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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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를 받든 십계를 받든 안으로 놓고 진실하게 행을 해야
하늘을 꿴 주장자와 내 주처의 주장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직결되고 가설돼 있어

참회는 어떻게 하나요?

우리 인간이란 언젠가 한번 죽는 건데 믿음으로써 그 죽음이 불안하지 않다는 걸 제 나름대로 느낍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인간이란 죄를 짓고 또 지으면서 살게 마련인데 그 죄를 누구한테 용서를 비는가 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교회에 가면 예수님, 성당에 가면 천주님, 또 스님께서는 자기의 근본,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누구한테 참회를 해야 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왜 한마음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포괄해서 전부 공했다는 뜻입니다, 마음들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주인공이라는 뜻이죠. ‘주인공’ 하면은 일체가 다 공했으니까, 내 마음과 육체와 모든 물질이 다 공했으니까 그 공한 도리를 표현하자면 전체 바다와 같다 이 소립니다.
아무리 연못에 물이 많다 하더라도 그 연못의 물은 스며서 바다로 들게 마련이고, 바다에서 또 흘러서 연못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 얼마나 묘한 진리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내가 있음으로써 근본이 되고 주장자가 되고, 그것이 화두가 됨으로써 바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깐 한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도 없고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여전히 소리는 나고 여전히 몸을 움죽거리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자기는 생각하기 이전을 추구하고 믿고 감사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형상에다가 빌어 봐서 되는 것도 아니요, 허공에다 빌어 봐도 헛손질이요, 또는 어느 스님을 믿어도 그건 헛것입니다. 오직 그 뜻과 행과 말이 일치됨으로써 ‘아, 내가 따를 만하다.’ 하면 따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물체를 보고 따르는 거고 그 어느 스승한테 따르는 것이지, 믿는 것은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참회를 하고 내가 행을 고치면서 내가 하는 거지, 딴 사람한테 나를 참회해 달라고 그러고 내 행을 고쳐 달라고 해 봤던들 그건 말뿐인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야 한다든가 안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은 바로 자기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에, 본래 인간으로 태어나올 때에 기본적 상식이나 양심이나 교양은 가지고 나왔기에 이것이 잘못되고 이것이 잘되고 크고 작고를 다 알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이전의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바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이전이라는 것은 자기 영원한 생명이라고 볼 수 있겠죠. 홀랑 해말갛게 벗어진 자기 불성 말입니다.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하게끔 되고, 생각을 하면 바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반면에 말도 하게 되고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의 마음 주장자 주인공자리에서 일체가 들고 남을 믿고, 오직 거기를 의지하고 모든 걸 놓는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활을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참선이며 그게 올바로 들어서는 길입니다.

오계만 잘 지키면 되는지요?

인터넷을 통해 불법을 인연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계를 수지하는 것이 정식 불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계의 내용을 보면 불법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회, 어느 종교에서든지 꼭 실천해 나가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오계라는 덕목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그리고 오계만 잘 지킨다면 참다운 불자가 될 수 있는지요?


