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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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찾아야 하고 나로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
자기 마음의 주인에게탁 일임시키고 중심을 잡고 나가야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요?

요즘 저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회 경제적인 문제에 끄달려서 하루하루를 그냥 정신없이 보내고 있습니다. 스님, 부끄럽지 않은 참다운 수행자가 되고 싶은데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허전해 집니다. 저희가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요?

우리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서로 공생하고 공용하면서 공체로서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반면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개개인이 있습니다. 차원에 따라서 말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인간이라 하면 ‘우리 이 자체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스스로 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면서 모든 일을 꾸려 나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거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온 고장을 모르기 때문에 갈 고장도 모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들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근본, 자기 뿌리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놔라 이렇게 해도 ‘뿌리가 뭐 말라빠져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나 봅니다. 어떤 분들은 오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도 과감히 놓고 가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7, 8년이 돼도 놓고 가지 못합니다. 이건 무슨 까닭일까요. 자기 마음으로써 자기를 다스리고 행을 하면서 그 행하는 자체가 바로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거를 알고 모든 거를 놓을 수 있다면 될 텐데, 그거를 모르고 항상 방황하고 관습을 좇아서 ‘이거는 이렇게 하면 안되고 저거는 저렇게 하면 안되고’ 하면서 끄달리고 가니 어떻게 걸림 없이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나를 발견한다면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고, 상대를 발견했다면 세상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벌어진 일들인데도 나로부터 찾지 않고 나로부터 생각해서 다스릴 줄 모르고, 나한테 닥치는 용도대로 모든 것을 그 자리에다 다시 입력을 해서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게 할 줄 모르고 이런다면 일일이 닥치는 것을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할 수 없느니라.’ 하신 뜻도 거기에 속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내가 수 해를 두고 수십 년을 두고 이렇게 해도 여러분이 그 뜻을 모른다면 항상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에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옷을 바꿔 입는다 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한 대로 옷을 입고 나오니 얼마나 부자연스럽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고양이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개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돼지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천차만별의 옷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산 대로 말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사람의 의식이 남아 있는데다가 개 모습을 하고 나온다거나 돼지 모습, 소 모습, 토끼 모습, 곤충의 모습, 저 나무의 모습 등 가지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이겠습니까? 상대방들은 모두 옷 입은 대로 대접을 해 줄 겁니다. 독사 소굴에 들어가서 독사가 되었다면 독사의 대접을 해 줄 수밖에는 없죠.
그러한 고로 여러분이 지금 사실 때에 어떻게 살아야만이 잘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만이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이 아니게 중용을 할 수 있으며, 중용을 하는 데도 걸림 없이, 어떠한 거를 본다 듣는다 해도 구김살이 없이 자유스럽게 무명을 벗겨 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가 무명을 벗은 고로 어떠한 곤충에 이르기까지라도 보고 들으면 무명이 벗겨질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가 자기를 알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불(佛)이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를 막론해 놓고 다 생명 없는 것이 없으므로 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해서 돌아가게 했고 천차만별 생명들의 모습들이 다 그 나름대로 전달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이면 미국말 하고 일본 사람이면 일본말 하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 하듯 다 자기네들끼리는 말을 하는 겁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말을 하고 전달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가운데 특출한 거는 뭐냐? 말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도리입니다. 