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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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답게 참인생을 살고 진짜 자비를 베풀 수 있어야
죽고 사는 양면을 다 놓아야 빛 광명이 딱! 번쩍 일어나죠

믿으려 해도 확신이 서지 않아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나의 근본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하시는데, 믿으려고 해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왜 굳이 이 마음공부를 꼭 해야 하는지요? 마음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좋은 일만 하면서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지요?

아주 간편하게 나무로 비유를 하죠. 여러분이 나무들을 보시더라도 모습은 각양각색으로 다르지마는 뿌리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들 뿌리가 말입니다. 꽃나무든 버드나무든 소나무든 간에 다 자기 뿌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없으면 이파리도 줄기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도 역시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생명의 근본, 주인공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말을 하게 되고 움죽거리게 되고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다른 형상을 믿고 살려고 합니다. 형상을 믿는다는 말은 이름을 믿고 상대를 믿고 의지하려는 기도방식으로 나간다 이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공덕이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공경하고 스님들한테 옷을 해 드리고 공양을 해 드리고 절을 지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이기 때문입니다.
왜 기복이라고 그러느냐? 내 나무는 내 뿌리하고 정맥 동맥이 상통하듯 그렇게 돌아갑니다. 뿌리와 나무가 위에서는 공기, 태양,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아래에서는 땅의 지기와 철분과 수분, 모두를 흡수해서 위로 올려보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쪽만 있어 가지고는 다른 한쪽이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시는 게 물질세계의 한쪽만 가지고 사는 겁니다. 물질세계 50%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정신세계 50%가 부족하죠. 즉 말하자면 사람이 동맥은 있는데 정맥이 없다거나 정맥은 있는데 동맥이 없다거나 이런다면 아예 사람 구실을 못하죠. 그렇듯이 내가 내 뿌리를 믿어야 그렇게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내 뿌리를 믿지 않고 내 나무가 울창한 딴 나무를 보고 ‘아이구! 저 나무가 저렇게 큰데 나에게 에너지를 좀 주었으면…. 나를 잘되게 했으면.’하는 것이 기복입니다. 그 나무에서 이쪽 나무뿌리로 올 수가 없거든요. 이 나무로는 절대로 올 수가 없습니다. 또 딴 나무뿌리가 이쪽 나무를 도와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이웃에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먹고 싶어하면 조금 줄지언정, 즉 복은 조금 있을지언정 공덕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뜻을 자세히 파악하시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한 철 나는 건데 그 한 철 동안에 어떻게 해야 옳으냐는 것을 잘 판단해 보셔야 합 겁니다. 그러니 기복으로 하는 건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복으로 한다면 주변 동네에서 쌀이나 몇 됫박 얻어먹을 뿐이지, 내가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해서 내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 나무는 내 뿌리를 믿고 ‘주인공 뿌리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우리 가정을 이끌어 줄 수 있고, 우리 모든 식구를 다 밝게 살게 할 수 있다. 스위치 하나만 올리면 우리 가족 전체가 다 불이 켜져서 밝게 살 수 있다.’ 하는 거를 믿으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여러분 내면에 생명체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데 그 가득 차 있는 생명체들이, 의식들이 누구인 것입니까? 한 부분만 파워가 일어나도 지금 그 집합소는 무너져요. 바로 이 몸이 집합소거든요. 그리고 내가 나를 다스려서 이끌어 가는 선장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이 몸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과거로부터 생긴 건데 그 업식들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번뇌다. 의식들이 모두 마구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게 못 되지요. 그 악업 선업, 업식들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이 정자 난자를 빌려서 이 세상에 출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빠도 나쁘다고 할 수가 없고 좋아도 좋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진리죠. 알고 보면 그렇게 묘한 법입니다. 나쁜 것을 습관적으로 나쁘다고만 하지 않는 것이 넓은 마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어린애들한테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관하는 도리를 집에서 가르치셔야 합니다. 그거는 재산을 주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보배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형성시킨 자기를 믿으라는 데 왜 못 믿겠습니까? 이 마음공부는 남녀노소를 막론해 놓고, 재산이 있든 없든 가난하든 부자든, 못났든 잘났든 그거를 떠나서 참자기를 발현하는 길이요, 또 짊어지고 나온 업식을 녹여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공부입니다.