어찌 오계뿐이겠습니까? 모든 분들이 이 사방의 한 사람으로서 오계를 받는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또는 물질과, 여러 모로 그 형상을 볼 때에 하나도 헛되이 볼 수도 없고, 헛되이 들을 수도 없고, 헛되게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이 돌아가고 같이 나투고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계를 지킨다 하는 것도 오계만 지키는 게 아닙니다.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이 세상만사 만물이 다 저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듯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물도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에서도 천차만별로 생명들의 모습들이 뛰고, 밖에서도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그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산도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낮은 걸 보면 낮다고 생각을 하고 높은 걸 보면 높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좀더 넓고 지혜 있게 생각을 한다면 낮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거고 높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도 없는 것이니까요.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또 낮은 것이 있으니까 알고 보면 모두 평등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공부를 증득하지 못하고 오계를 방편으로만 설하고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까닭에 온누리에 부처님의 그 뜻이 한 찰나에 함께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계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참 중요하지만, 계를 설하는 사람의 한생각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 생각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받았느냐는 문제 말입니다. 그래서 수계를 하게 되면 책임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시는데, 줄창 얘기하지만 수없는 나날을 모습을 바꿔 가면서 진화돼서 인간까지 성장됐을 때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없구나. 공했구나. 오늘은 고정됨이 없이 고정관념이 없이 고정 행이 없이 돌아가니, 찰나찰나 나투며 돌아가니 그 또한 없구나.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까. 내가 생각했다고 할까? 그 이름 없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도리가 바로 주인공이구나. 색이자 공이고 공이자 색이니 어떠한 것을 이름해서 붙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했으니 주인공의 뜻에 모든 것을 놓고, 거기서밖에는 들이고 내고 해결을 못한다.’ 하고 맡겨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육신은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 뜻을 잘 아신다면 진짜로 믿을 것입니다. 그걸 믿지 않으면 오계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오계를 받아서 지녔다고 하지만 문 밖에 나서면 오계를 그냥 의식으로만 받았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戒)란 그것을 진실하게 실천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술을 마시지 말라.’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과음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음을 하면 식구들도 불안하고 몸도 병이 들고 모두가 여러 가지로 나쁜 것이니 그것을 바로 고치라는 겁니다. 그렇게 고치면 자기 신상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서 결정을 짓고 실천하는 사람은 실천하는 대로 통신이 되게 돼 있습니다. 오계를 받아 실천하는 사람에 한해서 말입니다.
통신이 뭐냐 하면, 아직 가설이 되지 않은 사람이 있고 가설을 해서 통신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사람도 있는데, 내 집에 전화를 가설을 해야 전화를 걸 수도 있고 전화를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방에 녹음장치를 해서 붙여 놓았다면 연방 자기가 살아나가는 그 자체가 그대로 녹음이 돼서 그냥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마음속에 자동통신기가 있어서 항상 우주법계에 상응이 되고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지키나 하는 것을 다 알게 돼 있습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천리 밖에서라도 알고 있으니 이걸 어떡합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다 녹음장치가 있고 컴퓨터가 있고 통신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하면 그렇게 통신이 되고 다 알게 되는 거지, 누가 뭐 뺏어가고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하는 대로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거나 미래에 올 것이나 모두 현실에 내가 하기에 달렸습니다. 정말이지 세세생생 발이 묶여서 그 의식을, 즉 말하자면 모든 관습을 떼지 못해서 죽어서도 살아 있는 냥 생각하고 착각을 하고 물에 빠져 죽을까 봐 강도 못 건너가고, 산이 높아서 못 건너가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건너가고 이러니 그저 다시금 재생이 돼서 나오든가 천도가 돼서 직접 나오든가 이러질 못한다 이겁니다. 그렇듯 남의 손을 빌려서 항상 해야만 되니 이게 무슨 까닭입니까?
그렇기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계를 받는 게 가볍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오계를 받으려고 하고 신심을 내서 진실하게 행을 하신다고 하면서도, 그걸 가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는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무겁고 깊숙하고, 어저께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는 그 무거운, 평등 진리에서 참,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계를 받든 십계를 받든, 받되 그것도 거죽으로 하라는 게 아니라 안으로 놓고 진실하게 행하라는 겁니다. 일체 사람들이 전부 움죽거리는 거 모두 자기 주장자가, 즉 불성이 자기를 이끌어 가니깐 말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가려면

