(用)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을 하면서도 이거 쓸 때 요거 쓰고 요거 쓸 때 이거 쓰고 자유스럽게…. 화가가 그림 그리듯 그렇게, 상황을 봐서 환경에 따라서 요거 잘 요렇게 그렸으면 이것이 특상을 받을 텐데 나무가 파란지 나무줄기가 흙빛인지 그것도 안 보는 겁니다. 자기 멋대로 갖다 그리죠. 그래서 더불어 공해서 같이 돌고 도는 겁니다.
그렇게 뭐든지 소소영영하게 공했기 때문에 뭐든지 소소영영하게 쓸 수 있으면서 삼십 가지 물감을 그냥 거기 놔둬도 내가 쓸 때는 다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힘들게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 ‘요게 내 거다, 요게 내 거다.’ 하구선 한두 가지만 가지고 다닌다면 필요할 때 삼십 가지를 다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착을 놔라. 착을 놔도 그 삼십 가지는 네가 다 가지고 있는 거다. 시시때때로 찰나찰나 환경에 따라서 주어진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용을 하는 거고, 환경에 따라서 네가 한생각을 내는 거뿐이다. 그러니 한 가지 색에 착을 두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라.’ 하는 겁니다. 욕심 부린다고 해서 한꺼번에 그 삼십 가지를 다 쓰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모든 걸 오관을 통해서 잘 보고선 한 가지 갖다 쓰고, 그거 다 쓰고 나면 또 필요한 색깔 한 가지를 갖다 쓰고 그러는 것이에요.
우리 살림살이도 다 그렇습니다. 집안을 꾸미려 해도 그렇고 세상에 집을 지으려 해도 그렇고, 여러 가지 가지가 들어야 하고 다 지어 놓고도 삼 년을 손을 봐야 돼요. 그래야 원칙상으로 그게, 즉 말하자면 자기 마음에 거추장스럽지 않고 다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어떻게 한꺼번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깨닫는 줄 아느냐는 말입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봄이 올 때는 겨울이라는 과정이 있고 가을이 올 때는 여름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걸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안정이 된 주인이 처리하는 거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주인이 없는 데서 그냥 날라리로 처리를 하려고 하는 거하곤 전적으로 다릅니다. 여러분이 그냥 ‘주장자가 항상 그대로, 운전수는 자기 자동차 속에 있으니까 핸들을 잡고 있는 거니까 그걸 믿고 거기서 움죽거리게 해라. 그리고 너는 끌리는 대로 따라서 움죽거려라.’ 이러는 건데 그것을 소홀히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먹고 살고 병이 낫고 이러는 데만 치우쳐서 그러니깐 그게 안 되지요.
본래 헌 해도 없고 새해도 없는 거지만, 그래도 또 새해가 밝았으니 올해부터는 ‘이거는 나의 절대적인 보배다. 나의 절대적인 보디가드다. 나의 절대적인 주인이다.’ 이렇게 믿고선 ‘죽고 살고 너한테 달렸다!’ 이러고 딱 그냥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인생을 참답게 살아가려면…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카뮈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무의미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살아나가는 것 같습니다. 진정 삶이 무의미한 것인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참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요?

우리가 내세울 게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몸속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과 의식과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억겁 전으로부터 우리가 진화돼서 형성됐다는 증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몸이고요. 그 속에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까? 그런데 몸속에 있는 그 모습들 중의 하나가 만약에 큰 물체로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축소돼서 모두 여러분의 몸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인과성 업보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이 다섯 가지로 주둔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주둔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마음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로서 몸에 모두 주둔이 돼서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생각난다고 해서 생각되는 대로 ‘내 마음에서 나오지.’ 이렇게 생각은 마세요. 그거는 그 다섯 가지의 의식 속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진짜 자기의 심봉이라는 선장은 바로 불(佛)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이름이 많습니다마는 그 선장은 바로 움죽거리지 않으면서 중심에 끼워져 있는 심봉과 같은 겁니다. 수레 중심에 끼워져 있는 중심축입니다. 그걸 주장자라고도 합니다. 그 심봉은 힘을 배출해 줄 뿐이지 부동한 것인데 바퀴가 모두 거기에 의지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수레라고 본다면 부처님 자체, 근본이 그 심봉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시공이 없이 돌아간다’고 하는 뜻이 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먹는 거 싸고 자는 거,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정되게 하는 게 하나나 있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했다, 내가 들었다, 내가 망했다, 내가 잘되게 했다 하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이 소립니다.