함이 없이 선을 행하려면

불교의 수행관인 ‘칠불통게(七佛通偈)’에 보면 “일체의 악을 짓지 말며 모두의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일체 악행을 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는 대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을 돕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반면에, 제 마음 안에 도움을 주는 나와 도움을 받는 상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상이 없으면서, 함이 없이 선행을 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예를 들어서 한번 얘기해 볼까요? 내가 어디를 가다 보니까 장님을 눈 뜬 사람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노래를 시켜요. 노래를 시키고 나서 그 사람들은 피해서 숨어 있더라고요. 나는 숨어 있는 걸 알지만 딴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그런데 그 추운 데 떨면서도 처량하게 그냥 노래를 해요.
그랬을 때에 내가 주머니에 있는 거를 얼마라는 걸 생각지도 않고 듬뿍 집어서 줄 때, 내가 그걸 주기도 부끄럽더라고요. 뭐가 부끄러우냐. ‘저 상황에 그래도 그걸 뭐 준다고 저렇게 남 보게 저러나.’ 이것도 내 마음입니다. 그렇죠? 내 마음이라고요. 그래서 슬그머니 가는 척하고 그냥 그쪽을 보지 않고 줄 때에, 그것은 마음에서 준 거죠. 체가 없는 마음에서 준 거지 내 육신은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그죠? 손을 넣어서 심부름만 했을 뿐이에요. 그러면 내가 했다 내가 줬다고 생각할까요? 잠시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그 순간 심부름만 했을 뿐이에요.
머슴은 주인이 “야, 쌀가마 가져오너라!” 그러면 쌀을 덜렁덜렁 지고 와서 턱 부려 놓고선 지게 갖다 놓고 그냥 나가면 그뿐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이거예요. 쌀가마니도 자기 것이 아니고 그냥 시키니까 그냥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쌀가마니에도 착이 없고 아무에게도 착이 없는 겁니다. 이쪽에도 착이 없고 저쪽에도 착이 없죠, 머슴은. 그렇죠? 그런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없이, 내가 했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보니까 그냥 손이 들어가서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심부름이라는 것도 말이니깐 이렇게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했다 하면 좋은 일을 자기 혼자 했나요, 좋은 일을 했게? 그리고 또 누굴 위해서 했나요, 주었다고 하게요? 그리고 또 받은 사람은 뭐 날 위해서 받았나요, 받았다고 하게요?
그래서 육신이 없을 때 받으려고도 하지 말고 육신이 있을 때 받으려고 하지도 말아라 이겁니다. 아무 것도 받을 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 장님이 나인 것입니다. 똑바로 말하자면 장님도, 바로 그 부르고 서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고 나이기 때문에 내가 준 것도 없지만, 그냥 그 손이 내 손이고 내 손이 그 손이고, 바로 그 눈이 내 눈이고 내 눈이 그 눈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내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어요. 그 사람에게 내가 준 것도 없고 그 사람이 받은 것도 없다 이 소리입니다.
예전에 저격을 받아서 죽을 뻔한 교황이 저격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해줬다는 신문내용을 보고서 어느 신도가 참 훌륭하신 분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설사 누가 나를 모함을 해서 총으로 쏴서 죽게 하더라도 “그놈이 나를 죽였어.” 이러지도 말고 “그놈을 용서한다.” 이런 말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 쏜 놈이나 쏘는 걸 받은 놈이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도리를 알아라 이겁니다. 그렇지만 가다가 왜 멈췄나. 그리고 곱게 앉아서 가시게끔 만들어졌느냐. 그거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죽이려고 다가오는데 바로 다가오는 그 모습이 자기 모습이요, 그 마음이 자기 마음이기 때문에 멈춘 겁니다. 자기를 자기가 죽일 수는 없어요. 그 도리를 알라 이겁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말을 하죠. 물 부처나 불 부처나 흙 부처나 바람 부처가 내 몸에 그대로 지금 살고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내는 거와 마음내기 이전과 같이 삼합이 한데 합쳐서 공전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같이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이겁니다. 다르다 다르지 않다, 이게 이해가 간다 안 간다 이런 사단을 마음으로 벌이지 마라 이겁니다. 벌이지 말고 닥치는 대로, 즉 말하자면 앞에 있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저 멀리 있는 거 가서 찾으려고 애 쓰지 말고, 부처님이 증득하셔서 그렇게 성스럽고 그렇게 좋다는데 하고선 멀리 그냥 바라보면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찾지 말고 이 못난 자기 부처부터 알아라 이겁니다. 자기부터 알아라 이거예요. 자기부터 알면 그 부처님은 스스로 알게 돼 있습니다.