친구의 문제를 여쭙고자 합니다. 제 친구가 오랜 동안 다른 종교를 열심히 믿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서 지금 정신병원에 입원중입니다. 그 친구의 말로는 자기 속에서 여러 명이 있어서 이렇게도 시키고 저렇게도 시킨다고 합니다. 제가 현대불교에 나온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생각하기로는, 자기 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그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스님,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중심을 세워서 확고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요?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싸 가지고 돌아가는 우주 전체의 그 중심 주처가 우리들의 중심 주처이기도 합니다. 좀 작고 클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 주처에 그 큰 중심 주처가 둘이 아니게 직결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이것을 잘 아시고 우리가 생활을 한다면 생활하는 그 곳에 바로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직결이 돼 있구요.
만물만생의 마음 그 중심 주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음들의 주처가 바로 우리의 마음 주처에 같이 가설이 됐다는 얘깁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일체 만물만생은 보이는 데서나 안 보이는 데서나 서로 뜻으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으로 말미암아 일체가 다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도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바다의 소임자를 주해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의 관리인을 주산신이라고 했구요, 풀과 나무들의 관리인을 주림신이라고 했구요. 마음의 중심 주처라는 그 주가 모든 관리를 합니다. 갖가지 천차만별의 이름들이 다 주어져서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그 소임을 맡아서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주신입니다. 그리고 또 주신들끼리 모여서 회담을 하거나 서로 통하게 하는 소임자를 주주신이라고 합니다. 천체가 이렇게 해서 같이 그 중심 주처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들이 살아나가는 데는 상대성이 있습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크고 작고, 못하고 잘하고 이런 게 다 상대성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주처, 주인, 주장자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주장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꿴 주장자와 내 주처의 주장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돌아가는 거는 가설이 돼 있고, 위아래를 받치고 꿴 거는 같이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삼세가 일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안 세워 놓고 그냥 가는 사람 다르고, 주인을 딱 집에다가 세워 놓고 가는 사람이 다른 겁니다. 항상 걸림 없이 집을 보도록 주인을 세워 놓는다면, 자기 주처를 세워 놓는다면 그게 바로 보현이며 법신입니다.
마음속에 그렇게 세워 놓음으로써 바깥에서 악행, 즉 말하자면 인과성이나 윤회성이나 세균성이나 업보성이나 영계성 이러한 잡다한 유전에 의한 것들이나 어떠한 거를 막론하고 거기를 범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주인공 뿌리를 세워 놓은 거는, 세워져 있는데 내가 생각으로 찾아서 거기 세워 놓은 것은 바로 자기 마음을 거기다가 포함해서 돌리는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것도 붙을 수가 없죠.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붙을 리가 없어요. 먼지 하나도 거기 붙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분에게는 번뇌도 붙을 자리가 없고 업보도 붙을 자리가 없고, 유전성이나 인과성 윤회성 업보성 영계성까지도 전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세워 놓지 않고 마음공부를 안 하는 분들에 한해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주인을 세워 놓지 않았으니 집이 비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되는 숙명통 자체가 포함된 오신통이 지금 현대 말로 하자면 자동적인 컴퓨터라구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인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이 되거든요. 입력이 된다면 그 입력된 대로 가차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행이 저질러지거나, 윤회성이 저질러지거나, 영계성이라든가 모든 것이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말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 몸뚱이 속에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도록 돼 있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도록 돼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집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 것이 가차없이 자꾸자꾸 나오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내 주인을 세워 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과 직결돼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안 생기고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이고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빨리 대치를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대치를 못하죠. 그렇게 돼 있는 것이 지금 현상계에서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내 집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인과로써 영계가 드는 수도 있고 지금 현재 길에 오다가다가도 드는 수가 있습니다. 차에 치여 죽은 영계가 착을 두고서 그 자릴 떠나지 못해서 드는 수도 있습니다. 저 나무에, 즉 말하자면 목신이 돼 가지고서는 붙어 있다가 들어오는 수도 있습니다. 내 집이 비었으면 그 빈집에 자꾸 드나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서 나오는 것도 많은데 빈집이 돼서 바깥에서 들어오니까 이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대치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윤회성으로 들어오고 영계성으로 들어오고 인과성으로 들어온 것은 병원에 가도 어렵습니다. 그냥 몸에서 난 병이라야 병원에서도 빨리 치료를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니까요. 유전으로 온다거나 영계성으로 온다거나 또는 바깥에서 들어온다거나 이렇게 해서 내 집이라고 하고 사는 식구들이 한 집안에 둘 셋씩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사람이 내 집이라고 하며 살 때는 이 소리 하고, 또 딴 사람이 내 집이라 하고 내가 산다 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고 살 때는 또 딴 소리 하고,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자꾸 내가 바꿔지니까 미쳤다고 하죠. 그리고 또 육신이 망가지죠. 첫째 몸이 망가져요, 부지를 못하게 하니까요. 나가라, 들어와라, 앉아라, 나가지 마라, 먹지 마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니까 이거는 견뎌 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하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주위의 식구들까지도 지망년을 당하는 겁니다.
이러니 마음공부를 안 하고서야 어떻게 하겠느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알아라. 너부터 알고 너부터 믿고 너부터 그 본래 있는 거를 찾는다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그 섭류를 네 자신이 잘 알 수 있으리라. 그럼으로써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그렇게 자유인이 된다면 네가 바로 부처고,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되느니라.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된다면 바로 그 법에 의해 자유로운 작용이 스스로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쑥 빼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십시오. 내 병고 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외쳐 봐도, 아무리 이름을 불러 봐도 그거는 끄덕도 하지 않고 통하질 않습니다. 통하는 길은 자기 마음밖에 없어요. 부처님과 통하는 길은 바로 내 마음속의, 내면의 털구멍 한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공부를 안 하고 주인공 주장자를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주장자를 세워 놓고 거기다가 모든 걸 놓고 굴려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불살조의 선지에 대해서