이게 정신계의, 바로 중용의 진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돌아가는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의사나 과학자나 천체물리학자가 자기 소임을 행하는 데 있어서 모든 문제들을 걸림 없이 타개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 거는 일체 우주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가깝고 멀고가 없이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병원만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학술 이론 등 지식이나 의학계의 모든 거를 동원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100%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 온 줄을 알아야 그 병도 어디서 온 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계의 50%를 충당할 수 있고, 거기에 물질로써 커버하고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의료상의 50%가 종합돼야 우리가 100%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기술 분야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어도 다 그러합니다. 기계 하나를 만들어 놔도 그 사람의 혼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바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장승을 하나 세워 놔도 장승 세워 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가고 오면서 보고 생각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거기 투입이 돼서 다 신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조성을 해서 모셔 놓으면 그 모습만 봐도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마음을 거기다 다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없다면 부처님도 안 계신 거고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 내는 것이 없다면 목석이 될 것이고, 체가 없다면 무효일 것이고, 정신계의 근본이 없다면 또 무효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아주 높은 데고 낮은 데고 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요

관하는 도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조석으로 체험을 해 가고 있습니다만 정신적인 경계와 부닥칠 때는 항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대로 하고 있는데도 실마리가 잘 풀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좋은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라야 열쇠를 맡길 수 있지 믿지 않는 사람한테 어떻게 보물창고 열쇠를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로 믿는다면 열쇠를 탁 줘서 맡길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다 하면 벌써 자기를 이끌어 가는 운전수인 줄 알아야 하는데 아리송하면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다는데’ 하고서 맡겨 놨다 도로 뺏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서류를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이러니까 일을 해낼 수가 없는 겁니다. 믿고 맡겼다고 하지만 그냥 겁이 나고 그러는 것이 도로 뺏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류를 도로 뺏으니까 일을 못하죠? 또 얼마 있다가 가라앉혀 가지고 또 맡긴단 말입니다. 맡겼다가는 조금 있다 또 그런 건 어디로 간 곳이 없이 또 뺏는단 말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그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진짜로 믿는다면 내 생명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고 안 믿고 간에 바로 자기를 형성시켜서 자기를 이끌고 가는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믿어야 하는 것이지 믿지 못하고 주인공이 따로 있고 자기가 따로 있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진짜로 믿고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 또 해결하게 하는 것도 너, 해결 못하게 하는 것도 너,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진짜 맡겼을 때에 정말이지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믿는다면 무의 세계 유의 세계, 즉 정신세계 현실 물질세계, 이것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거든요. 어떻게 바닷물이나 그 모든 게 수증기로 올라가서 다시 내리게 됩니까? 그런 것도 자동적으로 작용을 해서 우리 생명들이 다 살 수 있게끔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둘이 아니에요. 물 불 전부가 두 마음이 아니에요. 전부 나인 것입니다. 내 생명인 것이고, 내 마음인 것이고, 체(體)가 다르다 뿐이지 나인 것입니다.
지수화풍이 크고 작을 뿐이지 바로 나도 지수화풍이요, 이 세상도 지수화풍입니다. 모두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컵이라는 것도 지수화풍으로 인해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생산이 된 거예요. 흙을 물로 개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넣어서 구워서 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컵도 오온의 한 진리에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등장을 한 겁니다.
