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영원한 자유의 밝음을 얻는다면 죽고 살고가 따로 없는 자유인입니다
이렇게 형제회 법우님들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이 벌써 몇 달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음으로부터 행(行)의 작용으로 발전을 시키고 이 세상을 조절해 나갈 수 있는 지구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잘 먹으면 세계를 조절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좀 더 평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이고,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 괴로움과 여러 가지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가져오게 되겠죠.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것 빼놓고, 저것 빼놓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불법이라고 하겠습니까? 불법은 우리들 살아가는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불교 아님이 없기 때문에 불교는 그대로 우리들의 생활인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지내는 이 자체가 교(敎)가 되기 때문에 불교 아님이 없고, 만물만생이 다 불교 아닌 게 없어서 만나면 만나는 대로 그대로입니다.
오늘도 저 위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는데 어저께 만난 것 따로 있고, 오늘 만난 것 따로 있지만 만나는 대로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체 보면 보는 대로 둘이 아니므로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마음은 이심전심으로 둘이 아니어서 그렇게 같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같이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면 내 집이 빈집이 돼서 에너지를 뺏긴다고도 볼 수 있지요. 항상 밑지고 사는 분들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 집이 비었으면 에너지를 뺏기기 때문에 내 몸이 쉬이 망가지는 반면에 가난해지고 마음이 떳떳하질 못하니까 뿌리가 성성하질 못해서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는 것이죠.
불교라는 이 자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행동 하나하나 작용하는 것이 법이요, 불은 영원한 불성을 말함이니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지요. 그 근본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겁니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지 생각 없이 무슨 사람입니까. 에너지 자체가 들고 나고 활용하듯 우주 전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일체 만물만생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자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부처님께서는 욕심이 많다고도 볼 수 있겠죠. 왜냐하면 모두 긁어모아서 한마음이라는 그릇도 없는 데다 다 넣어버렸으니 우주 삼천대천세계 에너지를 다 넣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생각을 내면 법바퀴거든요. 생각을 내면 생산을 해내는 법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몸이 헤져서 망가지면 벗어버리고 다시 새 옷을 입듯이 별성도 마찬가지로 그 생명이 길고 짧을 뿐이지 똑같습니다.
우리가 이 옷을 벗었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불성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 물 바람 흙 등의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게 없고 다시 생산돼 옷이 다시 만들어져 나오는 거지요. 용광로에 헌쇠를 넣으면 다시 생산돼서 나오듯이 말입니다. 금도 닳아진 쪼가리들을 다시 녹여서 반지를 만들고 목걸이를 만들지만 금은 그대로 금이듯이, 우리 인간도 옷은 갈아입어도 불성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 원, (손으로 큰 원을 그려 보이시고) 불바퀴로 하나로 돼 버리죠. 하나로 돼 버려서 법바퀴에 에너지가 배출이 되면서 거기서 내 마음대로 생산이 다시 되죠. 그러나 이 도리를 모르면 그 자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 물질적인 의식을 그냥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도 물질적인 나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도 다스리지 못하고 닦지 못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줄 알고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는 겁니다. 넘어설 수가 없는 거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몸속에 있는 인과의 악업, 선업이 쫙 깔려서 자기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기 때문에 한 발짝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지금 현실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마음 자체를 비우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하시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 있으니까요.
우리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작용에 있지 않습니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고, 내쉬고 들이쉬지 못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또 부처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면 들이고 내는 작용 가운데 있는데, 들이고 내는 그 작용을 누가 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이는 것도 아니고 내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는 말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말없이 대답을 하는 것이죠. 그건 왜냐하면 발현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전에 선지식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내가 들어가는 게 옳으냐, 나가는 게 옳으냐, 들이는 게 옳으냐, 내는 게 옳으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죽어서도 그 관습이 남아서 고생을 해서 내 집을 장만해 놓았다고 하고, 내 가정이다, 내 재산이다 하면서 살던 그 습관이 그대로 떠나지 못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몸은 갔어도 마음은 그대로 있으니 몸뚱이를 가지고 참섭을 해도 귀찮아 죽겠는데 이건 보이지도 않는 데서 참섭을 하고 돌아다니니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못할 짓이 아닙니까. 자식들이 이 생의 자긴데 자기를 귀찮게 구는 겁니다. 자기 따로 자식들 따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착을 두고 있으니 죽어서도 그 관습에 의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재산이나 가정의 모든 착은 떼었는데 하화중생의 도리를 몰라요. 자기 속의 중생들을 제도 못했어요. 내 몸뚱이 속에 인과로 생긴 악업, 선업을 녹이지 못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서서 가려고 해도 그림자처럼 헤아릴 수 없이 나타나서 앞을 막으니 어떡하겠습니까? 그 도리를 살아서 몰랐기 때문에 죽어서 그것들이 모두 나타나는 것이죠.