어떤 거 하고 어떤 거 볼 때에 내가 하고 내가 봤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에서도 본다면 때에 따라서 부인에게는 남편이 되고 자식들한테는 아버지가 되고 부모에게는 아들이 되고….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어서 돌아가듯이 인생살이가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그 공마저도 공했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교라는 자체가 광대하고 어마어마해서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말로는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수없는 진화를 해 왔습니다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바로 자기 모습, 자기 차원이 주어지는 거죠. 인생이라는 것이 망망대해에 배 띄워 놓은 거와 같고, 살얼음판을 딛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구덩이에 빠질 수가 있고 물에 빠질 수가 있고, 배가 뒤집힐 수도 있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도 여러분의 몸을 배로 비유했고 몸속의 생명들을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들이 의식적으로 모두 한 심봉의 선장으로 합쳐 주지 않는다면 배는 뒤집히게 돼 있죠. 한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체 만물만생 중에 무정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뿌리 없이 사는 싹은 하나도 못 봤어요. 그렇듯이 여러분도 영원한 자기 선장의 뿌리가 있는데도 그 선장을 믿지 않고 타의에서 구한다면 백 년 만 년이 가도 자기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어떠한 마음을 쓸 때에 올바로 했느냐,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했느냐에 따라서 내 마음 자체도 천차만별로 하는 사이 없이 나갑니다. 고정됨이 없어서 하는 사이 없이 하고, 가고 오는 사이 없이 가고 오고, 보는 사이 없이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내가 했다’는 생각도, ‘내가 안 했다’는 생각도 그냥 묵묵히 놓고 가라는 겁니다.
바로 자기 몸뚱이, 생명의 집합소가 하는 게 아니라 생명 속의 그 생명을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그 주인이 합니다. 그 주인을 부처라고도 하고 자기 주인공이라고도 합니다. 타의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 자의에, 나로부터 세상은 있는 겁니다.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아라. 너를 알아야 하나로 돌아가는 이 우주의 섭류도 다 알 수 있느니라. 너를 모른다면 어떻게 남을 알 수 있으며 우주의 섭류를 알 수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이 묘하고 광대한 것을 여러분은 모르고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좋다. 일거수일투족 들어오고 나가는 거, 내고 들이는 거, 그것을 하는 놈이 누구냐? 네가 하지 않느냐. 바로 네가 한다면 네가 어떤 거 할 때 너라고 할 수 없으니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니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긴다면 일체가 무너진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과학이 발전됐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발현되지 않는 이상 진짜 실천할 수 있는 과학을 연구 못할 겁니다. 무(無)의 세계, 정신세계의 50%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학계도 그렇습니다. 50%를 모른다면 그 반만 가지고 사람을 100%로 건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 살고 있는 것도 99%지, 100%라고는 말할 수 없겠죠. 그래서 죽는 것도 건지는 거요, 살리는 것도 건지는 겁니다. 헐었던 옷을 벗어 버리게 하고 진화해서 다시 새 옷을 입게 되니까 그것도 건지는 겁니다.
건지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도 모습도 가져올 수 있고, 어느 집에 어떻게 인연이 되느냐에 따라서 바로 자기 인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이미지를 끝까지 어떻게 남기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세세생생에 주어진다고 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 주어지는 것이니까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헤매고 돌게 될지, 자유인으로 살 건지는 자기 자신에 달려있습니다, 모두.

업식 물 불의 환상에서 벗어나려면

요즘 너무도 많은 큰스님들께서 입적을 하셨습니다. 스님들의 장렬한 열반을 뵈오면 너무도 이 불법공부가 소중하고 이 공부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저 자신의 공부 수준을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스님께서 사람이 죽으면 업식이 화해서 나타나고 물을 건너가야 하고 마지막에는 불바퀴를 벗어나야 된다고 하셨는데 그럴만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요. 그리고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모든 것은 일 초 일 초 부수고 넘어가야 하고 일 초 일 초 보람 있는 살림살이를 해야 합니다. 누가 칼을 쥐고 죽이러 오는데 가만히 죽어 주는 것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정당한 게 부처님 법이에요! 에누리가 없어요. 그것이 자비거든요. 죽여도 자비요 살려도 자비요, 안되는 것도 자비요 되는 것도 자비예요. 왜? 안되는 것도 일 초에 넘어가고 되는 것도 일 초에 넘어가고요. 그러니 그걸 조절해서 용도에 따라서 내가 쓰려면 쓰는 것이지 어디 규정돼 있는 게 아닙니다. 불 켜고 싶으면 스위치를 눌러서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쓰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불구덩이는 뜨거워서 못 들어간다는 의식 관념을 가지고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관념을 가졌거든요. 귀신들이 있는 데는 무섭다는 관념을 가졌고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혼연일체가 돼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삼중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항상 환(幻)에서 살기 때문에, 의식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도 환상천이 떡 앞에 가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여러분이 지금 살면서 생각하고 있는 그 의식 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모두 환상천에서 그냥 색깔을 나타내고 온통 야단을 치니 거길 못 건너가지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는 것도 그런 뜻이 거기에 담겨 있는 거죠. 넓은 강이 있는데 거길 어떻게 건너가겠습니까? 빠져 죽을 텐데 말입니다. 만약에 이쪽 건너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간다면 한 찰나에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색상의 의식 관념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죽은 혼백도 그렇게 못 건너간다 이거예요.