하여튼 그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식물도 태양빛과 바람, 공기, 흙, 이 모두가 아니라면 어떻게 자랄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먹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그렇죠. 일체 만물이 다 그래요. 그러니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져 살면서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지수화풍 주머니에서 지수화풍 주머니로 또 살고 있죠. 그러니까 이 지수화풍 주머니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겁니다. 벗어나야 지수화풍을 마음대로 작용해서 모든 사람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부라는 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생활이 즉 종교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종교며, 그 종교가 바로 삶의 보람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채찍이며 스승이며 바로 자기 몸뚱이가 마음에 의해서 이끌어져 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이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바로 정신계와 물질계를 둘 아니게 굴릴 수 있는 능력자가 돼서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것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위해서

저는 시장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업상에 있어 조금 의문이 생겨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경계를 주인공에 믿고 놓으라고 항상 저희를 가르치십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사회에서 온갖 경쟁 속에 분초를 다툴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경쟁 입찰이나 공매 등 이권이 있을 때 내가 이득을 취하면 상대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니 자리이타의 행위에 어긋날 수도 있으며, 주인공에 믿고 놓아 욕심을 내지 않자니 사회 활동에 소극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수행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활용 방법에 대하여 설하여 주십시오.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다 놓으라고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욕심도 부려야 하는데 어떻게 다 놓고 삽니까?’ 하는 소리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 몸속에 내가 얼마나 많은데 나 혼자 하는 거냐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몸속의 생명들을 끌어낸 겁니다. 보십시오. 혼자 한 겁니까? 심부름한 거지요. 돈을 버는 것도 그 생명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심부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을 못 벌게 해서 굶주리게 하는 것도 그 자리고, 돈을 잘 벌어서 잘 먹이게 하는 것도 그 자리다 이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한 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을 설하실 때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착하게 그냥 가만히 목석처럼 있어라.’ 이러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되 함이 없이 해라. 네가 한 게 아니라 진짜 네가 한 거라고 하신 거죠. 네가 한 게 아니라 네가 한 거니라. 그렇다면 개별적인 내가 한 게 아니라 포괄적인 내가 한 거다 이 소립니다. 포괄적으로 했기 때문에 혼자 한 게 아닙니다. 혼자 먹고 살 양으로 한 게 아니고 혼자 누리려고 한 게 아니고 공동으로 포괄적으로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했다 하지 말고 한마음 주인공이 하는 거니까 나는 심부름만 해 준다고 한다면 그렇게 남한테 아주 악의적으로 사기 치지도 않을 것이요, 또는 버리지도 않을 것이요, 아주 규모 있게, 즉 말하자면 중도에서 잘 이끌어 나갈 겁니다. 그래서 함이 없이 하라 이거지 꼼짝 않고 목석처럼 가만히 있어라 이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혼자 하는 게 아니고 한마음이 하는 거니까요. 당신 혼자 하는 게 아니고 한마음이 하는 거니까 주인공이 하는 거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주인공이 함이 없이 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이래도 알아듣지 못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물 한 컵을 먹으면서도 내가 혼자 먹은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여럿이 먹었기 때문에요. 내가 물 한 모금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여럿이서 다 먹는 거죠. 그리고 내 몸속의 여럿이만 먹습니까? 내가 먹어서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을 다들 먹고 또 내놔요. 내놓으면 또 수증기가 돼서 올라가서 또 다시 내려와서 또 먹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먹으면 나오고 나오면 서로 다 같이 먹습니다.
이 미묘한 도리를 알아서 챙긴다면 모두 함이 없이 내가 하는 바가 없이 하는 것이고, 내가 심부름을 하는 것이니 관리인이고 집합소다 이겁니다. 난 집일뿐이에요. 그러니까 생명들이 살고 있는 이 집이 망가져도 너희들이 고쳐서 살라고 이런 거나 한가지죠. 그런데 그것이 이치에 닿나 안 닿나 좀 보세요. 우리가 집을 지어 가지고 사는데 만약에 집이 헐어졌다면 집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고치지 집이 집을 고칩니까? 자기 몸뚱이가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체들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네들이 들어 있기 위해 형성을 시켰으니 고장이 나면 그 집에 들어 있는 자기 주인이 고쳐야지 아니, 집이 집을 고칠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라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 벌이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하되 자기가 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공심으로 하라는 거죠.

삶이 너무 힘들어요.

저는 취업재수생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떳떳한 직장을 잡아 부모님 호강을 못 시켜 드리더라도 남들에게 부끄러운 자식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계속되는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가을이 지나고 나면 후배들이 또 사회에 흘러 들어올 텐데 자신이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 힘들고 길가에 떨어져 누운 낙엽처럼 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할는지요?