똥을 봐도 묻으면 어쩌나 하고 가질 못하는데 천차만별로 벌어져 있으니 인연을 가진 것은 머리 풀어 산발하고 귀신처럼 덤비고, 눈 없고 팔 없는 게 들이덤비며 온통 과거에 살면서 자기가 행한 대로 인연이 되어 가지고 내 몸 속에 다 있으니 모습은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지만 그 인연에 따라서 쫓아다니는 그것은 아무 데 가도 쫓아다니기 때문에 붙잡히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 어딜 가겠습니까. 그걸 훌렁 벗어버려야 자유로울 텐데 배어 가지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 산을 넘어간들 안 쫓아가겠습니까, 물을 건너간들 안 쫓아가겠습니까. 이 세상에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따라다닐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야 무의 세계에서도 보이지 않을 텐데, 우리가 지금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자유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해 봅시다. 정보국 정보원들이 우릴 감시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증거로 아예 입력이 되어 쫓아다니기 때문에 항상 통신이 되고 이렇게 영상이 나오니 꼼짝할 수가 없지요. 몇 생을 돌아가도 그것은 꼭 쫓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을 나오는 대로 되맡겨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일체 만법을 다 작용하니까 “난 심부름만 했지 내가 주인이 되어서 한 게 아니니 주인이 알아서 해결해!” 하고 거기다 맡겨 놔야 그것이 몽땅 벗어지는데 이건 만날 `‘내가 하는 거야!’ 그러니 과거에 짊어져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도 죽겠는데 또 미래에 나올 것을 연방 입력을 해놓고 있으니 그걸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다시 입력을 한다면 몽땅 지워지기 때문에 정보국에서 컴퓨터에 넣어 봐도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훌떡 벗어지는 거죠.
우리가 이런 도리를 안다면 하루하루를 살면서, 하루하루뿐만이 아니죠. 지금 이 시간에도 보고 듣고, 가고 오고 그러는 게 하나도 고정됨이 없이 공해 버렸으니 그것이 누적이 되지 않고 우리가 먹고 배설하듯이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하찮은 말인 것 같지만 이 세상에서 지금 현실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현실에 나를 완전히 아는 데서 세상을 모두 감지하고 조절하고 돌아가는 이런 능력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믿지 못하는 겁니까.
다른 말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건 이론에 불과해서 직접적인 실천을 하지 못하는 데는 목이 말라서 죽는다 하더라도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몸이 망가져도 에너지를 넣을 수 없고, 기를 넣을 수가 없으니 하여튼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다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시자가 주인의 심부름을 건강하게 잘할 거 아닌가.’ 하고 한 생각만 해도 에너지는 자동적으로 들어가고 기가 자동적으로 들어가서 그 병이 없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면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고 어디 먼 데로 도망을 가려고 해도 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 데나 들어가서 모습을 아무렇게나 가지고 나올 수밖에요. 그러니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작용을 거기서 한다는 걸 믿고 맡겨야 벗어집니다. 또 벗어졌어도 나라는 게 남고 관습이 그냥 남아 있다면 강을 건너려 해도 물이 깊어서 건너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원히 배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물질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서 만나리. 그리하면 영원한 밝음이 있으리니.” 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넘어가려면 한생각, `‘아, 일체 만물만생이 둘이 아니고 내 몸속에 있는 것도 둘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한생각 끄떡하면 죽어서도 그걸 알고 있는 겁니다. 생시에 알고 있다면 꿈에서도 알고 있는 것이고 죽어서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 밝아지고 귀가 띄어져서 한생각을 하면 강도 들도 따로 없느니라. 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높은 산이나 얕은 들이나 깊은 강물이나 불 속이나 어디에도 타 죽는 법도 없고 빠져 죽는 법도 없고, 멀어서 못 가는 법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다만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큰 노릇을 못하고 문지기나 하는 입장이죠. 불바퀴를 보면 타 죽을까봐 그 소용돌이 속을 못 들어가기 때문에 영 맛을 보지 못하고, 영원한 밝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이죠. 살아서 영원한 자유의 밝음을 얻는다면 죽고 살고가 따로 없이 자유인일 텐데 말입니다.