또 불구덩일 건너가야만 할 텐데 불구덩이 소용돌이를 어떻게 빠져나가겠습니까? 타 죽을 텐데 말입니다. 타 죽는다는 의식 관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놔라! 놔라! 모든 게 환상이면서 실체다. 그러니 영원한 거다. 죽은 게 없기 때문에 산 것도 없고 산 게 없기 때문에 죽을 것도 없다.’ 이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고 잘 배워야 전자의 부모들이 지은 업보나 인과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거죠. 여러분이 잘해서 자기를 낳아서 길러 준 그 은혜로 지옥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위로는 묵은 빚을 갚게 되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는 거죠. 또 그렇게 하려면 아래 자손들한테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하게 먹게 해라 이거예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 상식이면서 교양이다 이겁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서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거지 이론만 알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실천을 하세요! 어떠한 악한 거라도 거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밖엔 해결 못한다고 믿으세요! 병이 나도 거기에 진실히 맡기면 그 한생각에 의해 찰나에 의사가 되는 겁니다. 또 자식들이 안 들어오고 늦게 들어와서 걱정이 되는 경우에도 탁 믿고 맡겨 놓으세요. 그것도 바로 절실하게 믿고 나가야 되는 거지 믿지 않으면 그렇게 놔지질 않아요. 그렇게 믿고 놨을 때에 “엄마!” 하고선 들어오거든요. 어디서 나쁜 무리에 들어갔다가도 집에 오고 싶어 죽겠어서 그냥 오게 되는 겁니다.
죽으면 자기 몸까지 다 버리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몇 천 년 몇 만 년 살 것같이 마음이 거기에만 온통 쏠려 가지고는 아우성을 떨다가 털컥 망하거나 뭐가 잘못되면 병까지 든다 이겁니다. 사람이 병까지 들어요. 그러면 그게 자기를 깎아 먹는 일이지 자기를 승화시키는 일은 아니거든요. 그 모든 게 마음의 탓이라 이겁니다.
근데 정작 죽어서도 업식은 그렇게 따라다닙니다. 혼백이 죽은 몸뚱일 버리고 딱 나가 보니까 자기 살았던 대로 업식이 즐비하게 쫓아다니니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죠. 또 거기에서 어찌어찌하다가 벗어났다고 봅시다. 그런데 ‘나’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시라 하는 것은 나라는 걸 빼 버려라 이겁니다. 공했다는 걸 알아라. 나라는 게 있다면 의식적으로 나를 내세우게 되고 또 그게 화해서, 죽어서 몸뚱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 몸뚱이가 있는 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을 건너가려고 강가를 돌면서 노력을 하지만 자기가 빠져 죽을까봐 건너갈 수가 있나요? 그래 강가를 돌면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보니까 오백 년도 가요, 천 년도 가요, 이렇게 되더라 이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둘 아닌 줄을 몰라요. 항상 변하고 부서지고 돌아가는 거를 모르기 때문에 그 불바퀴를 넘어서지 못하는 거예요. 즉 말하자면 내가 둘이 아닌 줄 알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줄 안다면 그냥 불바퀴가 돼 버릴 텐데, 불바퀴에 닿으면 타 죽을 줄 알고는 거기에 접근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중생을 면치 못한다 이 소립니다.
세상만사가 다 조그만 불바퀴가 있는가 하면 큰 불바퀴가 있어서 함께 돌아갑니다. 우리네 몸을 혹성이라고 가정하면 그 혹성 가운데에 별성이 있고 별성 가운데에 그 뜻이 있고 바로 의식적인 마음들이 있어요. 그 마음들이 일체를 들이고 냄에 있어서 광력 전력 통신력 자력을 충만히 엮어 나가면서 내면세계의 인연의 줄을 타고 그냥 돌아가는데, 이걸 모르니까 깜깜하게 막히는 거예요. 그러니 무(無)의 세계,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 50%를 깜깜하게 모르는 거죠.
그러니 유(有)의 세계, 물질세계만 가지고 그냥 허우적거리다가 누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바도 없고 누구한테 칭찬받을 줄도 모르고, 또 감사할 줄도 모르고 그저 자기 먹고 살 양으로만 애쓰다가 그냥 쓰러지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러셨어요. “먹고만 살려고 하는 자는 돼지와 같으니라. 돼지에게 옥을 준들 옥을 알랴.” 그러니 여러분이 살 양으로 먹는지 먹으려고 사는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볼 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탓을 하지 마세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자꾸 나오는데다가 되입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 없어지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거기다가 맡겨 놓고 살림을 하시는 게 좋다 이겁니다. 남편이든 부인이든 형제든 자식이든 부모지간이든 병고 아니면 애고, 애고 아니면 재난, 이런 문제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멋진 묘법을 모르고 육신을 그냥 버린다면 참 원통할 거예요. 원통할 거예요. 정말입니다! 원통하고 말고요! 남 날 때 나서 코 달리고 눈 달리고 귀 달리고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이 도리를 모른다면 그냥 그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겁니까? 세상에!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한 철 캠핑하러 나왔다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한 철 캠핑하러 나왔는데 그 사이에 이 도리를 알아서 세세생생 끝 간 데 없이 자유자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200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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