비유해서 말하자면, 여러분이 항상 차를 타고 다니시죠? 만약에 여러분이 시발점에서 버스를 탄다면 타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탈 때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내가 내릴 때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데 말입니다.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데 항상 내리는 게 걸리지 않으면 타는 게 걸리고, 타는 게 걸리지 않으면 내리는 게 걸립니다. 그런데 자동적이 아닙니까?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상대성의 원리라고도 하구요. 우리 몸에 정맥 동맥이 없으면 이어서 돌아갈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럼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 누가 내리고 타고 할 수 있게끔 마음을 가졌느냐는 얘깁니다. 그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유스럽습니다. 우리를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했고, 자유롭게 행하고 삶을 살 수 있게끔 돼서 사람이라 그런 겁니다. 사람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체가 없는 마음을 맘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유스러운 자기 마음들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에 매달리고, 안된다는 데 매달리고, 된다는 데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차를 타는 데도 매달리고 내리는 데도 그냥 저절로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왜 끄달립니까? 내가 갈 데 있으면 묵묵히 타는 거고 또 내려야 할 때 묵묵히 내리면 되고 이러는 거지, 밖에 참섭 안에 참섭, 이거 내리는 거 저거 내리는 거, 남이 내리는 거 오르는 거 다 참섭하면서 온통 걸리고 돌아가니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겠습니까.
내 육체를 여래의 집으로 삼고 산다면, 한마음의 심봉은 자유스러운 겁니다. 자유스러운 건데도 여러분은 생각하는 대로 여기 매달리고 저기 매달리고 끄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끄달리는 겁니다. 그런데 되는 것만 귀중하고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안되는 것은 ‘이게 또 안되는구나!’ 이렇게 걸리는 겁니다.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 아니겠습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어저께 밤에 모두 주무셨죠? 오늘 낮에 하루 일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하루 살기 위해서 밤에 잘 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모두들 잤습니다. 그런데 밤과 낮이 어디 마음으로 볼 때는 둘이겠습니까? 묘한 점은, 낮에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반영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밤에 잘 때는 육신을, 집을 팽개치고 그 의식들이 나가서 온통 자기가 생각하고 행하고 말한 대로 움죽거리고 돌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을 안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안 저지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고,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저지르게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또한 잘 때는 육신을 내버리고 하니까 제한도 되지 않습니다. 낮에 입력이 된 대로 털구멍을 통해 나가서 활약을 하는 거죠. 나쁘게 생각했다면 나쁘게 모든 걸 이어서 가져오게 만들고, 좋게 생각을 했다면 좋게 인연을 맺어서 가져오게 만들고, 화가 나지 않게 모든 걸 거기 놓고 갔다면 밤에 잘 적에도 화가 나지 않게 수습을 하고, 이렇게 항상 내가 하는 대로 원숭이처럼 쫓아간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입력이 돼서 원숭이처럼 그냥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따로 있고 낮이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정신이 따로 있고 육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잘되는 것도 주인공에다 놓고 안되는 것도 주인공에다 놓아야 된다는 겁니다. 시발점 종점으로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타는 시발점에서도 내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내리는 종점에서도 또 시발점으로서 타는 사람이 있고, 동시에 타고 내리는데 어떠한 것을 안된다 된다 이런 말로 소홀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다 법입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은 나의 뜻을 보기 위해서 안되는 것이니까 나를 아주 튼튼하게 반석처럼 가르치기 위한 테스트라고 생각하고 그걸 재료로 생각하신다면 너무나 감사하고 또 믿고 거기다 놓을 수 있습니다. 또 되는 거는 되는 거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우리가 타는 것만 법이고 내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생명을 유지하고 나갑니까.
