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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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6 )아비지의 회한
백제 기술진 황룡사 9층목탑 건립 참여

“탑을 세운 뒤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탑의 영검이 아니겠는가?”

황룡사 9층목탑의 영험함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고 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의 시각이다. 외침을 막기 위해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외침을 막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하는 데에는 드라마틱한 설화가 전한다. 그것은 바로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여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황룡사탑을 조성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백제의 끊임없는 침입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 태종에게 구원을 청하다가 부인의 임금이라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선덕왕이 탑 건립의 문제로 신하들과 의논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의외였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적국인 백제의 장인을 모셔다가 황룡사탑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대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신라의 포용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으로서 적을 물리치는 고도의 전략이라 보아야 할 것인가? 아무튼 백제 기술진을 초빙하여 탑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백제에 보물과 비단을 보내어 기술자를 부탁하자 아비지가 소장(小匠)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아비지가 처음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형상을 보았다. 그는 일을 멈추고 고민하였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둠 속에서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장면을 보고서야 아비지가 다시 그 탑 건립에 힘쓴 것이다. 결국 황룡사 9층목탑이 완성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비지의 꿈처럼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황룡사 복원의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황룡사 9층목탑이 익산 양식에 의하여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백제 기술진에 의하여 지어졌다면, 몸체가 홀쭉한 사비 양식과 뚱뚱한 익산 양식 둘 중의 하나를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황룡사 9층목탑이 645년에 건립되었고 익산 양식의 대표적인 탑인 미륵사목탑이 640년에 조성되었으니, 황룡사 9층목탑은 미륵사목탑과 더 많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경주 남산탑곡마애불을 보면 부조로 새겨진 9층탑이다. 이 마애 9층탑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시기적으로 보아 황룡사 9층목탑에 가장 가까운 형상으로 보고 있다. 이 탑곡의 마애 9층탑도 미륵사탑처럼 뚱뚱한 몸체인 점으로 보아 황룡사 9층목탑이 미륵사목탑과 유사한 형상일 가능성은 더욱 높은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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