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혜 스님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큰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올해는 유난히 많은 스승들이 세상 인연을 마감하셨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거의 매주 큰스님들의 원적 소식을 접했다. 산 같은 슬픔이 밀려드는 소식들이 이어 지는 가운데 시나브로 해는 바뀌고 겨울바람은 차기만 하다.
세상에 의지할 스승이 있다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다. 반대로 스승들이 한 분 두 분씩 우리 곁을 떠나가는 것은 황량한 들판에 버려지는 듯 허전하고 서글픈 일이다.
금년에는 10여 분의 큰스님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서 어느 해 보다 우리들 주변이 공허하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 지고 경제 불안과 테러, 질병의 공포는 그침이 없는데 우리들에게 위안과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들마저 세상을 떠나가니 온 세상이 적막강산 그 자체다.
그런데 큰스님들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교는 죽음을 ‘끝’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육신이라는 가아(假我)를 벗고 본래의 청정한 마음자리로 회귀하는 하나의 경과조치 쯤으로 본다. 본래청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불교에서는 죽음을 열반이라 한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번뇌와 망상의 불을 ‘훅’ 불어 끈 그 순간의 절대적인 고요와 아무런 분별의 여지가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죽음을 아무렇지 않은 일, 밥 먹고 숨쉬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죽음을 초월하는 가르침.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특별한 가르침이다. 육신의 무상함을 극복하고 또 다른 완성으로 접어드는 길의 정점이 죽음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실로 초연할 수 있어야 공부를 제대로 한 스님이라고 하는 것도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 까닭이다. 큰스님들의 죽음을 입적(入寂 적멸의 세상으로 들어 감) 원적(圓寂 원만히 적멸에 들어 감) 시적(示寂 적멸을 보임) 등으로 표현 하는 것도 니르바나의 경지를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허망함을 말로만 떠드는 것은 그 자체가 깊은 병이다. 허망한 육신에 집착하지 않고 진리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삶이어야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꿋꿋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서 극락을 좋아 하지 않고 죽어서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장부의 살림살이인 것이다.
큰스님들이 원적에 이르러 남기는 ‘열반게’란 바로 이 세상에서 이룬 공부의 가장 마지막 결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일종의 수행보고서인 셈이다. 많은 선사들의 열반게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기상과 분별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다. 주머니 속에 감춘 송곳처럼 삐죽삐죽 드러나는 그 기운이야말로 한 선사의 일생에 걸친 수행의 깊이요 넓이다. 그래서 큰 스님들이 원적에 이르러 한 마디 토하시는 가르침을 우리는 얼른 챙겨야 한다. 그 활달한 가르침, 비록 문자를 빌어 표현되긴 했지만 문자 이전의 원음을 들을 때 우리는 진정한 가르침을 받게 된다.
12월 13일 백양사에서 원적에 든 서옹 스님은 “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 백운산정에 눈이 분분하네/ 한번 백학이 날으니 천년동안 고요하고/ 솔솔 부는 솔바람 붉은 노을을 보낸다”고 최후 일성을 토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좌탈(坐脫)의 기연으로 가르침을 한 번 더 강조 했다. 온 몸을 동원해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의 호흡을 멈춘 순간(어디 호흡만 멈춘 것이겠는가? 이 중생계의 모든 번뇌와 분별을 다 멈추어 버렸으리라) 이미 큰스님은 저 적정열반의 세상에서 천진한 웃음을 짓고 계셨을 것이다.
큰스님들의 원적은 슬픔이기보다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형상의 이별에 대한 슬픔에 침잠되어 온 몸으로 남기신 가르침을 잃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슬픔이다. 큰스님들의 원적 그 자체가 지고한 가르침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신이라는 형상에 집착해 그 형상을 볼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자신의 형상도 머지않아 허물어 질 것 아닌가.
스스로의 형상이 허물어질 때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그 순간을 맞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중생들이 진정 슬퍼해야 할 일은 스승의 모습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순간까지도 온몸으로 가르침을 베푸시는 스승들의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스승들이 떠난 자리에 슬픔의 꽃을 바치는 것으로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 자리에 채워야 할 것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올곧게 이어받아 중생계의 어둠을 물리치고 극락의 꽃을 피우려는 부단한 노력의 땀방울이다.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물구나무를 서서 죽는 그 장면에 감동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러한 연출의 깊은 뜻이 무엇일까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일이 급한 것이다. 이걸 안다면 사리가 몇과 나왔느냐, 좌탈이냐, 입망이냐 하는 외형에 지나치게 끄달리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