우린 만날 이런 말 저런 말 하는데 마음 빼놓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성은 생명의 근본이며 그 생명의 근본이 있기에 마음을 낼 수 있어서 작용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내는 것은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죠. 불과 법이 둘입니까, 어디? 생명이 있으면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낼 수 있으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당연하죠.
중요한 것은 아까 관습으로 인해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면 입력이 돼서 나오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살 수 없고 어느 곳에 있어도 자기 한 대로 잡히면 창살 없는 감옥에 꼼짝없이 갇히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모르니까 자기가 지금 물질로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잡혀 있는 줄로만 아는 겁니다. 그러니 갇혀 있지요.
내가 내려앉는다고 한 것은 여러분하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무슨 위라고 해서 위가 아니고 여러분이 아래라 그래서 아래가 아닙니다. 뒤에서 안 보인다고 해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내가 높아서 여기 앉겠습니까? 높은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도 지금 그런 실행을 하면서 실천을 하고 갑니다. 그런 걸 몸뚱이 고깃덩어리만 봐서도 아니 됩니다.
예전의 일체 부처님, 일체 선지식들께서 어떠한 50%의 행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마음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 도리를 배우면 일체 평등 공법으로써 대처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이고, 칠보활궁공법,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내서 보배로운 생산을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항상 말하지만 종지로 원한다면 내가 종지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마음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마 빨리 알아들으리라 봅니다. 내 마음 하나에, 즉 말하자면 블랙홀 안에서 나가는 그 에너지가 어디로 나가느냐? 나가는 그 에너지도 그렇지만, 한데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작용을 하는 그 자체가 무수하다는 얘깁니다. 지금 우리들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작용입니다. 그런데 근기에 따라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은 우리 법입니다. 불바퀴의 에너지가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숨쉬고 사는 그 에너지가 나가서 배출이 되면 또 생산이 되는 것이죠.
부부가 생각을 안 하고 생산을 안 해냈다면 여러분 자손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별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로따로 떨어지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질로서 아주 거대하게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지금 조절을 하니까 그렇지 만약에 별성들이 와르르 일어났다 하면 불바퀴가 얼마나 팽창될 것입니까? 이것은 과학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말하는 것 말고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것부터 알아야 되지 않느냐는 거죠. 내가 벗어나야 아무 데로 가도 간 흔적이 없죠. 그런데 벗어나지 못하면 흔적이 있든 없든 벗어나지 못하는 거니까요. 한 발짝만 떼어도 벌써 흔적이 나오는데 어딜 갑니까. 그러니까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고에서 벗어나라고 부처님께서도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좀더 잘 생각해서 일하면서도 생각이 일어나면 무조건 거기다 맡기고 조용한 시간이 생기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가지시라 이 얘깁니다. 내가 생각을 안 하면 진화가 되지 않아요. 내 마음이 커지질 못해요. 생각을 안 하면 목석이지, 생각을 안 하는데 진화가 됩니까.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의식들이 바로 증거물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다는 증거물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여러분, 산에 가면 좋고 물에 가도 좋지요? 여러분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청산유곡을 보면 마음이 신선하고 좋고 또 맑은 물이 쉴 사이 없이 흐르는 걸 보고 고기가 노는 걸 봐도 싱그럽고 좋지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수없는 겁을 거쳐서 인간까지 이렇게 왔고 지금도 꼬리가 조금 붙어 있지만 꽁지 떨어진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벗어나야 어딜 가든지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생각으로 살 수 있지요. 생각으로 운전할 수 있고, 생각으로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거죠. 어떤 때는 길을 가다보면 기다란 물체가 가는 걸 보게 됩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알을 까서 뒤꽁무니에 질질 끌고서 두껍게 옮겨다 놓고는 풀로 살짝 덮어놔요. 그런 걸 하나 보더라도, 미물까지도 이렇게 묘한 것입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이렇게 인간까지 진화돼서 자식들을 낳아서 덮어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키우면서 어디를 나가서 안 들어오기만 해도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을 하지요. 알고 보면 식구들이 거쳐 오면서 바람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겁니다. 그러다 흩어져서 다른 식구들하고 또 만나고 진화를 조금 하면 한데로 또 같이 모이게 된 것이기 때문에, 부모 자식이 대의적으로 본다면 따로 없다는 얘기죠. 사는 동안에 우리가 같이 이렇게 모여서 살 뿐입니다.
