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스님 (2)
늦가을 산사의 새벽은 피부가 아리도록 시리다. 이 아린 추위 속에서 스님들은 부처님을 향해 예경을 올리고 집을 나서던 출가의 그 날을 기억한다. 따뜻했던 집을 나서 찬 바람 부는 산사로 떠나온 이들의 가슴 속에는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서원의 빛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 그 빛은 출가자들의 일생과 함께 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스스로 발원을 잃어버릴 때 그 빛은 스스로 꺼져버리고야 만다. 배고프고 추운 자리를 버리고 배부르고 따뜻한 자리를 찾을 때 그 빛은 소리도 없이 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스님들이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그 빛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찬 바람 부는 새벽을 지나 그날 아침 천호스님은 머리를 깎았다. 가위가 먼저 긴 머리를 자르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삭두질. 세속을 상징하던 머리카락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가고 출가의 상징인 삭발이 그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냈다. 처음 왔을 때처럼 삭발이 된 그 순간에도 그는 예의 그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삭발 전이나 삭발 후 똑같이 계속되는 그의 맑은 미소의 의미를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전생에 많은 시간을 출가해 본 사람처럼 삭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는 어쩌면 그가 먼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이미 극복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어쩌면 길 위에서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에 출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도보에 대한 의미는 삭발 후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고 물을 끓이고 도량을 청소하면서 그의 손등은 거미줄처럼 갈라져 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는 밤이면 그는 터진 손등에 바셀린을 바르며 시린 행자의 나날을 견디어 나갔다. 그리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대중의 공양을 짓고 낮이면 누구보다도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자생활에 대한 불만 어린 질문 한번 없이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했다.
그러나 그의 매력은 맹목적으로 일만 하는 것에 있지는 않았다. 일하는 짬짬이 햇볕이 드는 양지녘에 앉아 시집(詩集)을 읽곤 했다.
행자에게 시집이라. 왠지 맞지 않는 것만 같았다. 세속을 떠난다는 것은 문자와 감성도 함께 떠나는 것을 의미할 터. 행자에게 시집은 사치처럼만 생각되었다. 내게는 사치스러워 보이고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 의식의 차이를 어느 날 그는 한 순간에 무너트려 버렸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내게 읽어준 한편의 시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만 것이다. 그 때 그 시가 무엇인지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를 낭송하던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남저음의 목청 그리고 깊게 감긴 눈. 그것은 그의 삶이 얼마나 비세속적이었나를 말해 주고 있었다.
고답적이지 않지만 성실하고, 어리지만 나눔에 후했던 그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 이중섭을 좋아한다는 그는, 우시장에서 소 값을 잃고 울고 있는 농부를 향해 제 주머니를 다 털어 주는 이중섭 만큼의 사람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었다. 공양주 보살이 아플 때, 일하는 처사들이 어디 출타할 때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마른 땅을 핥고 지나가는 물결처럼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 위를 촉촉이 적시며 지났다. 부드럽고 넓은 마음은 그에게 다가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따스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사람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는 그의 자세를 보면서 출가란 어쩌면 모든 사람을 보듬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람에 대한 따뜻함 그리고 샘솟는 연민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어리지만 그의 의식과 철학은 나이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는 분명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일찍 깨어버린 학생이었다. 자본주의적 세상 그리고 인간의 소외에 대해서 그는 진정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가슴을 배워 버린 것이다. 그 가슴의 따뜻함과 눈물이 학교를 작파하고 10대의 그를 산문을 향하게 한 것이다.
상원사의 바람은 찬데 그는 오히려 이 곳이 세상 보다는 따뜻하다며 아궁이에 불을 때곤 했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