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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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스님의 스님이야기
천호스님(4)

삶의 진실을 찾는 자는 언제나 한 번은 떠돈다. 자기를 극복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안에 머물러서는 진실을 만날 수 없다는 확신은 무정처의 만행으로 수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천호스님은 단기 사병을 마치고 다시 산사로 돌아왔다. 23세의 나이. 산사에 안주하기에 그의 의식은 치열하게 살아 날마다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출가와 수행, 머뭄에 대해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은 그를 다시 길 떠나게 했다. 십대에 그가 먼 길을 걸어 출가를 결행했을 때의 문제의식들은 여전히 그에게 답을 요구하는 문제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아침 걸망을 꾸려 산문을 나섰다. 그의 등 넓이보다도 크게 꾸려진 걸망은 그의 만행이 아주 길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무래무거역무주(無來無去亦無住)라. 오고 감도 또한 머뭄도 없는 자리를 향해 가는 자들에게 기약을 묻는 것이 부질없어 나 역시 그에게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좋은 벗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얼마나 허허로워지는 가를….
그가 떠나고 몇 달이 지나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천호였다. 주소는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주소 없는 그 편지를 반가움과 기대를 가지고 뜯었다. 거뭇거뭇한 지문이 찍힌 한지 같은 편지지에 그는 그의 만행에 대해 적고 있었다.
“저는 산문을 나서 정한 곳 없이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산과 산 그리고 산사와 마을로 이어지는 길들은 내게 만행을 떠나길 참 잘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길들은 서정이었고 꿈이었습니다. 그 길들 위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중이 되어 산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그 길 위에서 배웠습니다. 마음에 욕심을 비우면 세상은 어디나 극락이라는 것을, 그래서 중은 언제나 극락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번 만행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길을 벗어나면 극락은 너무도 먼 곳이었습니다. 길을 벗어나면 거기에는 현실이 있었고 그 현실 속에는 끝 모를 지옥이 있었습니다.
다투고 찢고 깨지고 그러다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인간의 군상들을 향해 지옥이라 단언하고 눈을 감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지옥 속에서 능히 극락을 보는 것이 만행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에서 길로 다니는 만행의 서정성을 덮고 길 아닌 곳에서 길을 몰라 헤매이는 이들 곁에 다가서 겸손하게 그 들을 배우고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탄광으로 만행의 발길을 돌렸습니다. 막장의 깊은 어둠 속에 인생을 던지고 힘차게 괭이질을 할 때 출가와 수행과 길 잃은 사람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만 싶었습니다. 벌써 이 곳에 온지도 두 달이 넘습니다. 일이 고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술에 취해 또 내일을 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편지를 쓰다보니 문득 산이 그리워집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흘러야 산에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천호 합장.”
편지지의 지문은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는 손에 박힌 탄가루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 후 그는 소식이 없었다. 그 편지를 받고 1년쯤 지나 나는 다시 그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의 편지는 예전의 편지와는 달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알래스카 어디라고 적힌 그의 편지 주소를 보며 나는 그가 참 멀리 만행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산과 사찰을 떠돌다 탄광을 지나 먼 알래스카에서 연어잡이 배를 탄다는 그의 글을 보고 나는 그의 만행의 광활함에 그만 감탄하고야 말았다.
온통 추위와 얼음뿐인 곳에서 창가에 앉아 외로운 불빛 아래서 편지를 쓴다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가 왠지 하나의 별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떠있다 소리 없이 내 가슴에 내려와 빛을 뿌리는 별.
나는 문득 그가 있는 알래스카에 가고 싶었다. 가서 함께 연어잡이 배를 타며 좀 더 명징하게 진실을 향해 항해하고만 싶었다. 추위와 외로움과 시린 별 아래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을 향한 그의 사랑의 깊이를 알고 싶었다.
2년여의 만행을 마치고 그는 돌아왔다. 돌아올 때 모습은 산문을 나설 때의 모습과 다름없이 어깨에는 커다란 걸망을 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매는 그 전과는 달리 한없이 깊고 평화로웠다. 나는 그와 함께 법당으로 향했다. 화두와도 같은 만행을 타파한 자의 평화가 5월의 햇살처럼 내게 전해져 왔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
200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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