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거기서만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딱
뒤집어놓고 바로 세울 수 있어

여러 지원과 본원의 신도님들이 다 같이 한자리를 하게 돼서 더욱 반갑습니다. 언제는 뭐 아니었습니까마는, 오늘 만나고 보니 더욱 반갑고 또 대구 합창단 거사님들을 보니 기쁩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졌기 때문에 생명체가 생기듯이 몸 하나가 나오려면 부모의 뜻과 내 영혼의 뜻과 형체가 형성되면 작용해 줄 수 있는 의식들이 악하든지 선하든지 자기가 지은 대로 다 합쳐서 이 세상에 형성돼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지수화풍이 바탕이 돼서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지만, 마음을 떠나서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두뇌를 통해서 연구가 되는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또 연구를 해서 지금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물질을 개발하고, 또 현재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지만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고체니 액체니 기체니 하는 이런 말들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또 레이저 광선이 개발되었지요? 물론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의 다른 개발품들이 많겠습니다만 그걸로써 방편을 한다 해도 손색은 없을 겁니다.
레이저 광선을 지금 얼마나 유리하게 세상이 다 쓰고 있습니까? 병원, 비행기 또는 하늘 꼭대기로 쏘는 것, 라디오, 전화, TV 할 것 없이 말입니다. 그것 뿐만이지 않겠죠? 일체가 그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병이 들어도 아픈 부위에 광선을 쫴야 하고 또 재는 것이든가, 쏘는 거라든가 다양하게 레이저 광선은 어디나 쓰여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과거로 돌아갔다가 올 수도 있고, 미래로 갔다 올 수도 있고, 또는 어떠한 업식이라도 녹일 수 있고, 윤회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업보성, 이 모두를 녹일 수 있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말하는 사람이 만 명이 있다 할지라도 동시에 내가 될 수 있는 공부입니다. 만 명이다 하면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숫자가 없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것이든지 응신으로 나투어서 내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도 있거니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주어져 찰나찰나 생활 속에서 나오는 모든 업보 자체를 녹일 수가 있는 것이며, 가깝든지 멀든지 간에 끌어다 보려면 끌어다 보고, 놓고 보려면 놓고 보고, 갖다 먹을 수 있으면 갖다 먹고, 갖다 줄 수 있으면 갖다 주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공부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가 있는 공부입니다. 날아가는 새나 비행기나 무엇이 다릅니까? 이건 엄청난 공부입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자유대권을 갖고 우주 천지 대권의 소유자인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근기에 따라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만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요만큼 말씀하시고 이만큼 가진 자에게는 이만큼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담을 그릇이 안 되면 아무리 주어도 흘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이나 지식,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유마힐 거사는 같이 도반이 되셨는데 그렇게 방편으로 보여주신 것은 어느 누구도 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표현을 해주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나가는 동물로서 어떤 때 생각을 하면 모두가 하찮게 생각이 되면서도 그 생명 존엄성은 존재하고 있고, 모두가 아픔을 껴안고 먹고 먹히면서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하는 이런 판국 속에서,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미생물에서부터 계속해서 올라오면서 인간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까? 뼈저린 아픔을 참고 견디면서 말입니다. 칼을 들어야만이 싸움이 아닙니다. 좁게만 보지 마시고 한번 넓게 펼쳐서 봐주십시오. 어떠한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장애자라 하면 육신의 장애자만 장애자라 하는데 정신 장애자도 장애자인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멀쩡하게 살다가도 불구가 되기도 하구요. 누가 뒤에서 쫓아오고 쫓는 게 아니라 쫓아가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또 잡아먹히는 이런 세상을 모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 사는 게 쓸데없이 생각되기도 하구요. 어느 때는 하늘을 쳐다보고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 몸, 내 가정만 생각하고 좁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계시니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더 막막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기가 막혀서 그저 나같이 바보라도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먹고 먹히는 항아리 속에서 쫓고 쫓기지는 않겠지요.
