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 스님(2)
오성 스님은 일년을 제주의 절에 머물다가 다시 해인사로 돌아왔다. 그는 사집반에 방부를 들였고 나는 그보다 한 반 위인 능엄반이었다. 우리는 한 건물에 동거하고 있었지만 같은 반이었을 때만큼 자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반이 틀리면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 강원의 제도였다.
그러나 한번 도반은 영원한 도반이라고 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하는 나의 감정과 자세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는 반갑고 매력적인 도반이었다. 외로움을 알고 외로움을 향기로 발산할 줄 아는 그의 성숙에 나는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오성 스님이 정말 천진하게 깨어나는 때는 축구를 할 때다. 축구를 무척이나 잘하는 그는 축구를 할 때면 그 빠른 동작만큼이나 경쾌한 모습으로 다가섰다. “패스, 패스” 하고 외치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천진불(天眞佛)이 따로 없다. 그만큼 축구에 관해서는 애환 또한 많다. 한번은 이가 부러지는 경험을 해야 했고 또 한번은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스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축구울력이 있는 날이면 앞장서 공을 몰고 축구장으로 향하곤 했다.
해인사 강원 생활의 3할은 참회하다가 보내고, 또 3할은 울력하다 보내고, 나머지 4할은 공부하다가 보낸 것 같다. 울력과 참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큰 것이 해인사 강원의 특징이다. 해인사 강원 생활이 어렵지만 어려운 것과 비례해 도반 사이의 정은 도타워지기 마련이다. 졸업하고 나서도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자주 만나는 것이 해인사 강원 졸업생들의 특징이다.
강원 졸업후에도 나는 오성 스님이 그리울 때면 제주에 가고는 했다. 강원에 있을 때와 지금의 제주 방문의 차이는, 그전에는 주로 제주의 명소를 찾아 다녔지만 졸업 후 방문할 때에는 스님이 있는 절에서 머물며 바다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함께 절 앞 바다에 가 수영을 하거나 거닌다는 점이다. 가끔 함덕 바닷가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어두워진 먼 길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차가 간간히 다니고 그리고 차와 차 사이의 고요를 바다의 물결소리가 다가와 채우고 가는 제주의 밤길은 특이한 매력이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집들의 불빛이 띄엄띄엄 길을 비추고 무슨 외로움처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 넘어 새어나오는 길을 걸으며 스님에게서 어떤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외롭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 서정이 묻어나는 한 소년의 성장기였다.
소년은 아주 어릴때부터 절에서 자랐다.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알고 컸다는 소년은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그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불러도 관세음보살은 어머니의 손길로 손 내밀지 않았고, 어머니의 목소리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소년에게 관세음보살은 어머니였지만, 관세음보살에게 소년은 혼자 번뇌를 극복해 나갈 구도자로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년은 그리움이 채워지지 않는 자리를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부르며 메워 나갔다. 천수천안의 사랑과 자비가 마치 이슬처럼 어린 소년의 가슴을 적셨을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자리를 수많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로 채워나간 소년은 따뜻하고 밝은 성품을 지닌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년은 중학생이 되던 해에 비로소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을 절에 맡기며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알라고 했던 여인에 대한 안개와도 같은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여인이 어머니라는 것을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 것이다.
소년이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이미 비구니 스님이 되어 있었다. 소년은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를 수가 없었다. 입가에서 맴도는 어머니라는 말을 애써 지워야만 했다. 공부 열심히 해 큰스님 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서 오는 길이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스님이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소년의 근황을 묻지 않았다. 다만 스님의 외로움에 배어 있는 그 따뜻함 역시 어떤 연유에 근거할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았을 뿐이다.
그날 제주의 밤과 바람과 이야기 속에서 어쩌면 나는 스님과 오랜 동행이 되어 함께 할 것만 같은 운명적인 암시를 느껴야만 했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