왜 아까 내가 주는 것도 창피했다 했느냐 하면, 그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창피했던 겁니다. 내가 떳떳하고 내가 잘났다고 생각을 했다면 떳떳하게 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모습이 내 모습이고 내 모습이 그 모습이기 때문에, 그가 또 나이고 내가 그이기 때문에 눈물을 금할 수가 없는 겁니다. 눈물 날 것도 없죠, 뭐 사실은. 그러나 내가 그 순간 찰나에 그가 나이기 때문에 고만 ‘아이휴, 쯧쯧쯧쯧!’ 이렇게 된 것은 각각 본 게 아닙니다. 나로 본 거예요. 주변에 나를 뜯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있는데 그 뜯는 놈도 그렇고, 이렇게 해서 사는 놈도 있고, 이것이 바로 나 못난 탓이 아닌가 이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탓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마음을 그렇게 성스럽게 내면 자기가 어떠한 직원들을 부린다, 또는 어떠한 회사든 은행이든 정치든, 사회든 어디든 막론하고 다, 마음이 그렇게 거기 들어오는 사람마다 유순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정히 인연이 닿지 않아서 아주 그냥 막된 사람은 거기서 스스로서 떠나게 돼요. 누가 뭐 가라 말아라 할 거 없이 스스로 아예 떠나게 되는 겁니다. 떠나게 되고 추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그것도 ‘넌 이건 안 되겠는데….’ 이런 생각을 한 인연으로써 그 사람은 다시 돌아와서 또 그런 좋은 인연을 또 맺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 빠르다, 좀 연장된다 이것뿐이지 항상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비라고 한 뜻이 뭐냐. 울어도 같이 울고 웃어도 같이 웃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베풀어 주기만 해서 자비가 아닙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는,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니 죽여도 그건 죽임이 아니라 외려 살린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내게 준 새도 없고 내가 받은 새도 없다 이 소리나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가게 가서 물건을 살 때 그 가게 주인 잘살라고 돈 갖다 준 겁니까?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 오기 위해서 가지고 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돈을 주긴 줬는데 물건은 내가 가져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준 새도 없고 그 사람이 받은 새도 없다 이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안 그런가. 그러니 너나 나나 똑같다 이 소립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 바로 그거예요. “너하고 나하고 둘이라면 받은 새도 있고 준 새도 있고 내가 가르친 바도 있고 가르치지 않은 바도 있지만, 나는 너를 제도한 바도 없고 내가 제도해 준 바도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소리를 한마디 하면 고 소리로만 알아듣지 말고 좀 넓혀서 모든 것이 종합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행을 한다고 하면서 했다는 생각을 하고 한다면 그건 상대를 둘로 보는 마음이고, 그런 마음으로 행한 보살행은 공덕이 될 수 가 없기 때문에 선행마저도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 내도 이루어지지 않아

스님, 처음 공부할 때는 마음을 내면 모든 것들이 술술 풀려나갔는데 언제부터인가는 마음을 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생깁니다. 마음을 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주인공을 ‘부(父)’라고 한다면, 부와 자(子)가 둘이 아니다 하는 거는 공한 자리에 같이 있다는 말이에요. 같이 있는데도 자기 마음이, 사량을 내는 마음이 비닐 막 쳐 놓듯이 막을 쳐 놓고선 자기는 그걸 모르는 겁니다, 자기한테 있는 거를. 그렇기 때문에 그 ‘자’는 ‘부’한테 모든 걸 일임하고, 안되는 거 되는 거 모든 걸 부한테 일임했을 때, 믿고 일임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요구하는 것도 거기에서 요구를 해야 돼요. 그렇게 해서 나갈 수 있다면 바로 ‘부’자리와 ‘자’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합일이 돼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데 ‘아이구, 이건 안된다.’ 하면 그 안된 것도 바로 그 부처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러니까 ‘당신께서 실험하기 위해서 이건 안된 거니 당신이 조치를 취해서 길을 인도하시오.’ 한다면 그건 다시금 돌아가요. 그런데 잘되는 일은 거기에서 한다고 하고, 안되는 거는 ‘아이구, 이거 안되게….’ 하면서 자꾸 생각으로 끄달리고 바깥경계에 끄달리면서 안달박달하면서 여러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인공에 관했는데도 왜 안되느냐고 그러는데, 진짜로 믿고 놓았다면 왜 안되겠습니까. 만날 자기 이외의 주인공으로 아니까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진짜 자기라는 걸 어찌 모릅니까? 자기가 하고 자기가 거두는 걸 어찌 모릅니까? 그러니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그 모두가 주인공에서 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잘 굴려서 거기 맡겨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게 있죠. 하인을 뒀다 하더라도 “너 심부름을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오너라!” 이렇게 해야 해 가지고 오지 “너 알아서 해라!” 이러면 어떻게 심부름을 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글쎄? 그것을 비유를 해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주인공, 해 주시오!’ 해도 안 됩니다. 그건 둘로 되기 때문에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야지 네 심부름을 하잖아.’ 하는 거며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네가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모든 용도가 그렇게 나가야지 ‘주인공, 이거를 해 주시오.’ 이런다면 바깥으로 찾는 거와 뭐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둘로 보지 말고, 꼭 그렇게 하세요.
