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공사·공장분진·소음까지‘또 버려진 절터’
산은 부처님을 모신 절 집이 깃든 곳이고, 부처님을 모시는 이들이 등 구부리고 모여 사는 곳이다. 부처님을 모신 집은 아이 낳고, 고기 굽는 집이 아니기에 팔작이나, 단청으로 모양을 내야하고, 대나무,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쳐야한다. 부처님을 모시는 이들이 사는 것은 단순히 밥숟갈을 고르고 잠자리를 펴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이마는 맑아야 하고, 옷자락은 무채색이어야 한다. 댓돌 위에 놓인 흰 고무신에 햇살이 쌓이고, 처마 끝 묵은 거미줄에 달빛이 걸리는 곳. 물소리, 가랑잎 구르는 소리로 장엄한 절 집에 포크레인이 큰 짐승처럼 다가 설 때, 물욕의 거센 파도가 산더미처럼 밀려올 때, 부처님을 모시는 이들은 더는 물러 설 곳이 없어 창자가 달라붙는 침묵으로 맞서야 하고, 도롱뇽, 진달래도 한 덩어리가 되어 배수의 진을 쳐야 한다. 가슴은 터널이 관통하고, 눈은 고압선이 안대처럼 휘감긴 산. 무릎은 도로로 잘리고 어깨는 아파트로 짓누르는 산. 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차라리 연약한 사문의 옷자락에 매달리려 한다.
색깔이 없는 인생. 짜고 떫은 맛도 없이 향기만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오감(五感)도 버리고, 핏줄도 끊은 이들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수행자의 힘은 침묵에서 나온다. 마주서지 않는 무저항의 힘. 똑같이 주먹을 쥐지 않는 비폭력의 힘. 말없는 말의 힘. 수행자의 힘은 바람과 허기로 채운 공복(空腹)에서 나온다. 자벌레처럼 길 위에서 수없이 허리를 접었다 펴는 그 값진 수고에서 나온다. 기도와 수행의 공간으로 대물려 살아온 집이 난데없는 굉음으로 기왓장이 흔들릴 때, 만장처럼 현수막이 나부끼고, 목탁소리, 염불소리로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굴착기의 전진을 멈추지 못할 때, 출가사문은 이목구비 다 빗장을 지른 채 빈 가슴으로 역사의 광장에 주저앉아 염주알을 굴릴 뿐이다.
사패산, 천성산의 관통을 막기 위한 절집안의 싸움이 처절하다. 도롱뇽과 함께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45일간 단식을 계속한 지율스님의 주위에 10만 명이 넘는 불자들이 서명으로 동참하였다. 40여개의 사찰이 훼손 위기에 처한 사패산 터널공사도 막바지 싸움에 접어든 느낌이다. 누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불화를 막기 위한 싸움이기에 불자들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추풍령 아래 첫 고을. 금오산 서쪽 자락의 옛 가람 터인 갈항사지(葛項寺址)도 알고 보면 또 다른 터널 공사로 몸살을 앓는 곳이다. 경부 고속철도가 발밑을 관통하고, 대구~아포 간 고속도로가 눈자위를 후벼 파고 지나가도 사지이기에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할 뿐, 버려진 뒤에도 다시 버려지는 폐사지가 갈항사지다. 갈항사지는 절 터 입구에 또한 거대한 골재 공장이 들어서 먼지로 가로막고 소음으로 접근을 통제한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 금오산 골짜기에 빈 껍질로 남아있는 갈항사지는 옛 절터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과수원, 담배밭, 고추밭으로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다만 한번 부처님과 맺은 인연은 영원한 것이어서 법등은 식었어도 꼭지 무른 과실들은 과즙이 넘치고 풀꽃들은 향기가 넘친다. 인연 따라 상(相)과 용(用)은 변해도 한번 향냄새 짙게 배인 그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갈항사지는 행정구역상으로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위치한다. 황악산에 직지사가 있다면 금오산의 암봉 아래 마땅히 갈항사가 자리하여 소백산 줄기의 정기를 김천 땅에 모으고 상주~문경, 영동과 무주, 삼도시장의 장터를 열어 세간의 인심을 풍요케 했던 것이다. 갈항사지로 오르기 위해 지나치는 갈항마을은 돌담과 돌담사이의 나이 든 감나무 울타리들이 숯검정 같은 껍질을 두르고 잊혀진 세월을 지키고 있다. 아귀가 뒤틀린 돌담 아래 해바라기를 하다가 감나무 가지처럼 뒤틀린 손가락으로 절터를 일러주는 벙어리 노파의 손짓이 무표정하기만 하다.