불교에 국한 지으면서 사찰에 가고, 그저 부처님 믿는 걸로만 생각들 하시지만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당당하게 너부터 알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뚱이와 내 몸뚱이가 다르지 않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다르지 않고, 생명도 다르지 않다. 다만 생각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니 가톨릭이니 이슬람교니 원불교니 불교니 하고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전부 기복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자기 앞 한치도 내다보지 못하게 막아 놓고는 상대로만 믿고 가는지요. 상대를 믿고 가다보면 세세생생을 두고 노예밖에 더 되겠습니까? 종노릇밖에 더 하겠습니까? 종노릇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당당하게 너는 땅을 짚고 일어나거라. 절름발이가 되지 말고 눈뜬 장님이 되지 말고 귀머거리가 되지 말라. 이 우주 천하 모든 도리천은 너의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 이렇게 가르치신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마힐 거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중들이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걸 보면 좌선을 했다 일어나면 끊어지지 않느냐고 충고도 했고, 내 몸이 나으려면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몸이 낫지 않겠느냐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모두 바깥으로 받아들여서 바깥 중생들을 다 거둬야 몸이 낫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내 몸 속의 중생들, 그 생명의 의식들이 작용을 해서 병이 나아야 나도 낫는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현명합니까? 몸속의 그 생명의 모습, 의식들이 바로 나와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만들어 주는 것도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오장육부의 생명체들은 우리 인간이 부산으로 가는지 서울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게 해줘야 한다구요. 내 마음 먹는 대로 같이 뭉쳐서 한마음을 내어 들일 건 들이고 낼 것은 내고 자유자재권을 형성시켜서 나가야 그것이 천백억 화신으로 화하지요. 그런 것을 모르고는 믿지 못합니다. 나의 그 수십억의 의식들이 바로 한마음으로 뭉쳐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대로 같이 해줄 수 있는 그런 심력이 길러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의식들은 의식들대로 놀고, 즉 말하자면 위 공장 따로 놀고, 장 공장 따로 놀고, 방광공장 척수공장 척추공장 심장공장 모두 따로 노는 겁니다. 호랑이 없는 산에 토끼가 선생이라고 하듯이 모두 내가 제일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앞에 어떠한 용도가 닥친다 하더라도 대처를 못합니다.
이 모두가 잡을 것도 없고 쥘 것도 없고 빛깔도 없지만, 역력하게 빛깔이 있고 잡을 수 있다면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킬 수 없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대권을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잡을 수 있다면요.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요. 수많은 어떠한 여건에 따라서도 내가 이것은 꼭 필요하다 할 때 레이저 광선이 쏴 들어가듯이 아니, 그것보다도 더 빨리 한 찰나에 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지식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렇게 영향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자신들을 믿지 못해요. 그렇게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우주 천지를 다스리겠습니까? 우주 천지를 다스리는 것도 내가 높아서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불에 들어가면 불덩어리로 하나가 되고, 공기로 가면 공기로 하나가 되고, 흙으로 가면 흙으로 하나가 되고, 어떠한 보이지 않는 영계로 가면 영계로 하나가 되듯이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어야만 그런 여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 속에 자기와 같이 움직이는 그것도 못 믿으니 어떡합니까? 그것부터 믿어야 하는데요. 아무리 회초리가 가늘고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한데 합쳐서 뭉쳐놓으면 꺾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내 몸뚱이 속의 그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합쳐 돌아가는데 어찌 그걸 꺾겠습니까? 이것부터 아셔야 되지 않을까요. 아픈 것이 낫지 않으면 “에이, 주인공도 쓸데없어.” 이렇게 일축해버리는 분들이 계시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맡겼는데도 안된다고 마음으로 언짢아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할 사람이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걸 떠나야만이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아이고, 죽는 게 두렵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처님이 있으면 살려야지 죽이는 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거 안 되는데, 이게 안 되니깐 주인공도 쓸데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올팡갈팡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주인공은, 수억겁 광년을 거쳐 미생물에서부터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나를 형성시키고 진화시키고, 쫓고 쫓기면서 형성시켰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등동물까지 이끌고 온 장본인을 믿지 않는다면 그걸 어떡합니까? 거기서만이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서만이 해결을 하지, 마음으로 병난 거는 마음으로 해결을 해야 하고 육신이 병난 거는 육신으로 대치를 해서 병원에서 고쳐나가는 거죠?
이 물질적인 문제도 없어서는 안되겠죠. 일체 만물이 있기 때문에 마음 염파가 걸러걸러 돌아가면서 확립이 되는 겁니다. 이쪽으로 쏜살같이 차이도 없고 초도 가릴 것 없이 전달이 되면 그냥 한꺼번에 전달이 되는 거니까요. 자가발전소라고 표현을 해도 되겠습니다. 이 발전소에서 전력이 나갈 때는 동시에 전력이 나가듯이 전파가 흐르고 통신이 되듯이 말입니다. 마음에서 한번 생각하면 두뇌로 해서 사대로 전파가 되고 통신이 되듯이 통신이 되면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따라주게 되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의식도 체가 없거든요. 나가면서 들어오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다 살펴주고 내 신장이 내 부처를 동시에 모시고 다니는 겁니다.