불교학을 공부해 나가고 있는 학생입니다. 선사어록에 보면 부처님이 태어나시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미당지’ 이렇게 외치신 것에 대해서, 후에 선사들이 “염병할 놈의 늙은이!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사지를 찢어서 개한테나 던져 줄 걸….”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게 선가의 화두가 돼버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통해서 일체에 걸림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이름이나 어구나 가지고 있던 그 어떤 고정관념을 타파해 가지고 그것조차도 부숴야만 된다는 말씀이어서 올바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부정하다가 보니까 살불살조의 선지는 어디로 가 버리고 부정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들어갈 필요도 없고 긍정적으로만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닙니다. 그대로, 그대로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관념 속에서 ‘이건 부정이다!’ 하고 부정 속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부정 쪽으로 들어가서 긍정으로 나오게 되려니까 그 기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겠습니까! 그러니깐 부정도 긍정도 다 놔 버려라 이러는 겁니다.
부정도 긍정도 다 놔 버리게 되면 내가 생활해 나가는 그대로 그것이 여여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어려운 거거든요. 부정적으로만 들어가서 병신이 돼 가지고 다시 긍정으로 나오려면 참 힘들다 이겁니다.
이런 게 있습니다. 처음에 배우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부정적으로 들어갈 때는 부정적으로 들어갑니다. 부정적으로 들어갈 때는 무의 법 유의 법을 다 놔 버리고 부정적으로 그냥 들어 간다 이겁니다. 들어갔다가 다시 긍정을 받아서 나올 때 그것은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걸 제거하고, 제거하라고 하기 이전에 자기 몸까지 버렸을 때는 다 그냥 계법이 있고 없고가 없습니다, 다 버리니까. 부정적으로 막 들어가니까. 그래 다 버리고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과정에 뭐 그렇게 여러 말이 필요하냐 이겁니다, 몰락 놔 버리면 될 걸. 그러니까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으로 들어가려고만 하지도 말고 긍정적으로만 들어가려고 하지도 마라. 부정적이나 긍정적이나 다 모든 것은 네가 하는 거다. 다 놔 버려라! 다 놔 버리되, 그것이 놔 버려라 하면 허무하게 돌아갈까 봐 그건 공에다 놔 버려라! 이렇게 방편으로 세운 겁니다. ‘공의 기둥한테다 모든 걸 일임해라! 놔 버려라!’ 그랬을 때는 자기 자신이 벌써 한마디 한마디 그대로 하고 움죽거리고 하는 것이 그대로라구요.
우리가 지금 현대의 과학적인 문제라든가 문명적인 문제라든가 철학이다 불교다, 어떠한 교를 막론하고 이 시대에 긍정적으로 우리 생활에 합류화 되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거하고 지금 이 시점하고 전자의 몇 천 년 전이라든가 몇 백 년 전이라든가 이때의 생활수준하고 지금 생활수준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그 뜻과 지금 생활과 부합시킬 수 있는 고게 필요한 거예요.
그게 필요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떠한 경향이 있느냐. 전자에는 부정적으로 그냥 막 들어갔다가 다시 긍정적으로 나오는 공부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힘들어요. 우리가 벌써 나올 때도 빈 자리로 나왔지만 우리가 사라지는 자체도 그런 빈 자리에서 사라진다고요. 그럴 때는 나온다 들어간다 하는 걸 몽땅, 그것도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세워 놓고 몰락 놔 버려라 이겁니다.
긍정이다 부정이다 하는 거를 몽땅 놔 버렸을 때 비로소 스스로 자기가 그냥 생활하는 것이 여여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완전히 선다고요. 섰을 때, 그렇게 지금 현상세계의 그 모두를 관여할 수 있고 관해 볼 수가 있고 관해 들을 수가 있고, 모든 걸 생활에서 조금도 어김없이 해나갈 수 있는 거를 다 자기가 착복할 수 있고 또는 내줄 수 있고 들일 수 있고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지금 현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럼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빨리빨리 이것을, 지금 시공이 없이 돌아가고 또 시공이 없이 돌아간다는 말은 예전부터 했지만 지금은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개발이 돼서 자꾸 돌아가는 반면에, 전체가 지금 우리의 마음 돌아가는 대로 빠르거든요,. 전자에는 10분 동안에 돌았다면 지금은 마음이 초를 다툰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를 다투면서 또 돌아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주인공이 뭐냐, 우리의 마음이다 이겁니다. 개발하고 물질로다 과학이, 문명이 이렇게 발달된 것도 우리의 마음에서 나간 거지 딴 데서 나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꼭이 이거는 그냥 전자에 어렵게 했던 거를 고대로 따라서 하기 이전에 벌써 발달이 돼서, 지금 로케트를 타고 가면 빠르지 않아요? 그때는 차가 없어서 걸어갔다구요. 걸어간 얘기를 지금 해야 하겠습니까. 몇 십 리 가자면 며칠이 걸렸다 이런 말 하게 생겼어요? 지금 몇 시간이면 비행기를 타고서 벌써 미국을 왔다 갔다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깐 예전에 부처님도 말씀하셨던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내 체가 없이 무형에서, 즉 무의 용을 할 수 있으며 유에서 내 몸을 움죽거리면서 용을 할 수 있는 거며, 이것을 포함해 가지고 생활에 접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러한 우리 생활이 바로 불교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삼위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이건 말로 떨어지는 것이고, 삼위일체가 똑바로 맞아 떨어져서 내가 하나라도, 열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집어 먹는 거를 위주로 한다면, 생활에 적응된다면, ‘말씀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불교’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이 지금 불교 자체가 융성하게 하려면 그 도리를 꼭 알아야만 한다고 하는 겁니다.

