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스님 위상 변화 주역
“부처님께서는 여성들이 정신수련을 함으로써 참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영적 개발이나 신통(神通)에 있어 여성수행자의 위치는 남성수행자에 필적할만한 것이었다.”(란자니 드 실바의 논문‘과거와 현대의 비구니 수계’중에서)
현재는 주로 한국과 중국 등 북방불교에서 비구니교단이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에 상좌부불교 비구니교단의 중심지는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의 비구니 공동체는 BC 3세기에 확립되었는데, 그때는 인도의 다르마소카(Dharmasoka) 황제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의 아들 아라하트 마힌다 테라(Arahat Mahinda Thera)를 스리랑카에 보냈을 즈음이다.
당시,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티사(Devanampiyatissa)왕의 처제였던 아눌라(Anula) 왕비와 그의 궁녀들이 계를 받고 스리랑카 최초의 비구니 승단을 구성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비구니승단은 왕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1세기까지 번창했지만, 그 이후에는 자취가 사라졌다. 다시 1천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구니승단이 재건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란자니 드 실바 ‘스리랑카 사캬디타’ 회장을 중심으로 한 4천여 10계녀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비구니계의 부활이 이뤄진 때는 1996년 12월 8일. 당시 인도의 대각회(Maha Bodhi Society) 의장이었던 故 마팔라가마 비푸라사라 스님(Ven. Mapalagama Vipulasara)은 불교의 중흥과 비구니계의 부활을 위해 당시 원로 비구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첫 번째 법문을 설하신 인도의 사만타(Samantha)에서 10명의 10계녀(다사 실 마타보)에게 비구니계를 수여했다.
이러한 상황은 미륵불이 탄생하기 전에는 비구니승의 존재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기존의 스리랑카 비구승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비구니 수계라는 주제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사미니 과정을 거친 여법한 비구니계의 수계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1998년 대만 최대의 사찰인 불광산사의 지원아래, 인도 가야(Gaya)시의 중국 사원에서 열린 국제 수계식이 열렸다. 이 국제적인 비구니계단에서 스리랑카 출신의 비구니 20명이 계를 받고 귀국했다. 그 이후 다수의 비구니 수계식이 스리랑카에서 원로 비구스님들에 의해 치러지는 등 비구니승단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스리랑카에는 비구니 스님이 40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그들은 이제 비구교단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고 있으며 식량, 의복, 주거지, 의약품 등을 지원받고 있다.
스리랑카 사회의 중추적인 변화세력인 여성 불자들의 모임인 ‘스리랑카 사캬디타’를 이끄는 실바 회장은 10계녀와 비구니 스님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시켜 종단과 사회에 봉사하도록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실바 회장과 독일 출신의 아야 케마(Ayya Khema, 1923~1999) 스님 등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은 불과 10여년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비구승들과 거의 평등한 위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전에 비구승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어 왔던 불교의식들을 집전하도록 초대받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