쉽게 말해서 전체 지금 보이는 것이 50% 있다면 안 보이는 것 50%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를 알려면 내가 항상 말하듯이 모든 것을 쉬세요.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놓으세요. 그렇게 놔 버린다면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느냐 이러겠죠.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그 자체도 공한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색이 공했기 때문에 말도 공했고 뜻도 공한 겁니다, 전체가. 삼위일체가 다 공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생을 통해서 공부해서, 참 인내 있게 내가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가져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은 왜냐. 삼천대천세계 이런다면, 벌써 이 지구덩어리가 500억이라는 그 숫자가 한데 합쳐져서 대천세계 중천세계 소천세계인데, 이 대천세계 중천세계 소천세계를 한데 합쳐서 삼천대천세계가 된 겁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축소해서 이것을 비벼서 가루로 떨어뜨려서 티끌 하나 떨어뜨리는 횟수가 지금 우리가 70평생이든 80평생이든 한 횟수가 가는, 그 횟수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그 티끌 하나 떨어뜨려 놓은 고 횟수가 우리 한 생이라면, 그 얼마나 억겁광년을 거쳐서 도는 거기에 얽매이고 윤회에 끄달려야 하느냐 이거예요. 그럼 그것이 한생각에 눈썹 하나 치켜뜨고 눈썹 하나 내려뜨는 고 사이 한생각에, 삼천대천세계의 그 소용돌이의 얼음을 단번에 녹일 수도 있고, 한생각에 단번에 그렇게 억겁 년을 끄달리면서 돌아갈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한생각이라는 자체도 없는 것이 한생각입니다. 한생각을 냈다 하면 벌써 그건 걸려요. 그러니까 우리 자체가 그대로 공했기 때문에, 그래서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닐진대 승보(僧寶)도 그러니라. 이 모두가, 삼세가 다 공해 버렸다 이겁니다. 공했기 때문에 색깔도 빛깔도, 또는 말조차도 뜻조차도 법조차도, 전부가 일체 공해 버렸다 이거예요.
그러니 자기의 전체 우주를 싸고 있는 그 자체의 근본적인 마음을 가깝게 두고도 그걸 못 믿고 배척하는 겁니다. 이렇게 전체가 공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 안에 있다. 부처님 안에 있는 것이 근본이요, 그 근본이 바로 마음이다 이래도 도대체 믿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근본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내고 이러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죽는 거든 사는 거든 양면을 다 놓으셔야 됩니다. 죽는 거를 살리려고만 애쓰면 이 저울이 기울어져요. 그러니깐 죽는 거든 사는 거든 양면을 다 놓으셔야 빛 광명이 딱! 번쩍 일어 나죠. 이 죽는 거를 두려워하고 살리는 것만 애를 쓴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죠. 그 도리를 파악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 믿음을 가지려면 올바르게 양면을 다 놓으시는 작업을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인내와 정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일체가 한마음임을 알고 마음공부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스님께서는 수행 자체가 쉼이며 그냥 놓으면 된다고 하시지만 그 놓는다는 자체가 자신과의 싸움이며 죽을 각오의 인내와 자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근기가 약한 사람이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노력 않고 그냥 놓는다면 그건 현실회피가 아닐는지요?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기필코 이것을 다 부숴야 되겠다 하고 안간힘을 쓰라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여여하고 편안하게 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몸뚱이 하나가 그대로 꼬챙이에 꿰어져 있는 것처럼 바로 선장에 꿰여 있는 거나 같습니다. 그리고 배와 같구요. 선장이 끌고 가는 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들어 있습니까. 그거는 배를 탄 중생들이라 이 소립니다.
