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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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믿고 진짜로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디에도 걸리지 말고 거기다 그냥 맡겨버리세요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한 것이 오래 된 것 같습니다. 덕분에 국외지원에 잘 다녀왔습니다. 얼마 전에 백종과 칠석을 지냈는데, 여러분은 어떠한 생각으로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 칠석은 산 사람들을 위함이고 백종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만, 그냥 산 사람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칠’은 몸과 마음 자체를 말하고 ‘석’은 그 마음 깊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형성된 날이나 죽는 날로 쳐도 되고, 아침 저녁으로 쳐도 됩니다. 아침이나 저녁, 불을 켤 때나 끌 때,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이듯이 아침에 불 켜는 그 마음이나 저녁에 불을 끄는 마음이나 동결해서 같이 마음을 밝히려는 뜻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단계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침도 현재 내 마음속에, 저녁도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지요.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온다구요. 그래서 아침 저녁이 따로 없는 마음을 발견해서 밝히는 것이 칠성입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르면 칠석이고, 그 도리를 알면 칠성인 것이죠.
그래서 칠석날은 내 마음을 모아 과거 미래를 한데 합쳐서 내 마음의 깨달음을 밝게 가져오는, 즉 광력을 자재로이 쓸 수 있는 그런 중량을 말합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지 못해서 애를 쓰다가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고 그랬죠.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때는 일 년이지만 그 별성에서 생각할 때는 하루, 일 초를 뜻합니다. 그 수명이 여기가 일 년이면 거기가 하루라고 볼 수 있겠죠, 비유를 한다면. 아무튼 그렇다고 여기서 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이다 방편이다 하지만 해당되게 지어 놓은 말이죠.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만물 만생이 견우직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있으면 인간이 있듯이 모두가 결부돼야 생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납득이 가십니까? 이 모두가 인연이 없으면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발전도 되어질 수 없구요. 창조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으면 칠성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칠성이 되기를 원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밝힌다 이런 겁니다. 내 마음을 밝히지 않는다면 백종에 건질 수가 없어요.
왜 목련 존자를 비유해 놨을까요? 목련 존자가 그 깨달음을 가지고도 열반의 구경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옥문을 열지 못해서 어머니를 건지지 못했죠. 그러나 부처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다시 정진하고 나니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조상님들의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칠석이다 하는 말은 항상 나한테 감추어 숨어 있는 그 마음을 발견해서 불을 켜서 밝혀라 이런 뜻입니다.
칠석에는 깨달아서 칠성이 되고, 백종은 아침과 저녁이 한데 모아진 한마음입니다. 한마음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산 중생이나 죽은 중생이나 할 것 없이 일체 모든 영령들을 건질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눈이 열리는 것도 깨달음에 의해서 눈이 열려야 건질 수가 있지, 깨달음에 의한 눈이 열리지 못하면 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북하면 백종입니까. 하나도 빠짐 없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종날에 상만 푸짐하게 차려 놓는다고 해서 그냥 되는 줄 알지 마십시오. 그리고 재를 지내는 스님네들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한마음이 돼서 건져지겠죠. 항상 둘로 보고 봉투에다 돈이나 넣어서 이름이나 써서 갖다 놓으면 영가가 천도된다 이런 생각은 아예 마세요.
