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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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
정림사탑·미륵사탑

미륵사지석탑은 2002년 10월 이후 해체 보수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일제강점기 때 보수를 위해 발라놓은 시멘트를 제거하고 원형을 최대한 살리려는 작업이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그런데 이 미륵사지석탑은 같은 백제의 탑이라도 정림사지5층석탑과 다른 모습이다. 두 탑 모두 지붕이 얇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정림사탑은 홀쭉하고 미륵사탑은 뚱뚱하다. 이러한 미의식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의문은 정림사탑과 미륵사탑 가운데 과연 어느 탑이 먼저 조성되었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 문제는 이미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가인 고유섭 선생이 제기한 바 있다. 고유섭 선생은 미륵사지탑이 목탑의 구조가 비교적 충실하게 남아 있고 정림사탑은 보다 간략화 된 점을 들어 미륵사지탑이 더 오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미륵사탑은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목탑을 번안한 모습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서까래를 3단의 계단받침으로 나타내고, 많은 기둥을 설치하며, 창방의 구조를 표현하는 등 목조건축의 가구법을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자 윤무병 교수는 발굴을 통하여 정림사탑이 정림사가 세워진 6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640년에 세워진 미륵사지탑보다 앞섰다는 반론을 폈다. 붓의 논리에 칼의 해부로 대응한 그러한 논쟁이다. 여기에 문명대 교수는 양식적인 분석으로 윤무병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정림사탑이 미륵사지탑보다 나중이든 먼저이든 분명한 것은 정림사탑이 보여준 우아한 미의식은 사비시대를 반영한 양식이고, 익산 미륵사지탑의 위엄 있는 미의식은 익산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사비시대란 부여를 수도로 정한 시기를 말하고, 익산시대란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기 위해 왕궁, 미륵사 등을 건립한 시기를 말한다. 설사 정림사탑이 미륵사지탑보다 후에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정림사탑에는 사비시대에 유행했던 양식이 짙게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시대에 일본에 영향을 준 탑, 예를 들면 호류지5중목탑의 몸체가 홀쭉하고 지붕이 얇다는 점에서 그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사비시대 때 정림사탑식의 우아한 양식이 주류를 이루다가 익산시대를 맞이하여 미륵사탑식의 위엄 있는 양식으로 바뀐 것이다. 익산의 새로운 시대에 부흥하여 백제로선 전무후무한 대규모 사찰을 조성하다보니 그 규모에 걸맞은 위용을 갖추기 위해 괴체감이 풍부한 탑을 조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이후에도 이 두 탑은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 탑들의 모범이 된다. 부여 장하리3층석탑, 금골산5층석탑, 비인5층석탑 등은 정림사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익산 왕궁리5층석탑과 부여 무량사5층석탑 등은 미륵사탑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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