말세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요즈음 세상이 전부 말세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성경 같은 데를 보면 뭐 조금 있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느니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세라고 하는 뜻은 어떤 의미로 통하는 겁니까? 그리고 거기서 14만 4천명이라는 말이 있고 그 사람들은 나중에 뭐 영생을 한다느니 그런 식으로 비추어지는데 그게 정확한 사실입니까? 그리고 나중에 어떤 때가 되면 그 사람들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스려진다는 말도 있는데 그게 맞는 건지 궁금합니다.


말세가 온다고 그러는 거는 자기네들 생각에 따라서 지어지는 얘기들이에요. 그거는 포괄적인 생각이 아니잖아요. 개별적인 생각에 의해서 그러한 생각이 들면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요. 그리고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이런 말들이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 불! 불이라는 그 자체는 자기 각자의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해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돼 있어요. 전체가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문제예요. 마음으로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돼 있지 않겠어요? 그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틀림없이 받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기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주와도 직결이 돼 있는 그 자체를 모르고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는 자체를 모릅니다. 우리는 수명이 짧지만 태양계나 은하계 별성은 수명이 깁니다. 지구 자체도 그렇고요. 지구 자체도 집과 같아요. 우리 몸뚱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길다 짧다 하는 것도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몸을 가축하는데 몸만 혹사를 합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그것도 편안하게 마음을 두고 했다면 별 문제 없어요. 근데 그게 아니거든요.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니까 그냥 울부짖음에 따라서 술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신경을 쓰고 이렇게 되니까 이 집이 망가지지 않겠어요? 우리의 마음이 건실하고 건전하지 못하면 지구도 그렇게 망가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우리 마음은 지구의 대기권에 의해서, 지구에서도 그렇게 마음에 의해서 들이고 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원자에서 입자로 분자가 돼 가지고 대기권을 지키고 들이고 내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고 나가는 건 바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그 작용 때문입니다, 생명의 작용. 우리 인간도 이 몸에, 즉 말하자면 3미터 안팎으로 보호하고 있어요. 인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모습들, 의식들이 털구멍을 통해서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이 소리죠. 그러니깐 세균성도 끌어들이기도 하고 나쁜 거는 내보내기도 하는 겁니다. 이런 작용을 하는데 눈에 보이질 않으니까 믿지 못하는 겁니다.
예전에 말세가 오고 불로 심판을 받는다더니 심판은 다 받고 넘어갔는지 모르지요.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잘못한 대로 받게 마련인데, 지옥이란 게 딴 데 있는 겁니까? 그리고 말세가 오는 것이 딴 데서 오는 건가요? 전부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오는 건데요. 그래서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끌려가지요. 그리고 잘못하지 않으면 안 끌려가는 거구요. 마음에 따라서 끌려가느냐 끌려가지 않느냐 이러는 게 말세인 것이죠.
마음이라는 건 보이질 않아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데 일부러 마음으로 지어서 모두 바깥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는 겁니다. 형제지간에도 그렇고 자식부모지간에도 그렇고 “요놈의 새끼, 그렇게만 해 봐라. 그렇게만 하면 깡통 차기 똑 참하다.” 하는 부모들도 있고 그러는 형제들도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마음속으로다 하는 겁니다. 거죽으로는 욕을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그런다면 바깥으로 꼭 그렇게 되니, 무슨 일을 해도 잘되는 일이 없이 그렇게 만들어 놓게 되는 겁니다.
팔자 운명이 붙을 데가 없습니다. 과거는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없습니다. 배낭 속에 모두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실엔 공했으니깐 없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디 뭐 붙을 자리가 있어서 말세가 오고 뭐가 오고 그렇다는 겁니까?
모두 마음들이 잘못 작용을 하기 때문에 문제는 벌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세를 가져오는 것도 마음이요, 말세를 안 가져오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에 따라서 말세를 안 가져올 수도 있고 가져올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말세가 온다 안 온다에 끄달리지 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마음을 밝히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계의 발전을 위해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20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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