항상 그렇게 얘기하죠. 예를 들어서 내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과 내 육의 조상들과 둘이 아니라고,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자비라고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과 내 부모들의 조상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내 한마음에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마음을 내는 것이 그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조상들의 마음도 내 한마음으로 하나가 돼서 모든 게 탄생이 되든지 승천을 하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마음 자체를 깨달아야만 된다.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이 흩어지지 말고 항상 부모와 일체제불과 모든 일체 중생이 다 한마음 속에 있다, 한마음 속에서만이 빚어진다,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이 전체 한마음에서 들이고 내진다, 이런 거를 강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칠석에도 그 마음에 모든 것을 놓는다면 둘로 보지 않습니다. 둘로 봐지지도 않고요. 그렇게 한다면 부모들이 바로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자기 마음을 훤히 다 알고 부처님도 같이 있기 때문에 툭 터져서 삽시간에 물리가 터져 승천을 하시는 겁니다. 모두 마음의 도리지요.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가 산더미같이 쌓아 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넉넉하지 못하고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불도 밝게 일어날 수가 없거니와 조상님들도 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여러분이 잘 아셔서 하시도록 하세요.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여러분이 모두 견우와 직녀입니다. 다른 먼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견우와 직녀가 울고 웃으며 사연이 많듯이 우리들 만남도 즐겁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즐겁지 못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견우와 직녀 속에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모두가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이 그냥 훌렁 벗어나게끔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석도 아침 저녁이 한데 모아져서 공해버렸다, 그리고 그 공한 도리를 알 때는 그냥 무(無)다, 무조차도 무다 이렇게 됩니다. 그 도리를 알았을 때는 바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상시에 살아나가는 데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입력이 되어서 현실에 스스로 나옵니다. 스스로 나오는 것을 어떻게 커버할 수 있고,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인데, 우리가 지은 거라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겠죠. 콩이 팥이 될 수가 없고, 팥이 콩이 될 수가 없을 겁니다.
미국에 갔을 때 일인데, 흑인이 자기 아이에게 까만 초코렛을 입에 물려가지고 데리고 가는데 너무도 기가 막히더라구요. 흑인은 백인을 낳을 수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거 하나하나 자기가 살아나가는 대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스스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마련이거든요. 지금 현실에서는 잘못했으면 감춰서라도 끌려가지 않을 텐데, 이건 감추고 자시고 할 사이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우주 법계에서 알기 때문입니다.
천당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곧 이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독사같이 살면 독사의 무명을 쓰고 나오게 되죠. 사람으로 살던 의식을 속으로는 가지고 있으면서 거죽으로는 말이나 소의 모습을 가졌을 때, 개구리나 독사의 모습을 가졌을 때, 벌레의 모습을 가졌을 때 그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달리 지옥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그냥 영가로 있는 게 아니라 다시 탄생을 해도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자기가 지은 대로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이런 말을 흘려듣지 마세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는 동안에 항상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뭐든지 항상 ‘나’라고 했기 때문에 죽었어도 항상 ‘나’라는 게 있는 걸로 압니다. 그래서 자기 모습을 환상으로 내어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는 데는 자기 몸속의 의식들이 수십억 마리가 깔려 있으니 한 발자국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악업, 선업의 그 업식이 따라다니기 때문이죠. 둘째는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강 사이를 놓고 빠져 죽을까 봐 건너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물가를 뱅뱅 돌면서 오백 년을 돌아도 배가 오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공부를 하라는 겁니다. 