그런데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래서 우리가 평지에 살고 있어도 파도치는 바다를 배를 타고 아주 가파른 곳을 건너가는 것과 같다, 살얼음판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러는 겁니다. 그런데 선장이 잘 이끌고 가는 거를, 안에서 마음이 흔들리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이 다 흔들리거든요. 그러니까 죽는다 산다 하고 안에서 뛰면 바깥에서도 뛰고, 바깥에서 뛰면 안에서도 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배가 뒤집히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한생각을 잘 하고 돌아가는 분들은 파도가 치든, 배가 뒤집어지든, 파도가 치겠으면 치고 배가 뒤집어지겠으면 뒤집어지고 말겠으면 말고, 그냥 딱 ‘어허, 내가 공했는데 배를 탄 거는 어디 있으며 배를 안 탄 거는 어디 있는가. 파도친 거는 또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그냥 안에서 빙긋이 웃음이 날 뿐이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관하면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이 무사히 배는 지나갈 수 있고, 무사히 여러분의 가정이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 자체 모두가 거쳐 오면서 지내 내려온 근본 당처를 알아야 할 텐데, 그 당처를 모르고 항상 ‘석가모니불!’ 또 ‘관세음보살!’ 이렇게 바깥으로만 찾을 때에 항상 위로 모습만 찾지, 누구나가 안으로 들여서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렇게 한번 찾아 보셨습니까? 항상 바깥으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내가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써 만날 자기는 쑥 빼놓고 찾았다 이러는 겁니다.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고, 부처님 소리를 언제나 보고 언제나 듣나 하는 그 관념 속에서 그냥 상상하는 겁니다. 이건 상상이에요. 그러니까 상상으로 보이는 거, 나를 끌고 다니는 거, 내 몸 끌려다니는 거, 몽땅 주인공이라는 그 하나를 세워 놓고선 몰록 거기다 다 놔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관이 하나 만들어졌으면, 이 지구가 지금 관이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몽땅 집어넣을 것도 또 빼낼 것도 없잖아요.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죠, 지금. 관 속에서 지금 같이 살고 있어요. 근데 자기는 그 관 속에 없는 양 생각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꼭 깨닫고야 말겠다는 그 말조차, 이름조차 생각하지 마세요. 깨닫는다 하면 깨닫지 못하는 게 뒤따르기 때문에 그건 깨닫지 못합니다. 아시겠어요? ‘난 깨달아야겠다!’ 이러고 안간힘을 쓰면 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닫는다 안 깨닫는다가 없이 그대로,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또 내 마음 자체가 전부 용광로라고만 생각하세요. 용광로에서 재생돼서 자동적으로 나가게 하려면 용광로에다 모든 거를 맡겨서 놔야 그냥 스스로 녹아서 그냥 재생이 돼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불바퀴요, 용광로요, 바로 자가발전소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 의심치 말고 거기다 맡겨 놓고 잘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그 도리를 알게 될 겁니다.

이혼율이 너무 높아요

지금 한국 사회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미국보다는 적지만 일본이나 유럽연합보다 많은 실정입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맡겨진 애들 중 많은 아이들이 이혼한 가정에서 생겨난 아이들이랍니다. 아주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 한 마리가 밑이 빠져 가지고 그냥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어쩔 수가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원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근데 언제 거기를 잠시 들렀다가 그 개를 보게 됐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보니까 속은 사람이었고 거죽은 개였어요. 내가 껄껄 웃으면서 “너 개 모습을 해 가지고 나왔으니까 개 대접밖에는 못 받겠구나.” 그랬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개니까 개 대접밖에 못 받지, 무슨 사람대접을 받겠습니까? 사람이면 사람 대접을 받고, 개는 개 대접을 받을 수밖에요. 그래서 그 개에게 한 수 일러 주었어요. “너, 한생각이면 사람이 될 거야. 한 찰나야!” 하고요. 내 마음을 그 마음에 명경알처럼 넣어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날, 한 시간이 못 돼서 그 개는 죽어 버렸죠.
