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불교 국제화에 앞장
지난 백여년 동안 중국은 국력이 약해지고 서구 열강들의 침략에 의해 할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한 이래 여러 부문에서 침탈을 당해 왔다. 그 중에서도 천주교나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무력과 의학을 앞세워 선교에 앞장선 결과 중국에도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와중에서 불교가 대만에서 다시 불교의 싹을 틔웠지만, 1950년대의 대만 사회는 불교적 풍토가 메마르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척박한 시기에 불문에 뛰어든 묘령의 여성이 있었으니, 그 분이 곧 대만 비구니계의 원로인 자장(慈莊) 스님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대만은 불교 국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법이 온 나라에 전해졌지만, 이제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이 홍안의 노 스님은 아직도 국내외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다를 끼고 산에 의지해 있는 타이완 이란(宜蘭)의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자장 스님은 이미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스님의 부친인 이결화(李決和) 거사는 독실한 불자로서 고향의 노인들과 후배들을 위해 자주 타이페이에 가서 스님을 모셔다 설법을 듣도록 했다. 그러던 중 1952년 중국불교협회의 이사선출 회의에서 젊고 열정적인 성운(불광산사 개산종장) 대사를 만났다. 그 해 말, 성운 대사는 이 거사의 초청에 응하여 이란의 뢰음사(雷音寺)로 왔다.
자장 스님의 부모는 매일 같이 성운 대사가 머문 뢰음사에 가서 여러가지 일을 도우면서 설법을 들었는데, 이 거사의 딸 중에 둘째인 신타오(新桃)가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이 신타오가 뒷날의 자장 스님으로서, 그 당시에 뛰어난 성적으로 난양여고를 졸업하고 학교의 교무처에서 일하는 신여성이었다.
신타오가 불교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뢰음사에 열심히 다니는지 궁금해서 절에 가 본 것이다. 특히 불교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미신으로 여겼던 신여성 신타오에게 성운 대사의 설법과 대중을 이끄는 법력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던 중 1954년 구정 무렵, 성운 대사가 신도들을 이끌고 신주(新竹) 사두산이란 곳을 참배하게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신타오도 동행하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성운 대사에게 깊은 감화를 받은 신타오는 시간만 나면 성운 대사가 머무는 절에 가서 자원봉사를 했다. 이 당시 그녀는 아버지가 설립한 이란에서 가장 큰 대안백화점에서 경리 일을 돕고 있었는데, 출근시간 전이나 퇴근 후에도 틈을 내어 절에 가서 봉사를 했다.
1965년 성운 대사가 까오슝 수산사(壽山寺)를 낙성하고 출가 제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자장 스님도 법운사(法雲寺)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성운 대사를 모신 지 거의 10여년만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불교계에 신타오와 같은 신여성들이 뛰어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계속)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