세번째는 불바퀴를 넘어서야 할 텐데 뜨거워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또한 ‘나’라는 걸 놓지 못했기 때문이죠. ‘나’라는 게 공해서,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걸 팽개쳐야 할 텐데 그것을 놓지 못해서 항상 그 업식에 밟혀서 못 나오고, 의식으로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못 나오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가니 자기 갈 길을 넘지 못한다 이런 겁니다. 죽어서 열반이 아니라 살아서 깨달아야 그게 열반입니다. 살아서 깨달아야 열반이지, 죽어서 혼백이 가는 것이 열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말도 할 것이 없지요. 살아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깨닫습니까, 죽으면 살았을 때의 업식이 그대로인데요. 살아생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죽어서도 발자취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놓고 하나 떼어 놓고, 또 하나 놓고 또 하나 떼어 놓고, 이렇게 걸음을 걷지 않습니까. 일체 만법이 다 우리가 걸음 걷듯이 그렇게 놓고 돌아가는 겁니다. 항상 얘기해드리죠. 그렇게 놓고 간다고요. 자연스럽게 아버지 노릇 하고, 자연스럽게 남편 노릇 하고, 자연스럽게 형님 노릇 하고, 아들 노릇을 하며 이렇게 돌아간다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갈 때 어떤 거 하나를 꼬집어서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는 게 공한 도리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로 할 땐 실감이 안 납니다. 자기가 지옥고에 들어서봐야, 정말이지 이것은 이렇게 할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아들을 뒀는데 어떻게나 이쪽으로 가라면 저쪽으로 가면서 청개구리 짓을 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산에다 묻어다오.” 그랬거든요. 그러면 물가로 갈 줄 알고요. 그랬는데 그렇게도 말을 안 듣던 자식들이 살아생전에 늘 말을 안 들었으니 돌아가신 후에나 말을 듣겠다고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뭡니까? 그런데 막내아들한테는 “나 죽으면 물에 넣어다오. 관을 물에 넣어다오.”라고 따로 유언을 했었기에 막내아들이 밤중에 몰래 지게를 대어 놓고는 져다가 강물에 관을 넣는데 쩍 벌어지면서 그냥 들어갔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는 큰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들이 모두 죽고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죽어서 저승 천자가 되고, 아들들은 죽어서 소가 됐어요.
막내아들이 꿈을 꾸니까 소가 되어서 전부 외양간에 매여 있더란 말입니다. 꿈에 “음메!” 하면서 눈물을 줄줄줄 흘리고 그러니깐, 아버지가 있다 하는 소리가 “저것은 너의 큰형이고 저것은 너의 작은형이고 저 소는 너의 셋째 형인데, 말을 안 듣고 남에게 해꼬지를 하고 그랬으니 소가 되어 남의 일을 해줘서 그 언짢게 한 것을 다 갚아야 하느니라.” 하더랍니다. 그러니 아무리 음메 음메 하고 소리를 내도 소의 무명을 쓰고 나왔으니, 자기는 아무리 말을 해도 사람이 못 알아듣죠. 자기가 당해보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니깐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한 철 나는 동안에 열심히 내 탓으로 돌리고, 남을 원망치 말고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부드럽게 말해주고, 부드러운 행동으로서 모든 일을 내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게 바로 내 마음 발견하는 데 지름길입니다. 모든 거 내 탓으로 돌리고 구녁 없는 구녁에다 모든 것을 놓으면 거기서 일체 만법이 나오는 것이죠.
이런 말을 안 할래도 안 할 수가 없는 게 여러분이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여러분이 살지 다른 사람이 살아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못 믿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이끌고 다니면서 그렇게 살아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길을 가다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잘못된 일도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지, 딴 데서 보태주거나 뺏어가거나 그런 게 없습니다.
그리고 재(齋) 지내는 도리, 이것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도 얘기했듯이, 최씨라는 분이 천도를 시킨다고 절마다 다 다니면서 해도 천도가 안되더랍니다. 안되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꿈에 조상들이 나타나서는 보따리를 들고 저길 나가다가 도로 들어오고 도로 들어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는 내게 온 겁니다, 이제. 그래 지내고 싶으면 거기 깔고 앉았던 방석 있죠, 거기다가 놓고 절하고 가라고 그랬죠. 아, 그러니 그 사람으로서는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그냥 차려 놓고 지내도 안되는데 아니, 방석에 그냥 놓고 저 방석에 하고 가라고 이러니 그거 믿겠습니까? 그러나 고개를 꺄우뚱하면서 거기다 놓고 갔습니다, 절을 하고.
그랬는데 그 이튿날 오더니만 “아이고, 천도가 됐다.”고 하면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그날 저녁에 꿈을 꾸니까 구름을 타고 선녀들이 내려와서 조상님들을 모시고 구름을 타고 모두 올라가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뒤에 그 가문이 일어난 겁니다. 가발공장을 했었는데 담뿍 일어나서 큰 부자가 된 것이죠.