일체가 다 그러하니 여러분의 체가 없는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되는 건 안된다고 야단입니다. 내릴 때는 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부득부득 타고만 간다면 그건 또 잘못되는 일이죠. 그러니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둘이 아니에요. 그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니 바로 내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란 놈이 얼마나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모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바로 마음을 마음대로 할 때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면서 바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천차만별의 생명들이고, 천차만별의 모습들이고, 천차만별의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차원대로 가고 있는데 왜 스님은 별나게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놓으라고만 그러십니까, 그러겠죠? 어디 길을 지나가다 분수를 보셨습니까? 분수에서 물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묵은 물이 겉으로 나오고 겉의 물이 묵은 물이 되고 이렇게 한군데로 나와서 한군데에서 흩어지면 흩어지는 대로 또 모여서 거길 통해서 또 나오죠? 통하는 데는 한군데밖에 없어요. 들어가고 나오는 구멍이 한군데밖에는 없어요. 거기를 거치지 않으면 일체 모두가 이어지지 않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내려가면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가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정상입니다. 아래로 들 때는 저녁에 잠을 자는 것이고 위로 올라올 때는 낮에 일을 하는 것이고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게 낮과 밤이 없으면 못 살듯이 그렇게 작용을 하는 것이 그대로 법입니다. 그대로 법이에요. 그런데 그대로 법을 이끌어 나가는 데는 마음의 채찍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잘되고 못되고, 잘하는 거고 잘못하는 거고, 이건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를 전부 잘들 아십니다. 잘들 아니까 그거를 잘 다스려서 ‘이게 나쁘게 되는데 이렇게 잘 돌아가게끔, 맑은 물이 나와서 먹게끔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놨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움죽거리면서 채찍질해 가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도리가 엄청난 도리라고 생각하시고 열심히 하세요. 이 공부를 못하면 아예 세세생생에 발을 빼지 못할 그런 문제들이 지금 압도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도리를 잘 생각하고 몰록 그 자리에 놓고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잘 해결해서 악업, 업식 무명 속에서 벗어나 세세생생에 자유인이 돼서 사시길 바랍니다.

생활 속에서 근중하게 수행하려면

스님께서는 지금 당장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하더라도 내 근본 주장자를 믿고 웃을 수 있어야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금만 저에게 손해가 돌아오거나 고통이 온다면 방방 뛰기 일쑤이고 가볍게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생활 속에서 일체를 놓치지 않고 근중하게 수행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그것도 그렇죠. 누가 지금 빨래를 하는가, 장을 보는가, 누가 지금 밥을 짓고 있는가, 누가 남편하고 만나고 있는가. 그렇게 항상, 밥을 한 그릇 떠먹을 때도 마음에다 참구하고 먹으면 그냥 먹는 밥이 아니게 됩니다. 걸음을 걸을 때나 다닐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항시 생활할 때에 내가 밥 한 숟가락을 뜬다 하더라도 무겁게 떠져요. 가볍게 떠지는 게 아니에요. 마음을 참구하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량으로서 내가 그냥 밥을 홀랑홀랑 떠먹는 거하고 마음에 참구하면서 밥숟가락 드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아주 근중 있게 떠지고 근중 있게 움죽거리게 되고, 말도 근중 있게 하게 되고 무겁게 값비싸게 되지요. 값싸게 되는 법이 없어요. 울어도 값싸게 울지 않고 값비싸게 울게 되죠. 왜냐하면 안으로 참구하니까 주인과 더불어 울기 때문이에요. 현재의식이 우는 게 아니라 잠재의식과 식이 같이 울기 때문에 눈물도 값비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겁니다. 다니다가 비가 막 쏟아진다 할 때도 값싸게 강중강중 뛰어가질 않아요. 옷에 비가 막 흘러서 줄줄 흐른다 할지라도 값싸게 걸음을 걷지 않고 값비싸게 무겁게 걸음을 걷게 되지요.
그래서 천둥 번개가 친다 하더라도 값싸게 강중강중 뛰면서 ‘아이구, 천둥 번개가 친다.’ 그러고 어디로 막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눈도 하나 깜짝 안 하고 내 마음의 주인과 더불어 같이 터벅터벅, 그러니까 비가 오든 억수장마가 들든, 또 눈보라가 치든 또는 천둥 번개가 치든 자기가 걷던 걸음 그대로 걷게 되지요. 팔짝팔짝 뛰어 가지 않아요.