그러니 착을 두지 마시고 그저 사랑으로만 대하시고 어쩌다 하룻밤 자고 와도 “너, 어디서 자고 왔느냐? 전화번호 대라!” 하지 마세요. 뭐 틀림없죠. 그러나 애들은 그런 식으로 대하면 더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고 올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기에 그랬겠지, 너 배고프지 않으냐?” 하고 받아서 안아준다면 나가서 자라고 사정을 해도 나가 자지 않을 겁니다. 대접을 해줘야 하는데 착을 두고 내 손에 들은 어떠한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나이를 더 먹었다고 해서 자기가 생산해 놓은 것을 자기 거라고 하겠습니까?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절대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니 남의 자식이든 내 자식이든, 남의 부모든 내 부모든 평등하게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들은 대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있으면 베풀어주고 가진 것이 없으면 마음으로라도 무주상보시를 해서 그저 남을 이익하게 해야 합니다.
가끔 학생들이 울면서 “스님, 이러이러한데 이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할 때 그것이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듯 평등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과 한마음이 되는 것이죠. 그래야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제 내 자식 네 자식 내 부모 네 부모가 있었습니까? 모였다가 바람결같이 흩어지고 스쳐가는 것이 인생인데요. 우리는 방랑객으로서 한 철 캠핑 나와서 살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흩어져야 할 인생이 아닌가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런가 안 그런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때에 따라선 내가 먼저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물끄러미 쳐다보면 그쪽에서 먼저 말을 할 때가 있어요. 꽃도 저녁이면 오므라집니다. 저녁이면 오므라들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십니까? “해가 졌다. 이제 잠자자!” 하거든요. 모두가 잠을 자는 건 아닙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 안 잔다 없이 그냥 있는 소나무도 있죠. 그래서 그것이 바깥으로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이 푸르름을 가져온 겁니다. 그게 다 마음의 뜻이 있지요.
마음이 오고 갑니다. 나무에 맞아 죽을 팔자를 가진 사람이 나무에 목신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나도 너하고 벗이요, 영원히 친구지!’ 하니까 둘이 아니라는 바람에 목신이 오히려 도와주더랍니다. 만약에 일을 하는 사람에게 “둘이 아니지 않으냐. 그러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먹어도 같이 벌어먹자!” 한다면 고마워서 밤낮을 모르고 일할 겁니다, 아마. 자기한테 평등하게 인격적으로 대해주는데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자기와 둘이 아니죠. 그리고 모든 일을 자기 일 하듯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도 죽지 않습니다. 목신도 자기요, 지신도 자기요, 관세음도 자기요, 지장도 자기요, 모두 자기인 것이죠.
▲질문자1: 별들도 생명을 다하면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셨는데, 지구도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지구는 나이가 몇 살이며, 사람이 지구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생명이 네 가지 방법으로 태어난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태생으로 태어나고 있는데 인간이 제일 처음에 어떤 방법으로 태어나는지 말씀해주세요.
▲스님: 우리는 태생으로 태어나지만 우리 속에 들은 건 태생으로 태어납니까? 모두가 화해서 종합해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붙듯 그 의식이 붙어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는 바람에 그것도 화해서 자꾸 자라는데 어떻게 증명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세 살밖에 안 된다 이런 거죠. 모두 쳐도 세 살밖에 안 되는 겁니다. 지구도 태어난 지가 세 살밖에 안 됩니다. 왜 세 살밖에 안 된다고 하는지 여러분이 잘 새겨보면 알 겁니다. 인생은, 인생뿐만 아니라 모두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니까요.
여기만 별성이 있고 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으니까요. 벗고 작용하는 바람에 에너지가 축출되는 것이죠. 운동을 안 한다면 그건 죽은 별이지, 산 별입니까? 또 껍데기를 벗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옷 벗듯이 그냥 벗어버린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모습도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으로 나이 먹은 대로 우리들도 이렇게 차이가 있듯이 그렇게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둘이 아닙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여기 살고 있지만 별에 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작으면 별들도 작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크면 별들도 클 겁니다. 이 세상에 인물이 태어난다면 별이 크다고 그러죠. 별똥이 떨어진다 하는 것도 별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옷이 흩어져서 원점으로 가듯이 그것도 역시 옷을 벗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공기에 의해서 돌아가니까 그것이 다 망가져서 가루가 되어 이 지구에 떨어질 수도 있는 거죠. 흙이 어디서 생겼고, 먼지가 어디서 생겼는가 보라구요. 그렇게 끼리들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흙 한 줌이 된다고 그러죠. 물 한 점, 흙 한 점, 바람 한 점, 불 한 점, 이렇게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그런 이치가 있듯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여기 지구에 그런 먼지가 떨어진다고 그래서 지구가 무거워서 못 살지는 않습니다. 아주 가벼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체 만물이 살고 있잖습니까. 흙이 아니라면 또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갖다 준 겁니까. 우리가 흙을 만들어 놓고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죽으면 또 흙이 돼주고 그러는 겁니다.