그랬듯이 여러분의 마음이 문제죠. 제삿상을 차려 놓으면 스님네들이 얼마만큼 차려 놨다는 걸 알고 있는데, 영령들이 들어와서 뭐부터 보느냐 하면 스님네들 마음부터 보거든요. 마음부터 읽는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네들이 상 차려 놓는 것하고, 또 돈 얼마 가져온 것만 알고 있으면 거기 들어와서 그렇게만 아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목탁소리는 우주 법계에까지 들립니다. 그래서 문이 탁 열렸으니 상을 안 차려 놨어도 그렇고, 차려 놨어도 그렇고 모든 게 내 것 아님이 없고,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영령들이 그 스님네들의 마음과 하나가 됐는데 뭐를 바라겠습니까. 바랄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깐 그대로 거기 한데 합쳐져도 두드러지지도 않고 자동적으로 풀려서 제도가 되어도 줄지 않는다 이거죠. 그런데 물건을 많이 사다가 상에 온통 놓고 지내면 잘 지내주는 줄 아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재물을 안 차려 놓으면 ‘상도 안 차리는데 돈은 조금 내도 되고 안 내도 되지 뭐.’ 이렇게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옥고를 헤맬 때, 그것을 면하시기를 바라면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죠.
사람의 모습만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면서 지은 대로 콩 나고 팥 나듯이, 그렇게 모습을 쓰고 나오는 것입니다. 오간지옥이란 것은 땅 속에서 바깥에 나오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지옥고에서 벗어나려면 단 하나의 마음, 즉 영령을 건져서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 해놓는다면 금새 제도가 되겠죠.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내고 또 지내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의 무명을 벗기기 위해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너가지 못하는 것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지내고,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못하고 업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지내기도 하는 것이죠.
영령들은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기 때문에 열도 되고, 백도 되고, 스물도 되고 이럽니다. 돌아가셔서 천도를 했으면 제사도 안 지내야지 왜 지내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자식이 된 도리죠, 잘됐든 못됐든 자식이 된 도리예요. 묵은 빚 갚아야죠. 자기가 은혜를 못 갚으면 자기 대에서 또 자기 은혜를 갚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허명무스름하게 떠넘기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상을 차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가지라도 뜻있게 해서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떡 한 그릇이 되남도록 해라 이겁니다. 물과 초, 향 그거면 족하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모든 빗방울이 바다로 돌아간들 빗방울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바닷물이라고 하죠. 수만의 영령들을 한마음에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집안이 더 깨끗하고 더 청정합니다.
천도를 스님네들한테 청하되 무엇을 많이 차려놓는 걸 바라지 마십시오. 찹쌀가루를 해서 제사 지낼 때 둥그렇게 그냥 부쳐서 아홉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세 조각 이렇게 해서 놓고, 초 향 물 이렇게만 해놓고 지내신다면 그것으로써 족합니다. 환란이 없어져요. 왜냐하면은 나물 먹고 떡 먹고, 뭐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렇게 하는 의식들은 벌써 그건 아주 하의 중생들의 얘깁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조상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냥 떡, 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 의식을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놓고 마음속으로 예배를 올리면, 그리고 절을 삼정례(三頂禮)를 할 때에 맨 끄트머리에 모든 것을 한데 모아서 내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걸 맡겨놓고 일어난다면 아주 그것이 극히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천도를 시켜달라고 할 때 스님네들이 어떻게 하든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떡 한 그릇을 놓고 하든지 물 한 그릇을 놓고 하든지. 외국에서 천도를 시켜달라고 그래서요, 초하고, 물하고, 향 하나 하고 이렇게 해서, 그거 아니라도 되는데 그거라도 방편으로 하는 거죠. 그러면은 그날 저녁에 틀림없이 나타나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는 거죠, 벌써 영령들은 알거든요. 그렇게 해서 지내주고 다녔죠. 그 뭐 다니면서 목탁 들고 다니나요? 그리고 외국에 나가 있을 때 한국에서 천도해 달라고 보내도 “알았다.”고, 그게 천도지 뭐 다른 건가요. 내 마음이면, 이 마음이라는 이 자체는 아주 작다면 작고, 없다면 없고, 있다면 이 삼천대천세계를 싸고도 남아요.