전에 어느 고등학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방을 메고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한 열댓 명이 나서더니만 칼을 들고 위협을 하길래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그 순간 급하니까 내가 일러준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럭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 순간 ‘주인공!’ 했답니다. 급하니까요. 그러고는 그냥 거기다가 전념을 다 하느라고 그 열댓 명이 칼을 들었는지 무엇을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우두커니 쳐다보고 섰으니까, 오더니만 아래 위로 전부 뒤져 돈 만 원이 나오니까 시계도 차고 그랬는데도 그 돈만 가지고선 “이 새끼는 아무것도 볼 것 없어.” 그러면서 그대로 가더랍니다. 그 도리를 몰랐다면 발길질 한 번 안 하고 그렇게 가진 않았겠죠. 그래서 다 간 뒤에 벌컥 주저앉아서 ‘아,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급하게 맡기니까 급하게 조달이 된 거지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의식들이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점령을 해가지고 악하던 마음을 선하게 해놓으니까 그냥 갈 수밖에요.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이, 어떻게 생각하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지식적이고 이론적인 것만 가지고 관습에 의해 꽉 죄어서 옴짝을 못하고 이렇게 하면 잘 되겠고 이렇게 하면 못 되겠고 하는 생각이 뚜렷하며, 상식은 이런 것이라는 틀에 박혀서 진실한 믿음으로 확실히 들어가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좀 바보 같아야 더 빠르니라’ 하셨습니다. 아는 게 많으면 망설이는 게 많거든요. 이게 정말인가? 이게 거짓 아닌가? 거짓이고 잘못이고 뭐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 믿으라고 하는데요. 타의의 어떤 형상을 믿으라고 해야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살펴보는 거죠.
이름을 믿으라고 하나요, 허공을 믿으라고 하나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 믿으라는데 왜 못 믿습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고통도 없을 거고, 즐거움도 없을 거고요. 어떤 사람은 좌선을 해야만 되는 줄 알고, 좌선을 해야만 큰 불법을 깨닫는 도리나 얻을 줄 알고 그렇게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냥 생활 그대로가 불법이고, 그대로 참선이고 그대로 공안이고 그대로 여여함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라 하는 것이, 공(空)자가 들어간 것은 왜냐하면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공’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정되게 한 가지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 가지만 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요것 보면 마음이 달라지고, 저것 보면 달라지고, 요것 들으면 달라지고 저것 들으면 달라지면서 쉼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지요. 그러니 그대로 여여한 줄 알고 그대로 참선인 줄 알고 그대로 불교인 줄 알고 살림살이 하는 게 종교인 줄 알고 돌아가야만이 진실히 믿어지고, 또 죽게 하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자기를 형성시킨 것도 주인공인데 어디 생사가 있을 겁니까? 그 생과 사의 가운데 움직이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습으로 형성이 돼서 그저 사는 날까지 살다가 한번 병들고 쓰러지면 그뿐입니다. 보잘것없지요.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모릅니다.
하루살이를 우리가 볼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듯이 저 산천초목, 산봉우리 큰 바위가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강원도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이 우리를 볼 때 어떻게 보겠습니까? 하루살이로 보겠지요! 일만 이천 봉이라고 하는 것도 뜻이 있고 팔만 구 암자 하는 것도 뜻이 있지요. 그러니까 옛날에 있었던 얘기도 현실 얘기고 미래의 얘기거리도 바로 오늘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이렇게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우리 조상들이 살았다고 하지만 그 조상들이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현실에 우리들로 나왔기 때문에 그때 그 조상들이 못 먹었느니 못 살았느니 할 것도 없지요. 여러분이 공부를 진짜로 하려면 생활 속에서 근면하고 착실하고 진실하게, 내가 지금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그 믿음으로, 네가 형성시킨 거니까 네가 없애려면 없애고 좀더 살게 하려면 더 살게 하라고 그렇게 믿어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갈 거 그렇게 믿으면 좀 어떻습니까? 그리고 뜻으로 항상 몸뚱이 속에 사는 중생들이 전부 한마음이 돼서 중생과 부처가 둘 아니게 한마음으로 한다면 얼마나 양호하게 건강을 유지할까요?