역시 아래 위 전체가 돌아가면서 주고받고 삼천대천세계가 한 회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한 회사에서 전부 부서별로 일을 하고 있듯이 그렇게 한다 그래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만 우린 떠 있습니다. 아마 지구에 붙어서 사는 그런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아니, 지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죠. 왜, 우리가 붙어서 사는 벌레입니까? 하여튼 막말을 한다면 벌레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뭐 때문에 붙어서 사느냐면 우리는 진화돼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물질화가 됐기 때문에 전 세계가 전부 상대성 원리로 `‘내가 빼앗아 먹는다. 내가 하나라도 더 올라가야지.’ 하면서,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모든 문제는 일어나죠. 별성이나 혹성들 자체가 전부 상대성 원리로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힘이 없으면 절대로 뺏기게 되어 있으니까요. 주인이 없으면 뺏깁니다. 에너지를 다 뺏깁니다. 거짓말로 알지 마세요. 또 자력이 없으면 뺏기듯이 자석도 큰 자석이 여기 놓여있다면 작은 덩어리가 다 그저 스치기만 하면 그리로 붙어져서 뺏깁니다. 그렇듯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량 뺏길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지구 사람들이 이 도리를 모른다면 지구에서도 무한량 에너지가 소멸되지요. 우리 인간이나 생물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혹성 별성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여기의 주인이 없다면 에너지는 소모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지구라는 데가 사람이 많이 살고 있고, 생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가 이 공부를 한다면 에너지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구의 수명은 길어진다는 문제가 나옵니다. 영원히 보존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한번 잘 해보십시오. 왜, 목성이나 토성 같은 데서 얼음으로 얽혀있는 그 사실을 옛날 소리처럼 해야만 하는지 한번 잘 알아보면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다. 그곳에 생명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생명이 잠자고 있을 뿐이죠. 만약에 우리가 공부를 해서 그 생명을 내놓는다면, 또 우리가 이 도리를 완전히 증득하고 난 뒤에는 모르지만 이 도리를 어스름하게 알아가지고는 그 모든 잠자는 걸 깨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잠자는 것을 깨운다면 서로 잡아먹을 테니까요. 진화되지 않는 것도 있고 진화된 것도 있겠지만 마음이라는 것을, 즉 말하자면 영혼이라는 것을 뺏어다가 살 테니까 우리는 껍데기만 남을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멀고 가깝고가 없이 엄청난 문제지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 어떻게 됐지.’ 이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누가 뭐래도 관여 안 하고 편안하게 삽니다. 싱긋이 한 번 더 웃으면 덜 늙지요.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해서 세계뿐만 아니라 전 우주 삼라대천세계를 조절할 수 있다면 모든 혹성에서 생명들이 다 살 수 있는 문제들이 허다하게 나오겠지요. 뜨거워서 못 살고 차가워서 못 살고 얼어서 못 살고 이런 거 아닙니다. 우리가 조절하기에 달려있지요.
그래서 에너지를 나르는데도 멀고 가깝고가 없다는 얘기지요. 나무껍데기 하나가 가공이 돼서 왜 종이가 됩니까? 아, 그렇게 나무껍데기로 옮기면 힘이 드니까 종이로 만들어서 옮기면 좋을 겁니다. 종이보다도 더 가볍게 할 수 있는 물질이 또 있지요. 그 물질로 인해서 물질이 아닌 걸로다가, 임신을 하는데 물질은 다 없어지고 형체도 없어서 보일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데 몸속에서 자란다는 걸 아셔야 해요.