<삼국유사>에는 효소왕 1년(692) 당나라에서 귀국한 화엄종의 고승 승전(勝詮)법사가 어느 해인가 금오산 자락에 절을 짓고 돌해골(石 )을 청중으로 하여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돌해골은 석화된 해골로 이를 천도하기 위해 승전법사가 법회를 베풀었다는 추측과 함께 돌해골 80여개가 전해온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전설조차 땅 속 깊이 어딘가에 묻혀 다시 들려줄 이들도 없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갈항사지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갈항사지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사세를 이끌어 온 것으로 추정되나 어느 때 무슨 이유로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되었는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2001년 6월 경상북도는 가야문화권의 역사문화유적지 보존 정비 계획을 세워 갈항사지 발굴 정비로 73억원을 책정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아직까지 갈항사지는 발굴정비는 물론, 사적지 지정도 안 되고 있다.
갈항사지에는 현재 보물 245호인 오봉동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석조비로자나불 1기와 갈항사터 동서삼층석탑(국보 제99호)의 표지판만이 남아 있다. 절터 위쪽에 사세의 부흥을 꿈꾸며 새로운 갈항사가 들어섰으나 사찰의 복원은 막막해 보이기만 한다. 사지 한 켠에 편액도 없는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비록 코는 무너졌으나 아직도 눈매가 분명하게 살아있고, 목에 두른 삼도도 부드럽게 느껴진다. 불 상 뒤의 구멍으로 보아 광배를 세웠던 흔적이 있으나 항마촉지인을 한 천년의 불상은 무언의 설법을 계속할 따름이다. 오늘의 처지가 안쓰러운 것은 전각 앞 밭둑 철책 안에 갇힌 비로자나좌상이 한층 더하다. 옛 추억은 기억하기조차 싫은지 본래의 머리를 잃고 이물스러운 새머리로 교체된 비로자나불상은 철책이 보호각이 아닌 철창처럼 느껴져 마주 하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차라리 시원한 무두불이 낫지 않았을까. 진열장의 마네킹처럼 무덤덤한 저 새머리에는 무슨 상념들이 저장되고 있을까. 허전하기는 폐비닐 조각이 나부끼는 고추밭에 나란히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의 표석도 마찬가지이다. 부재와 탑신이 뿔뿔이 흩어진 채 정작 사지에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표지 돌만이 쓰러질듯 서 있는 것이다.
경복궁 안 민속박물관 입구에 무연히 서 있는 갈항사터 동서삼층석탑은 국보급의 성보답게 갈항사지의 존재를 세인에게 알려주는 신라의 대표적 삼층석탑이다. 1916년 2월12일 밤 도굴꾼들에 의해 탑 내에 간직했던 유물을 잃고 무너진 두 개의 삼층석탑은 가까스로 경복궁으로 옮겨진 가슴 아픈 수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갈항사터 동서삼층석탑은 건립연대가 밝혀진 많지 않은 신라 석탑 가운데 하나이고, 신라석탑으로서는 유일하게 기단부에 금석문이 남아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라는 점에서 그 조형미의 우수성과 함께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이 두 탑을 가리켜 “단려하고도 아순(雅淳)한, 가장 문아(文雅)한 탑 중의 하나”라고 극찬하였다. 얼마 전까지 남면사무소 뜰에 장식물로 주저앉았던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 4기도 최근 직지사로 옮겨졌다는 소식이다. 한 때는 신라 왕실의 발걸음이 빈번했을 옛 가람 터에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날아드는 산꿩이 푸드득거릴 뿐 흰 구름조차도 금오산 능선에 머문 채 발 길을 끊고 있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성주 법수사지편
갈항사지 가는길
갈항사지는 김천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김천교를 건너 구미로 가는 906번 도로로 접어든 다음 오봉저수지를 지나 삼가마을 방향으로 1,7㎞ 정도 가면 된다. 삼가마을에서 갈항마을로 가는 길은 골재채취공장이 가로막고 있는데, 공장을 지나쳐 산 밑 마을까지 올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