여러분이 어디를 지나가다가 보게 되는 소나 개라 할지라도 주인공에, 한생각에 둘 아니게 넣어 준다면 그대로 자기가 되는 겁니다. 그대로 자기가 되는 거기 때문에 그대로 소는 한 찰나에 인간으로 환생하는 겁니다. 도살장에 끌려간다 하더라도 아프지도 않게 죽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한 찰나의 환생이라는 게…. 그래서 ‘생사에도 끄달리지 말아라. 생사가 없다는 게 아니라 끄달리지 말아라. 여여하다.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 영원한 것이니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찰나에 내가 바다를 다 삼킨다 하더라도, 일체 만물을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영에다가 영을 넣는다고 해서 두드러질 일이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만 개를 집어넣었다, 십만 개를 집어넣었다 해도 영은 영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느니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쥘 수가 있습니까, 볼 수가 있습니까, 체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름해서 영이라고 해 놓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그 소의 영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근본은 다 똑같습니다. 소가 아니에요. 영, 영입니다. 소가 수십 마리 있는데 수십 마리의 근본을 내 근본에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이구! 여기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무슨 병이라고 내보내면서, 집에 가서 어떻게 해 보라고 하고 사는 동안 잘 먹고 잘 살라고 합니다. 아,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올 때 “내가 의사도 아니고 그렇지만, 당신의 마음이 지극하면 전깃줄과 전깃줄이 맞닿는 순간에 불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너도 한 게 아니고 나도 한 게 아니다. 이게 바로 부처님 법이다. 내가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네가 했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없다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소리가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제자들한테는 이럽니다. “네가 잘났든 못났든 내가 너고 네가 나니까 무조건 뛰어넘어라. 점프를 해라. 믿는 마음이라면 그 통 안을 벗어날 수 있다. 진짜 감응이 된다. 진짜 너를 찾을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쉽다면 아주 쉽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몇 백 년을 가도 못 벗어날 겁니다.
한편으로 볼 때는 딱하고 한편으로 볼 때는 ‘아휴! 천차만별이라더니 참 기가 막히구나. 우습구나.’ 이런 생각이 날 때에는 고개를 돌리면서 빙그레 웃고 돌아설 때도 있구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어쩔 바를 몰라서 남들 볼까 봐 감추고 고개를 돌릴 때도 많습니다. 나는요, 내일 죽는다 나중에 죽는다 이런 것도 겁 안납니다. 아무것도 겁이 안 납니다. 촌챙이가 된다 하더라도 겁도 안 납니다. 왜 겁이 안 나느냐. 권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뭐가 닥쳐도 팔짱끼고 있지 겁을 안 냅니다. 그리고 참섭도 안 합니다. 그렇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이 마음공부를 안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여러분은 잘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 속에서 우리는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고 지금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얼른 쉽게 말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굴려서 잘 응용하시기를 바라면서, 또 생활 속에서 남편이 잘못하고 어떻게 했다고 해서 미워하고 바가지 긁고 그러지 마시고 아주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말도 부드럽게 하면서 거기 맡겨 놓으세요. 아, 백년가약을 한 친구로 만났는데, 친구와 캠핑을 와서 지금 한바탕 놀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거든요. 그러니 아주 부드럽게 말도 하고 행도 하면서 ‘너만이 그러지 않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그렇게 해 주란 말입니다. 또 남편도 역시 부인한테 그렇게 하구요.
나는 지금 남편이나 부인들이 어떠한 문제로나 남의 여자를 보고 남의 남편을 보고 이러는 사람들 좀더 심사숙고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저는요, 제가 공부하면서 그 후에 알았던 건데, 곤충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것을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는 줄 아는 습이 돼 있어요, 아주. 그래 가지고 발목이 묶여 가지고 그 습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냥 새끼를 만 개도 낳고 천 개도 낳고, 그저 열 개도 낳고 그러면서 그냥 세세생생을 돌아가는 겁니다. 그 항아리 속에 갇혀서 말입니다.
우리가 요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다가 가겠습니까? 요 모습을 가지고는 백 년을 살겠습니까, 천 년을 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죽는 그 찰나에 그냥 다른 모습으로 돼서 이 세상에 나오는데 아니, 어떡하자고 그렇게 삽니까. 한 생을 통해서 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가 진짜 맘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올 때까지는, 그런 습은 좀 버리시고 우리가 참답게 참인생을 살고 진짜 자비를 베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침착하게 생각하셔서 바로 한생각으로, 얘기해 드린 거를 굴려서 큰 금덩어리의 빛을 만들든지, 우주를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그냥 한생각으로다가 크게 이루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건 자유니까요.
200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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