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불교 연결의 선구적 역할
특히 자장 스님의 부모는 여느 부모와 달리 출가를 말리기는 커녕 딸의 출가를 무척 반가워했으며, 그들 역시 20여년이나 연하인 성운 대사에게 귀의하여 깍듯이 스승으로 모셨다. 또한 외손자까지도 출가했는데, 이에 대해 성운(佛光山 開山宗長) 대사는 “자장 스님의 집안이야말로 진정한 불교 집안”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70세를 넘긴 자장 스님도 옛일을 돌이켜보면 감개무량하다고 한다. “출가 40년 동안 온갖 사연도 많았으나, 이제 대만의 불교도 자리를 잡아 대중들이 출가인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누구나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그 당시의 숱한 어려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은 대만의 어느 곳이나 불교용품점이 없는 곳이 없지만, 이러한 것도 수십년전 자장 스님이 타이페이에 처음으로 ‘불교문화 복무처’를 설립한 사실과 깊은 인과관계가 있다. 스님은 당시의 여러 가지 불편한 교통과 세관의 장애를 극복하고 홍콩의 ‘홍콩 불경유통처’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불경을 수입해 들여왔고 나중에는 경전을 출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활동은 대중과 불교를 연결하는 선구적인 역할이었으며, 이 밖에도 중국대륙으로부터 염주, 신발 등 불교용품을 수입하여 대만의 불교문화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대만 최초의 정장본인 <석가모니불전>을 출간, 세계 각지에 유통시키는 등 불교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또한 자장 스님은 사원건축에 문외한이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전문가에 버금가는 수준의 실력을 갖추었다. 대만은 물론 세계 각지의 불광산 사원 건설을 주도하여 대지 매입에서부터 실내 장식까지 일일이 보살폈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은 대만 각지의 불광산 사원은 물론이고 일본 동경별원과 태국, 홍콩, 필리핀 등지에까지 미쳤으며 마침내 미국 서래사(西來寺) 건립으로까지 이어졌다. 1978년 단지 2만 달러만을 지니고 생면부지의 미국에 가서 무려 10년만에 서구 최대의 불교사원인 서래사를 창건하기까지, 스님의 고군분투는 눈물겨운 정진의 연속이었다.
자장 스님의 원력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인근도시 하시엔다 하이츠에 서래사가 세워진 것은 불광산이 국제적으로 교세를 확대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부지 15에이커에 평면면적만 102,432평방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절인 서래사는 대만 불광산의 일선 사찰인 동시에 세계 최대의 신도조직인 국제불광회(180개 지부 100만여명)의 국제단위조직이다.
미국에 서래사가 건립된 이후, 불광산은 미주 뿐만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호주, 인도 등 세계 각지에 대규모의 별원을 건립하여 대승불교를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자장 스님은 스승인 성운 대사의 원력으로 돌리지만, 1년의 절반을 가방 하나만 들고 동분서주하며 건설을 독려한 자장 스님의 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불광산이 대만 불교를 반석으로 올려놓은 데에는 작은 체구로 거대한 발원을 성취한 자장 스님의 쉼없는 정진이 숨어있었다. 가장 인간적인 불교(人間佛敎, Humanistic Buddhism)를 추구하며 대만의 전법제일 비구니로 명성이 높은 자장 스님의 포교관은 이러하다.
“‘인간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순수한 종교활동 외에도 교육, 문화, 자선사업으로 나눠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