그러니 그 관습에 젖어서 무슨 이사를 갈래도 못 가고 날짜를 봐야 하고, 제사를 지내도 왕창 차려놓고 해야 하니까 “아휴, 그냥 바쁘기는 한데 이런 거 해야 하고, 제사가 왜 이렇게 많아?” 하고 그냥 잔소리 군소리 죄 할 거 다 하게 만들어요. 그렇게 간단하게 하면 군소리 할 것도 없고, 바쁠 것도 없고 그리고 정성은 정성대로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처럼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못 사는 세상에. 그러니 시대가 발전이 되고 과학, 의학 모든 것이 발전이 된다 하면은 우리 인간도 좀 달라져야 그 발전에 대비를 할 수 있어요. 마음이 발전이 돼야 모든 게 물질도 발전이 돼서 나오죠. 마음의 발전이 없는데 어떻게 물질이 발전이 돼서 나오겠습니까? 질문하실 것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 네 가지를 스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첫째, 스님께서는 주인공에 놓고 맡기는 것 외에는 다른 수행 방법을 강조하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좌선이 좋은 수행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생활이 곧 참선이다 하는데 과연 생활 중에 모든 언행을 곧 참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얼른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생활이 곧 참선이라는 말씀의 참뜻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저 평상시에도 항상 강조하는 게 그건데, 처사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죠? 일상생활의 일거일동 말입니다. 이 세상이 형성된 것부터 죽는 것, 사는 것,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 전체를 누가 합니까? 자기가 하죠. 자기가 하고 자기가 내고 하는 것을 들어서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앉아도 참선이요, 서도 참선이요, 누워도 참선이요, 또 일을 해도 참선이니, 행선 와선 입선 좌선을 한데 합쳐서 생활하는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다 이런 소립니다. 일일이 참선이다, 참선이 아니다 따지지 말고, 일상생활 모든 걸 내 마음속에서 하며 들이고 내는 것이 한마음이다 생각하고, 거기다 믿고 놓으며 돌아가면 이것저것 따로따로 챙길 것 없이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렇게 놓는 반면에 지켜보고 관하는 겁니다.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뭐 별다른 게 참선이 아닙니다. 일일이 다가오는 거 거기다 맡겨 놓고 그냥 걸어가는 겁니다. 오늘도 차를 타고 오다 사고가 난 걸 보았는데, 차가 망가져도 운전수 탓이요, 차를 받쳐도 운전수 탓이지, 차를 가지고 누가 말하는 사람 없더라구요. 차 운전수 붙들고 야단이죠, 안 그럽니까? 그렇기 때문에 몸뚱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운전수, 그 운전수가 모든 걸 해나가는 것이니, 운전수에다 모든 걸 한데 모아서 맡겨 놓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그리고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너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너만이 할 수 있어. 가고 오고 하는 것도 다 너만이 알고,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으며 이끌어갈 수 있어.’ 하는 것이죠.
▲질문자1: 두번째는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짐작하기로는 여여하게 자유인으로 생활한다는 뜻으로 사려되옵니다만, 그렇다면 마구니가 온다 해도 막지 않고 부처가 간다 해도 붙잡지 않는 것인지 한 말씀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 우리가 수행을 하려면 가는 것 일부러 쫓아가서 잡고 이러기보다는 가는 것 잡지 않고, 오는 것 막지 않고, 하다못해 부처가 온다 하더라도 꿀꺽 삼킬 수 있고, 또는 마구니가 온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수 있어야만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깨닫지 않으면 이 도리를 납득하지 못합니다, 가는 것 잡지 않고 오는 것 막지 않는다는 이 뜻을 말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거든지 걸려서는 안 되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그대로 법인데 뭣 때문에 간다 온다 야단법석을 하겠습니까? 공부하는 도중의 수행자는 그렇다 이겁니다.
