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자비의 경제윤리 2
공업중생 정신 바탕…분배에 더 비중

재산을 많이 얻는 것이 일반인들의 소박한 소망이다. 물론 화폐경제의 발달은 재산을 화폐로 계량화한다. 그러나 과거로 올라가면 재산이란 재화 즉 생산물의 과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재산을 많이 얻는다는 것은 생산을 많이 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도 이러한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상황은 농업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내 수공업이나 무역업 등의 상업도 번창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작과 상업을 동일한 효용이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일이 많아 맡은 일이 많고, 많은 노력이 필요한 업무와 일이 적어 노력이 적게 드는 업무가 있다. 전자는 경작이고, 후자는 상업인데 실행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과보가 얻어지지 않는다”(남전장경 중부경전)고 말한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농업과 상업에 한정하여 설명했지만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라 본다. 부처님께서 일반인들에게 가르친 가르침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던가는 <금색왕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가지가 다름은 없으나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는 말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라는 점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약간의 불편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점에 가르침의 핵심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재산을 얻기 위해서는 훈련과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다. “처음에 기술을 배우고 그 다음에 재물을 구한다”(선생경)는 가르침이 그것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울사가라라는 소년이 부처님에게 건전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을 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4가지 방편을 구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업을 선택하여 열심히 일하는 방편구족과 재산을 잘 지키는 수호구족, 훌륭한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선지식구족, 절망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빠지지 않는 정명구족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산을 얻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나의 조건으로 대답한 것이다.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부처님은 훈련과 지식의 획득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이상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조금의 과장이나 현실 도피적인 생각을 통해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아는 여실지견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한 국민의 부는 축적된 자원이 아니라 해마다 생산되는 생산물이며, 그 원천은 노동이다”라고 말했으며, 슘페터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기술혁신”이라 설파한 바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노동과 재화를 창출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사회발전의 동력이라 볼 수 있는 데, 부처님 역시 우리들에게 부단한 노력과 기술개발, 근면한 노동을 통해 건전한 사회생활을 유도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부처님께서 이상과 같이 생산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기실은 생산의 문제보다는 분배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인도의 자연환경이 생산에 집착하지 않아도 최소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자연적 환경의 영향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공유정신이 분배를 강조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연기적 세계관에서 바라본다면 나의 소유물은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룩된 것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소유하고 보관할 뿐이지, 결국은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느 사회의 공동체 일원 모두의 공유재산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운명과 직간접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나의 삶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업중생’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나의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경제관은 생산과 이익에만 집착하는 서구 자본주의 정신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는 돈을 버는 목적이 나와 이웃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12-10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