이 공부가 사실 따지고 본다면 엄청난 도리입니다. 그거를 느껴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하고 맛을 모르고 그렇기 때문이지요. 깡통은 깡통끼리 살기 때문에 왈가닥왈가닥 하고 살 거고 금은 금대로 살기 때문에 빛이 있을 거고, 그냥 그대로 사는 거지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중세계는 체로 치는 거와 같다 그랬어요. 상세계로 올라가느냐 하세계로 떨어지느냐에 달려 있죠. 그리고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지옥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의 몸을 지니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죠. 그 보이지 않는 자동적인 인과가 그렇게 무섭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살던 의식이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다 독사의 모습을 가졌으니 그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자기가 남한테 욕을 했으면 욕한 것이 입력이 돼서 욕을 또 먹게끔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겨야 해요. 주인이 하는 거지 자기 육신이 하는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 속에서 방송이 나오지 텔레비전 케이스에서 나옵니까? 텔레비전 케이스가 텔레비전이 아니고 텔레비전 오장육부가 바로 텔레비전이거든요. 오장육부가 한 데 합쳐서 부합이 되어가지고 나오지 부합이 되지 않고 선 하나만 끊어져도 안 나와요. 그러니 텔레비전 케이스를 믿지 말고 텔레비전 속의 그 모두를 한마음으로 믿으라는 겁니다. 채널만 돌리면 이게 나왔다 저게 나왔다 하는데 그걸 다 한꺼번에 용도에 따라 볼 게 있으면 보고, 보기 싫은 건 다른 번호로 돌리고 해서 그냥 그대로 거기만 믿어야지 어떻게 껍데기를 믿습니까? 내 육신은 오장육부의 집입니다. 그러니까 관리인이죠. 오장육부를 보호하는 관리인. 그와 마찬가지로 오장육부의 모든 의식들은 바로 한마음을 중시하고 들어가거든요. 표현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구가 그렇게 돌아다녀도 우리들은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모르시죠? 아는 분 있다면 손들어 보세요.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닙니까?
인간 속에 든 세포 하나하나의 의식들은 인간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써 알려주는 것이죠. ‘이렇게 다니는 것도 나구나.’ 하고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 믿으려면 진실히 믿고, 병이 낫고 안 낫고 되고 안되고 그런 걸 떠나서 자기를 수억겁을 통해서 쫓고 쫓기면서 진화를 시키고 그랬던 것도 쫓고 쫓겨봐야 그게 마음이 발전이 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어려움도 공부로 알라,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믿는 마음으로 ‘허, 또 무너지게 했군.’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웃고 쳐다본다면 그대로 흘러가게 돼 있습니다.
모두 이 소리를 믿지 못하면 자기를 자기가 믿지 못하고 버리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자기 자성신을 진짜로 믿어야지 어째서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자성신을 그렇게 믿지 못합니까? 이 세상에 무엇을 믿을 게 있습니까? 대신 죽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신 아파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식들이 아무리 효자 효부라 해도, 부부지간에 아무리 정이 좋다 하더라도 똥 눠주고, 대신 아파 주고, 대신 죽어주고, 대신 잠 자주는 사람 없습니다. 진짜로 자기를 자기가 믿어서 모든 사람이 한 가정이라도 밝게 살 수 있게끔 자기가 능력을 기르는 것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입니다. 그럼 질문 있으신 분 질문하시지요.
▲질문자1: 진주지원 개원식에 새벽같이 갔는데 점안식 할 때 쫓겨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왜 그랬을까?' 하는 섭섭한 생각도 들면서, 거기에 대해 굉장히 의심이 들어서 한 며칠 생각해보니까 ‘아, 등신불을 등신불로 보지 마라.’ 그리고 활공법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 걸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한마음선원에 계신 부처님은 참 만년 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어느 정도 알겠는데 왜 스님이 쫓아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니 과거에 부처님 시자가 두 분이 계셨는데 우바마라라는 존자가 부처님이 임종하실 때 ‘너는 여기 있지 말고 나가라.’ 해서 멀리 쫓겨나간 일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스님께서 의식을 하시는데 일반 사람들이 잘못 오해해서 마음공부에 어떤 지장이 돼서 쫓아냈는지 그 점에 대해서 좀 궁금해서 여쭈어봅니다.