▲질문자1: ‘주인공, 당신!’이라고 하게 되면 마치 주인공이라는 대상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 맡기고 그것을 관하는 줄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주인공’을 자주 생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을 대상화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스님: 그러게 누가 상대를 두고 ‘주인공, 해주시오!’ 하라고 했습니까. `‘네 몸뚱이 고장났으면 네가 고쳐서 끌고 가라.’고 놓고 ‘네가 잘못했으면 네가 해결해.’ 그러고 놓으라고 그랬고, ‘네가 벌려놓은 거니까 네가 수습해.’ 하고 놓으라고 그랬죠. 그것은 마음 없는 마음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둘로 보지 마세요. ‘주인공!’ 하고 상대를 놓고 해달라고 한다면 아니 됩니다. 그것은 벌써 잘못 들어가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네 몸뚱이 만든 것도 너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너니까 네가 건강하게 끌고 다녀라, 이렇게 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놓을 수 있는 마음이 진실해야 됩니다. 장난처럼 그냥 아무렇게나 해버리는 것은 핀트가 맞지 않습니다.
어떠한 거든지 둘로 보지 마시라 하는 그런 얘기를 예전부터 많이 해드렸습니다.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를 하고, 형성을 해서 모든 게 돌아온 이 자체를 볼 때에 헤어졌으면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렇게 하는데 어떠한 부모가 됐을 때 부모라 하고 어떠한 자식이 됐을 때 자식이라 할까 하는 겁니다. 그랬을 때는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는 것이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마음이야 어찌 다르겠습니까!
▲질문자1: 네번째는 오조 홍인대사께서 육조스님께 의발을 전하신 뒤 길을 떠나라고 하시니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회(懷) 자 같은 고장에서는 머물고 회(會) 자 같은 데는 감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인대사께서 하신 말씀을 스님의 뜻으로 가르침 받고자 합니다.
▲스님: 이것을 뜻으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는 그건 자기가 가는 거지, 누가 대신 가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 뿌리와 나무 가지 잎새 열매가 모두 익어서 제대로 맛을 내는 자, 즉 그 도리를 아는 사람한테는 거기 머무르며 행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머물 때는 감추고 행하지 마라 이 소립니다.
▲어린이: 큰스님, 한마음 내어주세요.
▲스님: 왜?
▲어린이: 주인공 공부 열심히 하려고요.
▲스님: 좋았어. 그래. 한마음을 내달라고 안 해도 네 마음으로 한마음을 낸다면 한마음이 된단다.
▲질문자2: 저의 안식구가 두 달 전부터 원인 모르게 어지럽고 일어나지를 잘 못하고 그래서, 울산 부산 여러 병원을 다녔는데 별 검사를 다 해도 아무 이상도 없다고 하는데 이 원인이 과연 어디 있는지 몰라서 답답하고 괴로워서 스님께 말씀드립니다.
▲스님: 처사님이 모르시는 걸 내가 어찌 압니까마는, 하여튼 처음 오셨습니까?
▲질문자2: 예.
▲스님: 그러면, 오늘 관하는 것만 알고 가신다면 저녁부터라도 나을 수 있는데요. 어느 보살네가 원주에서 교육감으로 있을 때인데, 어느 날은 그 집에 내려왔는데 별안간에 허우적허우적하면서 어떤 사람이 오더니만 뇌염에 결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뇌염에 많이 걸렸을 때였어요. 뇌염에 걸려서 몸을 비틀고 그러는 애들이 20명 된대요, 병원에. 그런데 자기 애도 그렇게 됐다고 하면서 거길 왔더라구요. 그때는 지금처럼 놓는 도리를 가르쳐 주지도 못했으니까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3분이 안 돼서 정상이 되어 밥을 먹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법을 모두들 왜 공부 안 하겠어요? 자기 자성신은 외면하고 타신을 믿고, 뭘 해달라고 온통 야단법석들이니 부처님께서 49년 설하고 가르쳐주신 길을 어디 가서 찾죠?