만약에 더 가벼운 형체가 없는 것을 가져다가 뿌려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뜨거운 거를 찬 데다 갖다놓으면 찬 거 녹으니 좋고,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깨워놓으면 어떻게 그것이 발생이 되느냐는 문제죠. 이 공부를 꼭 해서, 앞으로 이 도리를 모르는 생명들을 위하고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 도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 몸속에 있는 뭇 생명들, 중생들이 나쁜지 좋은지 모르고서 악으로 내가 무엇을 훔치러 간다고 한다면 훔치러 가는 대로 따라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그러면 좋은 일을 하는 대로 따라줘요.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들이니 여러분의 마음이 이것을 다스리면서 이끌어 가지고 가야 정말 보살로 화하지 않습니까. 내 혹성에 들은 것부터 해결할 줄 알아야 딴 혹성에 들은 걸 해결하지요. 내 혹성의 문제들을 해결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혹성의 것을 해결하렵니까? 그럼 또 질문하세요.
▲질문자2: 아까 그 주장자가 없으면 빈집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여쭤 보겠습니다. 그게 마음이 허해서 빈집이 되면 세균도 들어오고, 딴 엉뚱한 생각도 들어와서 정신도 어지러울 테고…, 그래서 생각을 해 볼 때에, 선원에 열심히 다니고 경 읽기도 열심히 해서 뭔가에 가까이 가겠다는 의지가 주장자인가, 아니면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해 가지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주장자인가, 다시 한 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스님: 시장 바닥에 나가든 절에 오든, 집안에 있든 회사에 나가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거기서만이 들이고 낸다는 믿음이 선다면 그게 주장자입니다. 그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가 맘대로 가지고 할 수 있는 자기 보배, 주장자가 있는데도 집이 비어서 옆둥이에서 자꾸 꿰져요. 그러니까 거기에 속지 마라, 모든 걸 나오는 대로 무조건 맡기고 살라 이거죠.
▲질문자3: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분명히 머리로 알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은 머리에서 하는데 모든 분들이 가슴을 향해서 마음이라고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가슴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과연 정신과 마음이 다른 건지 같은 건지, 마음이 어디에 있어서 거기에 맡겨 놔야 하는지 참 헤맸습니다.
▲스님: 정신은 우측으로도 좌측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걸음걸이를 말하고 내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자신’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전 우주를 싸고돌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만사가 둘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한 찰나에, 일체제불이 한 찰나에 마음에 드셔서 한 찰나에 좋은 묘법을 설하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런 겁니다.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바로 묘한 도리이고 광대무변한 법이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부처가 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그 자체가 바로, 지금 누가 말했습니까.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귀엽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밉다고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작용 가운데 있다고 해서, 구지 스님이 어느 암자에 주지로 있을 때 하루는 어떤 비구니 스님이 삿갓을 쓰고 석장을 짚고 찾아와서 주위를 세 번 돌면서 “한 말씀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구지 스님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그 비구니 스님이 그냥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서야 구지 스님은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쉬시고 가시지요.”라고 하자 그 비구니 스님은 “사람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잠을 자고 가겠습니까?”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구지 스님은 주지고 뭐고 다 버리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하러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는데 꿈에 “이곳을 떠나지 마시오. 스님을 위해서 육신보살이 올 것이오.” 하고 일러주었는데 과연 선지식이 찾아와서 그 동안의 일을 말했더니, 그 스님이 한 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구지 스님이 즉석에서 크게 깨달았다고 해서 구지 스님이 되었다는데 그 뒤로는 누가 찾아와서 법을 물으면 오직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딴 데서 찾을 게 아니라, 지금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해도 내 주장자가 있으니 그런 거지, 주장자가 없는데 슬프다고 눈물이 나옵니까? 또 내 주장자가 없는데 그렇게 하느냐 마느냐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주장자가 없는데 어떻게 좋은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겠습니까? 이 마음이 천차만별로 광대무변하고 한군데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잡을 수가 없는 거죠. 바로 잡을 수 있고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공했다고 한 겁니다.
그 자체가 둘이 아닌 까닭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보배 주장자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니 네 주장자가 없다면 네 주장자를 뺏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왜냐하면 빈집이기 때문에 맘대로 드나들어도 상관이 없다 이 소리죠. 그러니 거미줄밖에 더 생깁니까. 주인 없는 집이니 영계성 유전성 세균들이 막 들어와서 뚱땅거리고 춤추고 하면서 드나드니 그 집안이 뭐가 됩니까? 부디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말고, 끄달리지 마시고 한층 분발해서 떳떳한 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58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침
448호 29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요’ 법문 마지막 문장에서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가 누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