이게 마음의 주인과 더불어 일상생활을 전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 마음의 주인에게 모든 거를 참구하고 들어가라 이거예요.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주인이시여!’ 하구선 안에다 참구하고 들어가면 안에서 바깥으로 분산이 되지 않고 안으로만 참구가 돼서 거기에서 합일이 되고 마음의 계발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항상 계발이 되어야지 바깥으로 분산이 되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재차 말하지만 내 마음에다 참구하고 마음의 주인이 진짜로 믿어질 때 천둥 번개가 쳐도 절대로 빨리빨리 걸어지질 않고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죠. 옷에 비가 맞고 이러는 거, 소리 들리고 이러는 거 하나도 거기에 관여하지 않게 돼요. 그러면 그 백사 만사를 다 누가 하는가 이겁니다. 그게 소위 마음의 주인이 하는 거예요. 마음의 주인이 하는 걸 알고 참구하고 들어간다면 바로 완전히 잡히게 되니까 그때 비로소 삼세 우주 법계가 다 같이 공하다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아프면 약사보살이 될 수 있고, 무슨 죄가 생겼으면 신중이 될 수 있고, 검사 판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가난하면 관세음보살이 돼 줄 수 있고, 물에 들어가서 배를 타고 갈 때에 폭풍이 불면 내가 바람 부처가 돼 가지고선 바람을 막아 주고, 그럼으로써 내가 용왕이 된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어떤 급한 일이 생겼다 이럴 때는 마음의 주인한테 모든 거를 일임해 버리고 놔 버려라 이겁니다. 그럼 거기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는 내 마음의 주인이 다 해결을 하고 보이는 데서도 마음의 주인이 움죽거리게 한다 이거예요, 모든 일체를 다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마음을 잘못 먹어 가지고 구덩이에 빠지는 수도 있어요. 그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이 문제지, 절에 오고가고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보시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이게 문제도 아니라 오직 마음이 문제다 이겁니다. 마음이 그렇게 부족하면 남한테 벌써 잘한다 하면서도 남한테 좋지 않게 하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가 자기 하는 일을 모르니까요.
그래서 하나하나 일거일동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주인이 하는 것이니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항상 그 마음을 변치 말고, 자기 믿는 마음을 변치 말고 항상 타의에서 구하지 말라 이겁니다. 어느 누가 있어도 타의에서 구하게 되면 마가 생겨서 달려든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서 집안이 산란해지고 우환이 생기고 그러는 걸 누구한테다 항거하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 산란하여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 살림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고, 마음이 차분하게 자기 자신의 마음 주인한테 탁 일임시키고 중심을 잡고 있으면 항상 걸어가도 무겁게 걸어가지고, 바람이 불어도 끄덕도 안 하고 그냥 무겁게 걸어갈 수 있어요. 삼 톤 무게가 돼요! 그러니 아무리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친다 해도, 삼 톤이라면 얼만 줄 알아요? 삼만 톤이라도 돼요. 삼만 톤이 무겁게 걸어가는데 어디 바람에 쓸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냥 가볍게 사량으로서 ‘아이구, 이러면 좋단다, 저러면 좋단다.’ 이러면 중심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삼만 톤이라는 게 무겁질 않고 그냥 가볍게 됩니다. 그러니 땅에 발을 딱 디디면 삼만 톤이라는 무게가 무겁게 디뎌져야 비바람이 불고 뇌성벽력이 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가볍지 않고 무겁게 말입니다.
그래야 생활도 무겁고 값비싸게 돌아가고 내 몸도 값비싸고 무겁게 광채가 바깥으로 나며 향기가 나오고 여러 사람한테 이익하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겁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하게 하니 어찌 남한테 이익이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중생이라는 것은 항상 남을 접하고 상대를 두고 살아나가는데 어찌 해가 남한테 가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향기요, 그것이 빛이요, 그것이 능력이요, 그러니 그것이 보살행이다 이겁니다.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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