▲스님: 지금도 얘기하셨다시피 가섭존자가 아난존자를 경전 편찬하는 자리에 들어올 수 없다고 내보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근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얼른 쉽게 말해서 마음이 한마음이 안되기 때문이듯이 일반 신도들은 부처님 점안식을 하는데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왜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될 거를 저렇게 하나? 저거는 아닌데, 저거는 맞는데….’ 하고 산란한 생각을 하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불이 되죠. 금에 사금이 섞이게 되지요. 그래 생각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모두 금하고 스님네들의 그 한마음으로서 올리는 것입니다.
▲질문자2: 저는 옛날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시심마’라는 화두를 들고 참선을 했습니다. 부모에게서 나기 이전에 내 참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 생각 간절하게 참선을 했는데, 깜박 졸은 그 순간에 나는 깨어 있고, 내 의식이 허공 간 온 우주에 꽉 찬 느낌이라 떨리고 희열에 찬 마음으로 감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절망에 저 무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강과 나와 하나가 되었던 그때, 그 캄캄한 산중에 어디선가 수꾹새 우는 소리가 슬피 들릴 때 바람이 간간이 불어서 온 나무 숲을 뒤흔들 때, 무릎을 치면서 ‘아하, 너와 나는 둘이 아니구나. 너와 나는 한 뿌린데 무엇을 빼앗고 빼앗길 것인가?’ 그때 그건 분별심인지 진짜 깨친 건지 그것을 좀 알고 싶습니다.
▲스님: 따지고 보면 전부 잔소립니다. 지금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질문자2: 저입니다.
▲스님: 전데, 그 저 하나만 있으면 요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저런 생각을 하지도 않고, 요거를 보지도 않고 저거를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 저가 너무 많아서 요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요것도 듣고 저것도 듣고 하지 않았습니까?
▲질문자2: 아직 듣는 마음자리를 깨치지 못해가지고 지금도 방황하는 중입니다.
▲스님: 그러니까 방황하는 것조차도 거기 놓으십시오. 안되는 것도 놓고 방황한다는 것도 놓고 또는 모른다는 것도 놓으세요. 지금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이 돌아가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이것저것을 끌어냅니까?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어. 너만이 이끌어 갈 수 있어.’ 하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작년에도 어제도 이끌어가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이끌어 가겠지.’ 하고 다 거기다 맡겨놔요.
▲질문자3: 저는 1년여 전부터 저희 집사람의 도움으로 한마음선원에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주말마다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렇게 나와서 스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법형제회에 가입을 해서 선배 법우들과 생활의 방식도 공부하고 또 불법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러면서 먼저 배운 분들의 공부를 훔쳐서 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끼리 토론을 하면서도 잘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스승님께 여쭈어봐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몇 가지 질문을 모아서 제가 대표로 질문을 올릴까 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부처님 가르침에 핵심이 되는 인연법을 말할 때 으레 12연기가 거론되곤 합니다. 무명이 있으니 행이 있고 행이 있으니 식이 있고, 그와 같이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해나가다가 그래서 생로병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행이 없으면 식이 없고, 그렇게 해서 생로병사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걸 줄여보면 무명이 있기에 생로병사가 있고 무명이 없으면 생로병사가 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분명코 무명을 여의신 분이었는데 어째서 늙고 죽음이 있었는지요?
▲스님: 부처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모두 못 알아들어서 말씀을 못 들은 거지요. 죽는 것도 없고 사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본래 빛깔과 음파를 통하고 통신을 통해서 텔레비전에 방송이 나오는 것이지 텔레비전 자체가 살고 죽는 게 아닙니다. 보실 줄 아는 사람은 생로병사가 무라고 할 거고 보실 줄 모르는 사람은 몸뚱이가 죽으니까 죽었다고 하고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을 가끔 하지요. 어느 두 친구가 한 사람은 승려가 되고 한 사람은 속인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승려 된 친구를 불러서 천도를 잘 좀 해달라고 했는데 천도는 안 하고 “온 것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을….” 이렇게 한마디 하고 가버렸답니다. 온 것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을 지어 가지고 죽었느니 살았느니 애를 쓰고 야단들 아닙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옷이 헤지고 바래고 또 그 시대에 맞지 않고 그러면 벗어 놓고 새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건데 죽었다 살았다 할 게 뭐 있습니까. 그 도리만 알면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지요. 그냥 여여함이죠!