▲질문자3: 저는 지금 자연과학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자연과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거기서 느껴지는 어떤 의문이 많이 있었는데 불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진리를 얻는 방편이 세상에 있습니까?
▲스님: 불법 아닌 게 하나도 없는데…. 불법이란 뭐냐?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이야. 생명이 있으니깐 불이지. 그래서 생각을 하고 응용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게 법이야. 생활이 그냥 법이란 얘기지. 내 생명, 영원한 근본, 근본이자 생활이지. 그런데 어떻게 생활을 벗어나서 불법이 따로 있을 수가 있나, 불법 아닌 게 하나도 없는데.
▲질문자3: 불성 자체에도 불성이 있는 겁니까?
▲스님: 불성이라는 것은 어느 것에도 불성 없는 게 없어. 우리가 이 세상 나기 전에 암흑세계에서도 바람과 흙과 물과 같이 생명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성이 있는 거야. 그 불성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인연이 된 거야. 삼합이 한데 합쳐지자 거기서 온기가 생기니까 불도 거기서 생긴 거지. 한데 합쳐서 생명이 생긴 거야,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해서 생명이 생기니까 광력을 얻은 거야, 광력이 얻어지니까 생산이 된 거지. 미생물로서 생산이 돼가지고 수없이 겪어왔어. 공룡시대, 무슨 시대 하고 겪어오면서 발전이 된 거지. 그래 인간까지 발전이 된 거야. 인간은 맨 나중에 나왔다 하지.
그러니까 어떤 거든지 불성 없는 것은 없어. 생명이 있다 하면 다 불성이 있는 거지. 이런 컵도 우리 마음과 인연이 되고 연결이 되었으니까 이것도 살아 있는 거야. 컵이라는 것을 봐주고, 써 주는 인연이 있고, 담고 써 주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게 살아 있는 거지. 이게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거라구. 움죽거리고 있다 이 소리야.
▲질문자4: 스님을 오늘 뵈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도 자꾸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이러는데 스님 조금만 용기를 주십시오.
▲스님: 몸하고 마음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공부하는 데. 물론 몸이 아프면 마음이 허황해지고 그렇게 되지만, 진짜로 믿고 진짜로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아픈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그냥 맡겨 놔버리고, ‘네가 형성시킨 네 몸뚱이 네가 끌고 다니는 것, 건강하게 끌고 다니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라.’ 하고 맡겨 놓고 가는 길이지, 공부하는 데 뭐가 그렇게 걸립니까?
▲질문자4: 예, 조금만 용기를 주십시오.
▲스님: 용기를 누가 주고 말고 합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 하는 데 대해서 용기를 잃지 마시고 어떠한 게 닥친다 하더라도 공부하는 재료로 알고, 어떠한 게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발전하는 데 기본적인 모든 재료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모든 것을 해나간다면 정말 용기 잃지 않게끔 벌어질 겁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란 정말이지 역대의 조사들과 부처님이 인도하신 길입니다. 체험하고 나가다 보면 이 세상살이가 전부 팔만대장경임을 알게 됩니다. 과거도 미래도 변치 않고 오늘도 공해서 돌아가는 이 자체, 이 진리가 그대로 팔만대장경입니다.
여러분, 모두 공부 열심히 하셔서 살아나가는 데도 어떠한 고통, 어떠한 병고, 어떠한 재난도 자신들이 모두 커버해 나가면서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직선적으로 나가는 공부를 하는 것이니 열심히들 하십시오.
200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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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