▲질문자3: 잘 알겠습니다. 두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질문을 받으시고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고 하기에 제 자신도 이것을 여쭤서 알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 부처님이 대답을 하셨다면 안 하는 게 있고 하는 게 있으니까 그것도 또 틀린 말이지요. 그러니까 대답을 안 하신 게 하신 거지요.
▲질문자3: 부처님께서는 무정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스님: 지금도 얘기했지만 온 게 없으면 갈 곳도 없을 것을 한 뜻이 바로 거기에도 해당이 되네요. 왜냐하면 방송국에서 방송을 내보내야만 텔레비전 노릇을 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케이스가 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까? 텔레비전이 망가졌다고 방송국이 다 망가졌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부서졌을 뿐이지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어요.
▲질문자3: 그렇다면 제가 언젠가는 죽어서 송장이 될 건데 살았다는 거하고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저와 송장은 어떤….
▲스님: 본래 산 사람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이 몸뚱이가 움직이니까 둘이 아닌 자기 자성신을 생각하고 믿으라고 그런 거지요. 그러니까 형체가 자기만이 아닙니다. 대답을 안 하신 게 하신 겁니다. 지금 만약에 말입니다. 살아 있어도 의식만 끊어지면 송장이지요. 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산 송장 죽은 송장 그것뿐이에요.
▲질문자3: 잘 알겠습니다. 지구 현상계에서 보면 지구 속에서 화산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 속에서 나오는 작용이고, 바다에 해일이 일고 홍수가 생기고 전쟁도 일어나고 지구의 대기권이나 인간들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작용을 볼 때, 지구라는 몸체는 처음 형성될 때 인연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물질이 뭉쳐졌다면 파괴 난리라고 주장하기 이전에 지구 스스로가 자기를 지키고 정화하기 위한 작용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몸도 인연에 의한 업식으로 뭉쳐진 것이라면 우리가 화산과 홍수가 작용을 하듯이 나를 제도하고 정화하기 위한 주인공의 작용이라 생각하니 그대로 넉넉한 마음이 듭니다. 지구가 작용을 하였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듯이, 나한테서 나온 것을 제자리에 도로 놓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스님 법문 중에 “병이라고 이름 짓지 마라. 병이 병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과 뜻이 같은지요?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도 공부가 되어 가는 증명인지요?
▲스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간다 하더라도 역력하게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나갈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 있다면, 패기도 생기고 잔잔한 물결같이 편안하기도 하면서 편안하고 잔잔한 그 속에서 솟아나오는 심력은 정말 그 무엇도 당해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가신다면 잘 되실 것입니다. 계정혜 삼학이라고 했는데, 계율도 한마음 속에 들어 있고 지혜도 한마음 속에 들어 있으니 계·혜·정이죠. 계와 혜가 정 속에 들어 있다 이런 말입니다. 정 속에 듦으로써 지혜가 풍부해서 해탈이 생기고 해탈지견향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도반으로서 열심히 해보십시다.
믿는 마음의 능력이란 건, 여러분이 못났든 잘났든 자기 마음이라는 건 이 태산을 지고도 남음이 있고 이 우주를 뚫을 수도 있고, 탱크를 부술 수도 있는, 이런 도리입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도리입니다. 그런 건데 믿지들을 못해가지고선 그렇게 허우적허우적거리니 마치, 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단단히 믿음을 가져서 세세생생에 이 중세계의 통 속에서 벗어나십시오.
틀림없이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딱 뒤집어 놓거나 바로 세울 수 있는 그런 용기와 패기가 생기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한 다리 절름발이며 한쪽 눈 장님이며 한쪽 귀 귀머거리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레이저 광선이 그렇게 지금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마음의 심력만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50%밖에 안 되니까요.
그러니 여러분, 좀더 우리 도반으로서 내가 더 높으니 네가 더 얕으니 이런 걸 떠나서 부처님께서는 자기 아님이 없기 때문에 높은 게 없이 그저, 하다못해 개가 염원을 해도 개로 화해서 병을 고쳐주시고 또 무명을 벗겨주셨기에 어떠한 개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전체 한 덩어리의 불기둥을 표현해서 부처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체가 없어서 전체 한 기둥을 말합니다. 한 기둥의 마음으로서 전체 한마음으로 심력을 길러 애고병고 등 그 어떠한 업식이라도 다 태워버립시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2003-12-24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